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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비봉산 대곡사

신라말 고려초 창건 추정
9개 암자 거느렸던 대찰
공민왕때 나옹 스님 중창
종 없는 종각·석탑 ‘고풍’

 

 

▲봄볕이 대곡사 앞마당에 내려앉았다. 다층석탑이 범종 잃어버린 종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멀리 목련과 벚꽃이 봄을 알리건만.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는 무엇을 기다릴까. 석탑의 시선은 텅 빈 범종각을 가로질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봄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일주문보다 먼저 마중 나왔다. 분홍빛 벚꽃은 일주문 뒤에서 수줍게 섰다. 봄볕은 의성 비봉산 대곡사(주지 등목 스님) 경내를 쓸다 말다 반복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애꿎은 구름 탓이다. 한가로운 4월 하늘을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 못내 부러운 게다.


일주문서 반쯤 번뇌 비우니 반쯤 남은 망상마저 씻고 오라며 세심교(洗心橋)다. 그 아래 비봉산 자락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 소리가 싱그럽다. 초목들의 뿌리 품고 겨우내 얼어붙어있었던 흙이 기지개를 켰으리라. 보드라운 흙내음이 전해졌다. 바람은 서늘한 기운을 몰고 왔다. 풍경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간혹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바람은 음악이기도 했다. 마른 낙엽이 허공을 무대삼아 춤추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범종각에 이르는 길, 앙칼진 눈매로 눈을 부릅뜬 돌장승이 버티고 섰다. 사천왕문이 따로 없는 대곡사의 호법신장 같았다. 무섭게 뻗은 송곳니가 무색하게도 입에선 웃음이 삐죽거렸다. 야트막한 돌담길이 범종각으로 안내했다. 범종각은 화려한 단청 옷을 입지 않았다. 하다못해 현판도 단출했다. 아직 봄을 맞이하긴 이르다는 고집이었다. 처마도 나무기둥도 2층의 나무 바닥도 세월에 빛을 잃은 게 아니었다. 껍질 벗긴 채 범종각을 이룬 그네들의 속살 빛깔에 세월의 옷을 입은 것뿐이었다. 그대로 범종을 품에 안았을 게다. 지금, 여기에 범종은 없었다. 용문사로 이전됐다는 설명만 남았다. 그래도 종각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언젠가 비봉산 자락에 깃들어 내밀히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붙이들의 무명을 밝힐 범종 소리를 기다리는 중일까. 그 기다림에 범종각 밑을 지나야 하는 신심은 대곡사 문턱 넘기가 조심스러워 절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송곳니 내놓고 웃고 있는 돌장승.

 


봄볕이 대곡사 앞마당에 내려앉았다. 인기척 없는 절집 마당을 쓸다 만 일이 마음에 걸렸으리라. 범종이 자리를 비운 종각을 다층석탑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멀리 목련과 벚꽃이 봄을 알리건만,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는 무엇을 기다릴까. 석탑의 시선은 텅 빈 범종각을 가로질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곡사 다층석탑.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만든 연화대좌, 탑신만 남았다. 석탑이나 석등의 지붕돌인 옥개석만 쌓아놓은 고려초 청석탑 양식이었다. 전국에 걸쳐 지금까지 조사된 청석탑은 12기 정도에 불과하단다. 상륜부는 유실됐다. 동그란 돌 하나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았다. 그 위에 다시 작은 돌 2개가 놓였다. 옥개석 사이사이에 많은 돌들은 이미 이곳을 지나갔던 신심들이었다. 찬찬히 탑을 살피다보니 자연스럽게 탑돌이다. 가만히 마음 한 조각 올려본다.


석탑을 가운데 두고 ‘ㅁ’자 모양으로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대웅전도 범종각처럼 세월을 옷 삼아 두르고 있었다. 여느 사찰에서 보이던 단청도 없었다. 벽화 하나 문고리조차 없었다. 벽화로 단청으로 문고리로 가타부타 말을 걸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가니 산신각이 대웅전 뒤를 받치고 있었다.

 

 

▲대곡사 범종각은 봄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천년 가까운 세월이 제 몸 휘감고 있어도 그 무게를 견디고 있다.

 


산신각을 참배하려는 찰나, 열렸던 문 한쪽이 오른 팔을 세차게 내리쳤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슨 경책이실까. 대웅전을 먼저 참배하기로 했다. 향 하나 사르고 3배를 올렸다. 좌복 위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았다. 소리는 숨을 죽였다. 가끔 찬바람에 풍경이 잔기침을 했을 뿐이었다. 향냄새가 퍼졌다. 대곡사 대웅전 부처님도 꾸밈이 없었다. 부처님을 찬탄하며 수미단에 새겨져야할 무늬들이 자취를 감췄다. 닫집도 색이 바랜 모습 그대로였다. 용도 학도 부처님 머리 위를 수놓지 않았다.


