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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순헌황귀비 엄씨

망국의 위기 조선서 인재불사로 희망 불씨 심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 어머니
뛰어난 지혜와 인품으로
궁인서 황귀비까지 출세

 

아관파천 이끈 숨은 주역
“인재 불사가 나라의 미래”
진명·명신여학교 등 설립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895년(고종 32년) 10월. 조선의 국모가 시해됐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흉도들의 짓이었다. 이날 새벽 일본군과 경찰의 비호 아래 궁궐에 침입한 흉도들은 곧장 명성왕후의 침실을 습격했다. 조선 침략의 걸림돌인 명성왕후를 제거할 목적이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던 조선의 국모는 그렇게 일본의 칼 끝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당시 극에 달했던 일본의 횡포를 극명하게 드러낸 치욕적 사건인 동시에,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으로 일컬어진다.


아내를 잃은 고종은 두려움에 떨었다. 일본인 무뢰배들이 궁궐 한복판에서 왕비를 죽이는 상황에, 왕이 언제든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무엇보다 사람이 절실했다. 누구 하나 마음 놓고 의지할 곳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 죽은 명성왕후의 빈자리를 대신해 늘 곁에 머물며 왕의 안위를 보살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고종은 지난 세월을 더듬어 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 한때 승은을 입었으나 명성왕후의 질투로 궁 밖으로 쫏겨난 여인, 바로 엄 상궁이었다.


비록 박색에 일개 궁인의 신분이었지만 영민한 두뇌와 판단력, 그리고 후덕한 인품은 따를 자가 없었다. 못생긴 외모에도 왕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남다른 내면에서 비롯된 매력에 있었던 셈이다. 명성왕후 역시 이런 엄 상궁을 몹시 아꼈기에, 그녀가 남편 고종의 승은을 입자 더 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전해진다. 명성왕후는 그녀를 즉시 처단해 목숨을 거둘 것을 명했지만 고종의 만류 덕에 엄상궁은 목숨만은 부지한 채 궁 밖으로 쫓겨났었다.


고종의 다급한 부름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특히 명성왕후가 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장한 ‘과거의 여인’인 만큼 왕실의 환영을 받지 못했음은 당연지사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엄씨는 재입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정에 간여하며 뇌물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까지 했다.


“(왕이) 엄씨를 불러 입궁토록 했는데 변란이 있은 지 불과 5일밖에 지나지 않아서였다. 임금이 해도해도 너무하다고 서울 사람들이 모두 한탄했다. 엄씨는 외모는 물론, 권모와 지략이 민후(명성왕후)와 같았으며 곧 국정에도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다.”


현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엄상궁이 뇌물로 구설에 오르다니, 과연 어찌된 연유일까. 소문은 엄상궁이 인적이 드문 시간이면 가마를 타고 출궁하는데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왕실에 연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친가에 두고 간 뇌물들을 가지러 나간다”고 쑥덕댔고 ‘엄상궁 뇌물설’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들도 엄상궁의 출궁은 별 다른 검사 없이 통과시키기 일쑤였다. 출궁이 잦아질 수록 엄상궁이 쥐어주는 푼돈 모으는 재미가 쏠쏠한 터였다.


그러나 사실 엄상궁의 잦은 출궁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져만 갔으며, 특히 고종은 일본의 등쌀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조선을 지켜내기는커녕 일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꼴이 될 것이 자명했다. 영민한 엄상궁이 이런 고종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직접 뇌물을 수거하러 간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도 궁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초석을 미리 닦기 위함이었다. 엄상궁의 지략이 빛을 발할 순간이 곧 찾아왔다.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새벽. 살며시 궁궐 문이 열리고 가마가 나타났다. 가마에 타고 있던 궁인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건넸고, 일본 경찰들은 피식 웃으며 가마를 통과시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엄상궁의 출궁이었다.


그런데 이날 출궁에 일본 경찰들이 미처 눈치재지 못했던 또 다른 동행자가 있었으니, 바로 고종과 세자(숙종)였다. 왕을 태운 가마는 궁궐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내달렸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조선의 왕을 일본의 손아귀에서 안전하게 구출해 주권을 되찾기 위한 전략이었다.


엄상궁의 가마 속에 고종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된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이미 고종은 안전하게 러시아 공관에 도착, 모든 주도권은 러시아로 넘어간 후였다. 엄상궁의 치밀한 계획 하에 고종을 일본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려는 위험천만한 계획이 거짓말처럼 성공한 셈이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엄상궁은 고종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음은 물론, 친러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입지를 본격적으로 굳혀가기 시작했다.


고종의 총애는 나날이 깊어졌고 급기야 엄상궁은 마흔넷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들을 출산하기에 이른다. 이 아들이 훗날 영친왕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이다. 대한제국의 뒤를 이을 황자의 출산으로 엄상궁의 지위는 급속히 높아졌다. 이틀 만에 귀인으로 책봉, 한순간 정5품 지밀상궁에서 종1품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1900년에는 후궁 품계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순빈 칭호를 받으며 고종의 정식 후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일부 신하들은 명성왕후의 뒤를 이어 엄씨를 황후로 승봉할 것을 요청하는 등 그녀를 전격 지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정부 의정 윤용선 등이 올린 상소 기록이 전해진다.


