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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지금, 티베트가 원하는 것 - 중

기자명 법보신문

달라이라마 노력에도 자치 번번이 실패

‘티베트는 중국 일부’ 주장에 
일국양제·자치 등 대응하며 
국제 사회 여론 조성에 주력

 

 

 

 

역사적 이유와 입장의 불일치 속에서 달라이라마<사진>와 중국정부는 오늘날까지 공생의 조건으로 몇 가지 중요한 타협안을 가지고 협상을 해오고 있는데 시기별 이슈와 쟁점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1978~1985):1978년 12월28일, 중국의 등소평(鄧小平, 1904~19 97)은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달라이라마에게 대화의 신호를 보낸다. “달라이라마는 언제든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공민의 신분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단지 하나만을 요구할 뿐이다. 바로 애국이다.” 이 신호탄을 계기로 양측은 1979년 3월12일에 정식으로 1차 협상을 가졌다. 당시 달라이라마가 파견한 대표단에게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근본적인 문제, 바로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분’임을 달라이라마가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와 무엇이든 협상할 수 있다.”


1981년 7월, 달라이라마의 개인특사 가락돈주(嘉樂敦株: 달라이 라마의 둘째 형)가 중국 북경에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이때 중국 정부는 당시 총서기 호요방(胡耀邦)을 담판의 적임자로 내보냈다. 당시 호요방은 ‘달라이라마를 대우하는 5조 방침’(達賴喇五條方針)에서 달라이라마의 귀국을 언제든 환영하며, 귀국 후 정기적으로 티베트 시찰은 가능하나 기본적으로 북경에 거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1959년 망명 전에 누렸던 특권을 똑같이 부여할 것이며, 당시와 마찬가지로 ‘전인대(全人代)’부위원장이나 ‘정협(中人民政治商)’부주석을 맡을 수 있다고 밝혔다. 당시 호요방의 요구 사항은 달라이라마의 귀국을 우선 촉구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1982년 4월, 달라이라마는 3인의 특사단을 중국 측에 다시 보냈다. 이때 특사단은 대만(臺灣)의 경우와 같이 티베트를 대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즉 ‘일국양제(一國兩制)’로 티베트를 인정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대만과 티베트는 서로 다른 역사적, 정치적 실체임을 강조하며 단호히 거부했다.


제2단계(1986~1992):1987년 9월21일, 미국 의회의 ‘티베트 인권 문제 수정안’(제1777호 의안) 통과에 발맞추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달라이라마는 중국 군대가 철수하고 티베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전제 하에 티베트의 정치적, 문화적 자율성을 보장해준다면 티베트는 그 대가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 즉 “티베트 5개 평화 계획”(五點和平計)을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티베트의 국민 모두를 평화지역(Ahimsa)으로 이주시킬 것, ②티베트 국민의 존재를 위협하는 중국의 이주 정책을 포기할 것, ③티베트 국민의 근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존중할 것, ④티베트의 자연환경을 복구시키고 보호하며, 핵무기를 생산하고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티베트를 이용하지 말 것, ⑤티베트의 국민과 중국 국민 사이의 관계에 관해 건설적인 협상을 시작할 것.


이러한 발언의 내용은 1988년 6월15일 유럽회의에서 행한 ‘스트라스부르 성명’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스트라스부르 성명’은 1981년 호요방 총서기의 ‘달라이라마를 대우하는 5조 방침’에 대한 화답의 형식으로, 달라이라마는 티베트를 홍콩과 대만과 같은 ‘일국양제의 정치적 연합’으로 해결해줄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였다. 서방 언론들은 이것을 달라이라마의 새로운 ‘중도노선(中間道路)’ 정책이라고 표현했다. 중국의 공세적인 압박 속에서 달라이라마가 고심 끝에 내놓은 방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989년에 달라이라마는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부터 달라이라마는 일약 국제적 명사가 되었으며 그의 언행은 무게감을 얻게 되었다. 정치적 행보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달라이라마는 이때부터 중국을 향해 강력한 협상을 제안한다. 만약 1년 안에 건설적인 담판의 테이블이 형성되지 않으면 1988년에 제안한 ‘스트라스부르 성명’을 취소하고 새로운 입장을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달라이라마의 존재감은 최고조에 이르며 연일 전 세계가 티베트에 관심을 표명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중국의 이붕(李鵬) 총리는 “티베트는 중국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이라며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독립의 입장을 바꾸어야 하며 티베트 독립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기타 어떤 문제라도 협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제3단계(1993~2008):달라이라마는 1992년과 1993년 연속적으로 북경에 화해의 특사단을 파견한다. 이때 특사단의 요구 사항은 티베트의 ‘진정한 자치’(正自治)였다. 이전까지는 제기되지 않았던 협상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협상은 티베트 구역 경계선의 인식의 차이에서 결렬됐다. 예를 들어, 달라이라마가 원하는 진정한 자치의 범위는 중국 서부 3구(청해·사천·감숙)를 아우르는 대장구(大藏區)의 개념이고 중국 정부는 티베트자치구만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협상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달라이라마는 또다시 국제 사회에 티베트의 열악한 상황과 미래를 홍보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을 압박하게 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 행보로써 1993년부터 1995년까지 3년 동안 달라이라마는 미국을 계속 방문한다. 1994년에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공시키고 티베트 문제의 국제화를 표면화시키는데 성공한다.


1997년 달라이라마는 돌연 대만을 방문한다. 아시아에서 대만의 방문은 일본과는 다른 의미를 함의한다. 양안의 한 축이 대만이고 중국이 대만의 독립을 민감하게 경계하고 있는 시점에서 달라이라마의 대만 방문은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공식적인 목적은 ‘종교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종교적 방문을 겸한 티베트 알리기 홍보라는 내재된 의도를 중국 정부는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달라이라마는 대만 정권의 수뇌부인 이등휘(李登輝) 총통과 국민당 주석인 연전(連戰)과의 만남을 성사시키며 국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 두고 중국 정부는 티베트 독립세력과 대만 독립세력과의 만남이라며 극도의 긴장감과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래서 일까? 당해 연도 11월에 중국 주석 강택민(江澤民)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티베트 문제에 관하여 불변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주장한다.


이후에도 양자는 티베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몇 번의 만남과 협상을 벌였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계속)


심혁주 한림대 연구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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