정갈함이 세월 속에 묻어났다. 아니, 부처님은 정갈함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여유가 사라진 현대인들 마음에서 요란한 번뇌를 거둔 느낌이었다. 대웅전 법당 안 기둥에 걸려 있는 죽비 하나가 마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방종이 아닌 자유자재함. 길 벗어나면 내리치며 경책하는 죽비처럼 부처님 지혜가 마음에 굳게 서야 할 테다.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쥔 부처님에게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자유자재함이 풍겼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 스님의 시다. 1320년 경북 영해에서 태어나 20세에 출가하고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로 가서 수도 연경에 있는 고려 사찰 법원사에서 인도 출신 지공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스치듯 지나간 대곡사 안내푯말이 떠올랐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 나옹 스님이 중건했단다. 그 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겪으며 전소됐고 조선 선조 38년(1605), 숙종 13년(1687)에 중창됐다고 했다. 본디 아홉 개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현재 적조암만 남았다고 한다.


뒤에 살펴본 자료에 따르면 창건 시기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향토사연구 제1집(1989년 11월 간행)에 의하면 대곡사 창건연대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걸쳐 창건됐다고 기술했다. 1196년 8월17일에 백운 거사 이규보가 쓴 ‘십칠일입대곡사 탐방시’와 다층석탑의 양식, 1960년 대곡사 텃밭에서 발굴된 통일신라 후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이 근거였다.

 

 

▲대곡사 경내. 대웅전 앞에 석탑, 오른쪽에 요사채가 있다.

 


고려말 대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고려 명종 26년(1196), 29세의 나이로 혼자 조랑말을 타고 전국을 유랑했다. 그러던 중 8월17일 가을바람 부는 늦은 저녁 대곡사에 들었다.


“돌길은 울퉁불퉁 오르락내리락/ 조랑말 타고서는 채찍 치며 가는구나./ 바람은 조용히 안개를 쓸어가고/ 지는 달은 때때로 새벽빛에 밝아지네./ 산기슭 앞으로 사찰 편액 보고서/ 배 옆의 언덕에서 여울 이름 묻는구나./ 외로운 마을 어디서 젓대를 부는가/ 타향에서 병 앓으니 쉽사리 마음 아파/”(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중)


지공 스님은 1363년 입적했다. 행적과 대곡사 창건시기가 맞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살았던 이규보가 생전에 이곳을 다녀갔다. ‘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절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신라 때라고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알 수가 없다. 중간에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서천의 지공 즉 박타존자가 중국에 이르러 나옹에게 불법을 전수한 후에 나옹과 함께 이곳에 와서 주변을 살피고는 절을 지었다.”


대곡사에는 천년 세월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다.


봄이 내리쬐는 날, 사람들 발길이 드물었다. 마음이 한참 대곡사를 서성이자 사찰을 돌보고 있는 거사 한 명을 만났다. 주지 등목 스님은 초파일을 하루 앞둔 날에도 불교계 일로 출타 중이었다. 이날 밤, 돌아올 주지스님을 위해 군불 때는 방사에서 국화차 한 잔으로 서성이는 마음을 달랬다. 산신각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하자 “아직도 거기에 매달리느냐”며 따끔한 충고가 날아들었다. 국화차가 유난히 뜨거웠다.

 

 

▲화려한 단청이 없다. 세월에 빛을 잃은 게 아니었다. 나무들은 제 모습 그대로 범종을 품에 안았을 게다. 범종은 없어졌지만 자리를 지키고 섰다. 그 기다림에 종각 밑을 지나야 하는 신심은 대곡사 문턱 넘기가 조심스러워 절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인터넷은 지구촌을 하나로 묶었다. 강원이나 법당을 가지 않으면 듣지 못했던 큰스님들 법문도 쉽게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게 됐다. 발품 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손가락만 움직이고 법문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귀만 열면 됐다. 그러나 찾는 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스님들 마음속엔 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초발심이 똘똘 뭉쳐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겉모습만 보고 신심을 일으키는 몸의 눈으로 세상을 봐왔다. 아직 멀었다.


까만 밤하늘을 밝히는 별들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렇지만 밤하늘은 눈부시지 않다. 아직 그네들이 내보낸 빛이 우리 눈에 닿지 않아서다. 비가 오지 않아도 꽃은 지고 바람 불지 않아도 초목은 자란다. 태고적 진리다. 언젠가 빛은 닿으리라. 우리네 신심이 내뿜는 빛은 어디쯤일까.


대곡사 다층석탑이 홀로 외로이 섰다. 범종이 비운 자리를 응시한 채. 기다림이다.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풍경만 범종 대신 온몸으로 운다. 054)862-4222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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