법답게 되고자 한다면 다만 의심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법답게 되고자 한다면 다만 의심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 법보신문
  • 승인 2013.04.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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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입는 것에 애쓰면
수행에 전념할 수 없어


수행의 가장 큰 함정 교만
불교 공부선 하심이 제일


선재동자 구법의 참 뜻은
부처임을 확인 받은 과정

 

 

▲ 중국 후베이성 황강에 위치한 오조사의 경내 법당. 오조사에는 오조 홍인 스님 어머니의 조각상을 모신 성모전이 있다.  

 


大德아 莫因循過日하라 山僧往日 未有見處時에 黑漫漫地라 光陰을 不可空過니 腹熱心忙하야 奔波訪道하야 後還得力하야 始到今日하야 共道流如是話度니라 勸諸道流하노니 莫爲衣食하라 看世界易過하며 善知識은 難遇니 如優曇華가 時一現耳니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대충대충 시간을 보내지 말라. 산승이 지난 날 깨달은 바가 없었을 때 캄캄하기만 했다. 시간을 부질없이 보낼 수 없어서 뱃속은 뜨겁고 마음은 안정이 안 돼 분주하게 도인들을 찾아 다녔다. 나중에 힘을 얻어서 비로소 오늘에 이르게 돼 수행하는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권하노니, 입는 것과 먹을 것에 너무 애쓰면 안 된다. 세상은 쉽게 지나가고 선지식은 만나기 어렵다. 마치 우담바라 꽃이 한번 피는 것과 같다.”

 

강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과 입을 것에 힘쓰면 안 됩니다. 오로지 일념으로 수행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깨닫겠다는 마음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세월은 너무 허망하게 흘러가 버립니다. 선지식을 만나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람 몸 받아 출가한 인연이 3000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 꽃보다 더욱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우담바라 꽃은 부처님이 출현할 때 핀다는 상서로운 꽃입니다.

 

儞諸方이 聞道有箇臨濟老漢하고 出來便擬問難하야 敎語不得타가 被山僧全體作用하야 學人이 空開得眼하나 口總動不得하고 懵然不知以何答我하니 我向伊道호되 龍象蹴踏은 非驢所堪이로다 儞諸處에 祇指胸點肋하야 道我解禪解道하나 三箇兩箇가 到這裏하야 不奈何하니 咄哉라 儞將這箇身心하야 到處簸兩片皮하야 誑諕閭閻하니 喫鐵棒有日在로다 非出家兒요 盡向阿修羅界攝이니라

 

해석) “그대들은 여기저기서 임제라는 늙은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곧바로 어려운 질문을 하여 말문을 막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산승의 전체작용을 입으면 학인들은 부질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해져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코끼리의 왕이 땅을 걷어차며 걷는데 노새 따위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대들은 여기저기서 가슴을 내밀고 우쭐대며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말하는데 두 사람이건 세 사람이건 여기까지 와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그대들은 그러한 몸과 마음으로 가는 곳마다 입술을 나불거리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니 철봉을 맞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출가자라 할 수도 없다. 모두가 아수라의 세계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강의) 공부를 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교만입니다. 조금 알면 마치 다 안 것처럼 설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작인데, 이미 끝난 것처럼 으스대고 뽐내면 공부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에 있어 하심(下心)이 중요합니다. 임제 스님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이라는 선지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보다는 온갖 이론과 현학적인 지식을 자랑하며 임제 스님을 골탕 먹이려는 학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은 이런 질문에 대해 말로써 따지지 않고 전체로 작용해 버립니다.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깨우침을 준 것입니다. 고함을 치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하는 방식입니다. 학인의 근기에 맞게 온 몸으로 진리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면 학인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넋이 빠져서 혼란스러워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임제 스님은 코끼리와 같은 당당함을 어찌 노새의 깜냥을 가진 학인들이 짐작이나 하겠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엔 얕은 지식으로 깨달음이나 얻은 것 마냥 선과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과거보다 더욱 많습니다. 임제 스님은 이런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 끌려가 철퇴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수행자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잘못된 견해는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싸움을 불러오게 됩니다. 결국 아수라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夫如至理之道는 非諍論而求激揚이며 鏗鏘以摧外道니라 至於佛祖相承하야는 更無別意요 設有言敎라도 落在化儀三乘五性人天因果니라 如圓頓之敎는 又且不然하야 童子善財가 皆不求過니라