“순빈 엄씨는 좋은 명성이 미치는 바 천성이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규범이 정숙할 뿐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높은 사람을 넘어서지 않고 새 사람으로서 오랜 사람 앞에 나서지 않아 얌전하고 겸손하다는 소문이 많으니 응당 신분을 높여야 한다.”


“참으로 한결같은 덕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번 나라가 위태로운 때 폐하를 돕고 황태자(순종)를 보호하느라 많은 수고를 했다. 제사를 받들때는 공경심을 한껏 다했으며 이미 폐하의 총애를 받아 황태자(영친왕)까지 낳음으로써 자손이 끝없이 번성할 경사를 열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같은 평가는 아관파천 이후 엄씨를 향한 왕실의 인식이 더없이 긍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엄씨는 이렇듯 왕과 신하들의 인정을 받으며 미천한 궁인에서 순빈으로, 다시 순비로, 또 황귀비로 신분이 승격되는 등 궁인 출신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죽은 명성왕후와 동급인 왕후의 신분엔 오르지 못했지만 고종이 죽는 날까지 또다른 왕후를 정하지 않았기에 엄씨는 사실상 조선의 국모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렸던 셈이다.


못생긴 외모와 천한 신분에도 그녀가 이토록 출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내면의 아름다움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아관파천을 성공시킨 지략과 담대함은 여느 왕실여성에게 찾아보기 힘든 남다른 면모임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엄씨는 조선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왕실재산을 희사해 교육 불사에 매진했다. 당시 조선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신식 학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는데, 엄씨는 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적극 수용, 민족 여성 교육의 장을 활짝 열었다.


1906년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 명신여학교 설립이 대표적이다. 엄씨는 진명여학교 설립을 위해 경선궁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와 임야 111만여평과 부천의 토지 77만평, 창선궁 터 1300여평 등을 기꺼이 보시했으며, 명신여학교 설립을 위해 명문가 부녀들로 구성된 후원회를 조직했다. 1907년에는 사재를 털어 경영난에 부딪힌 양정의숙을 구제하고 운영경비를 지급하는 등 다방면에 도움을 전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녀는 교육만이 조선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 확신했을 터다. 이런 교육을 향한 엄씨의 신념은 영친왕의 유모였던 최송설당에게도 영향을 미쳐, 김포고등학교 창립을 이끄는 기반이 된다.


최송설당과의 인연은 엄씨가 신심 깊은 불자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송설당은 영친왕이 태어난 순간부터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기 전 10여년간 유모로 살았다. 최송설당이 봉은사에서 기도를 하다가 엄씨의 동생과 맺은 친분으로 입궁했다는 기록은 두 여성의 인연이 불교에 기반하고 있음 보여준다.


한편 엄씨가 이미 오래전부터 최송설당을 알고 있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승은을 입고 궁에서 쫓겨나 부산의 한 사찰에 몸을 의탁했던 시기, 마찬가지로 사찰에 머물던 최송설당과 만나 도반의 인연을 맺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출궁 당시 엄씨의 정확한 행보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 왕실 체계상 엄씨가 동생의 추천만으로 외부인을 왕자의 유모로 삼아 궁에 들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에서 일면 설득력이 있다.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 의지했던 인간적 교류를 나눈 도반이라면, 다시 만난 순간 그에 따른 신뢰와 반가움 또한 남다른 측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엄씨는 평생 궁 밖 세상을 모르고 살다가 최송설당을 만나 비로소 불교에 깊이 매료됐던 것은 아닐까.


실제 엄씨는 이후에도 조선이 위태로울 때면 부처님의 위신력에 마음을 기댔다. 1900년 중반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개인재산을 보시해 경전을 간행하는가 하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수하는 등 각종 불사를 일으켰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 일말의 희망을 불교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엄씨는 개인적인 신앙도 남달라 아들을 낳기 전에는 북한산 무량사를 원찰로 삼아 약사여래불과 탱화를 봉안하고 100일기도를 올렸다고도 전해진다. 어찌보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그녀의 신심을 다한 기도 덕에 늦게 본 애틋한 자식인 셈이다. 때문인지 엄씨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아들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는 설도 전해진다. 공식사인은 장티푸스지만, 당시 신문보도에는 영친왕이 일본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다가 주먹밥을 먹는 사진을 본 충격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의 어머니이자 한낱 궁인에서 황귀비까지 파격적인 신분상승을 했던 여인 엄씨. 그녀는 못생기고 천한 신분의 후궁이었지만 이를 뛰어넘는 지혜와 담대함, 현숙함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비록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선의 마지막 순간, 인재불사를 통해 희망의 불씨를 당긴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그 삶의 여적은 적잖은 감동을 전한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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