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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명상길과 경교장

기자명 법보신문

며칠 전 마곡사에서는 신록축제가 펼쳐졌다. 그림 그리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겠지만 역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건 숲길 걷기였을 터. 친구, 연인, 가족 두서 너 명씩 작은 무리를 지어 미소를 머금으며 산길을 걷는 모습은 청량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지난 해 신록축제에 참여했던 당시 필자도 그러했다. 하지만 신록축제가 열리기 전인 4월 초 벗들과 함께 마곡사를 찾았을 때는 사념에 이끌려 그러지 못했다. 책 한권 때문이었다.


마곡사에 백범 명상길이 생긴 연유는 이제 상식에 속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 번 되짚어 보자. 청년 시절의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해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갇혔다가 탈옥한 뒤 찾아 온 곳이 마곡사였다. 백범 선생은 1898년 가을 ‘원종’이란 법명으로 출가해 이듬해 봄까지 마곡사에 머물렀다.


광복 후 다시 마곡사를 찾은 백범은 대적광전 기둥에 걸린 주련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광복 전후의 만감과 광복군의 일본본토 투입이 무산된 애석함까지 삭혀야 했던 백범이 느꼈을 ‘몽중사’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리고는 대적광전 옆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향나무 옆에는 백범 선생이 수행했던 백범당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가 즐겨 썼다는 서산 대사의 선시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내린 벌판을 밟아갈 때에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가는 내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친필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백범 명상길’은 여기서 시작한다.


백범 선생이 가슴 깊이 간직했던 글귀 하나가 또 있다.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이 기특할 것도 없고,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장부이다. (득수반지미족기 得樹攀枝未足奇 현애살수장부아 懸崖撒手丈夫兒)’ 이 글귀는 야부도천의 선시다. 뒷구는 이렇다. ‘물은 차고 밤도 싸늘하여 고기 찾기 어려우니 (수한야냉어난멱. 水寒夜冷魚難覓)/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유득공선재월귀. 留得空船載月歸)’ 백범은 윤봉길 의사를 보내기 전 ‘득수반지미족기 현애살수장부아’라는 뜻을 새겨줬다고 한다.


백범 명상길을 걸을 때마다 뇌리에 스친 건 하나였다. ‘백범 선생도 평소에 선시를 가슴에 두고 자신의 심안을 다듬었구나!’ 백범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던 필자는 선시가 주는 깊고도 당찬 힘에만 초점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안일함과 오만함을 책 한권이 순식간에 쓸어 버렸다. 인터넷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 해온 박도 기자가 3월에 내놓은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박 기자는 백범 암살자인 안두희를 쫓은 의인 네 명 즉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 김용희의 기나 긴 ‘안두희 추적 여정’을 상세하고도 적나라하게 펼쳐 보였다.


읽는 도중 쓰라림이 밀려왔다. 백범 사건을 ‘난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이어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백범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경교장을 가 보았는가? 이래서야 어찌 백범 김구 선생은 물론이고 안두희를 일생동안 쫓은 의인 네 명 앞에 고개라도 들 수 있겠는가!


백범 명상길을 걸으며 숙연해야 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필자의 심금을 울린 책이라 해서 당장 펼쳐 보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불자로서 마곡사를 찾아 백범 명상길을 걸었다면 꼭 한 번쯤 경교장을 찾아 백범 김구 암살에 배인 ‘진실’과 ‘비밀’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 권하고 싶다. 그래야 백범 김구 선생이 가슴에 담았던 선시가 확연히 들어오고, 백범 명상길이 가슴 깊게 담길 것이기 때문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사족이지만 이 책은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이다. 누군가 빌려 달라 한다면 일언지하에 거하고 ‘사 보시라’ 하겠다. 백범 김구가 쓰러진 6월도 그리 멀지 않았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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