 

해석) “대개 지극한 이치의 도라는 것은 논쟁으로 높이 드러내거나 큰 소리를 쳐서 외도를 꺾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말과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삼승과 오성과 인천인과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원돈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면서 다녔던 것은 아니다.”

 

강의) 불교를 이치로 따지고 분석하게 되면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말과 글은 본질에 닿지 못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사과라는 단어가 실제 존재하는 사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과를 잘 설명한다 해도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 맛과 향을 알 수 없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가르침은 진리 자체는 아닙니다. 여기에 집착이 더해지면 깨달음은 저 멀리 떠나버립니다. 원돈(圓頓)의 가르침은 바로 진리에 계합하는 것입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입니다. 단번에 구구절절한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의 가르침이 이렇습니다. 선재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53분의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면 법을 구한 수행자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은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러 다닌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부처임을 확인받고 다녔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大德아 莫錯用心하라 如大海不停死屍니라 祇麽擔却하야 擬天下走하나니 自起見障하야 以礙於心이라 日上에 無雲하니 麗天普照요 眼中에 無翳하니 空裏無花로다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마음을 잘못 쓰지 말라. 큰 바다가 시체를 그냥 머무르게 두지 않는 것과 같다. 등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니 스스로 견해의 장애를 일으켜 마음을 가로 막는 것이다. 해가 떠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으면 아름다운 하늘을 두루 비추고 눈에 티끌이 없으면 허공에 꽃이 없다.”

 

강의)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바다는 청정한 것을 좋아해서 부정한 것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이런 바다의 미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에 편견과 독선, 아집을 가득 담고 선지식을 찾아 천하를 주유하지만 결국 깨달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견해가 장애를 일으켜 마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부처입니다. 스스로 태양입니다. 진여가 번뇌 망상과 구름에 가려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태양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게 되면 찬란한 빛이 아름다운 세상을 두루 비추게 됩니다. 눈에 붙어있는 티끌이 제거되면 꽃처럼 보였던 뿌연 안개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체와 같이 몸과 마음에 짊어지고 있는 쓸데없는 망상만 벗어버리면 됩니다.

 

道流야 儞欲得如法이면 但莫生疑하라 展則彌綸法界하고 收則絲髮不立하야 歷歷孤明하야 未曾欠少하고 眼不見이요 耳不聞이니 喚作什麽物고 古人이 云, 說似一物이라도 則不中이라하니 儞但自家看하라 更有什麽오 說亦無盡이니 各自著力하야 珍重하라

 

해석) “여러분! 그대들이 법답게 되고자 한다면 다만 의심을 내지 말라. 펼쳐지면 온 법계를 싸고도 남지만 거두면 가는 실도 세울 데가 없다. 뚜렷하고 스스로 밝아 일찍이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니 어떻게 불러야 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은 다만 자기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라. 다른 무엇은 없다.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 각자가 스스로 노력하라. 수고들 했다.”

 

강의) 의심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부처임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크기가 한량없이 넓습니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마음은 이를 다 품습니다. 펼치면 온 법계가 모두 들어갑니다. 그러나 좁을 데는 바늘 하나 세울 구석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스스로 밝아 조금의 모자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남악회양(南岳懷讓) 스님이 육조혜능 스님을 만났을 때 육조혜능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남악회양 스님이 대답합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당체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 밖으로 돌지 말고 스스로 잘 살펴야 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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