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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주지 법만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사찰·지역 상생 인드라망 토대 위 선운사 대변혁 주도

생사문제 고민하다 선운사 출가
수행일로 걷다 사중 뜻에 소임


만세루 개방이 소통 첫 신호탄
지역주민-지자체 신망 두터워
뉴타운 내 불교회관도 건립 추진


스님 노후복지 수행마을 순항 중
선운사 연계해 미당문학관도 ‘빛’
명실상부 ‘석전 기념관’ 건립 희망

 

 

▲법만 스님

 

 

선운사 초입 길가.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 육필원고를 그대로 새긴 ‘미당 시비’가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선운산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4월말, 5월 초면 유독 선운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웅전 뒤편의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을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서둘러 갈 일은 아니다. 매표소 오른쪽 전나무 숲 부도밭에 백파 선사의 비가 서 있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웅혼한 힘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는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비문이다.


백파 긍선 스님과 추사 김정희는 한때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 바 있다. 백파 선사가 내놓은 ‘선문수경’에 대해 추사는 서신을 통해 조목조목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철부지 어린애와 떡 다툼 하는 것 같아서 도리어 창피하다’식의 오만방자함이 서려 있는 ‘백파망증 15조’다. 하지만 비문은 너무도 다르다. 백파 선사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한껏 담겨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건만 오직 백파만이 이에 해당함으로 율사라고 적노라. 대기대용은 백파가 80평생을 힘들여 일군 것이다 …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백파 비로써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


백파 선사는 마음의 청정함을 대기(大機), 마음의 광명을 대용(大用)이라 했다.


선운사 동백은 만개해 있었다. 벌써 아련한 낙화를 시작한 동백도 있다. 꽃잎을 먼저 떨어뜨릴 것도 없이 가지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은 채 꽃 자체로 온전히 뚝 떨어지는 동백꽃! 백척 절벽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가는 선기를 올곧이 담고 있는 꽃이 동백이지 싶다.
선운사 주지 법만 스님도 선기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2학기 등록금을 들고 정처 모를 길을 나섰다. 10대부터 때부터 일었던 의문,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풀기 위한 자신만의 몸부림이었을 터. 그의 의문은 이미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에 닿아 있었던 건 아닐까!


선운사에 닿았다. 초롱한 별빛이 경내에 내려앉자 소쩍새가 울음소리와 노스님들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심중으로부터 미묘한 작용이 일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의문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스쳐갔다. ‘딱 3개월만 지내보고 최종 결정하자’고 다짐했지만 출가 결심은 이미 단 하룻밤을 보내고 내려져 있었다. 일주일 만에 머리를 깎고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선방으로 향했다. 스님만의 각오가 있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한 발짝만 더 나아가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경전과 큰스님들의 법문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 법만 스님이 선운사에 초기불교불학승가대학원을 설립한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법만 스님이 지자체 관계자들과 수행마을 조경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법만 스님이 선운사 주지를 맡은 건 2007년. 최연소 주지가 당장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주변의 의구심도 샀지만 스님은 취임 6년 만에 선운사 대변혁을 일으켰다.


전북지역 최대 규모의 복지시설인 고창종합사회복지관 등 4개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물론 고창군 뉴타운 내 불교회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불교회관이 건립되는 뉴타운 내에는 어린이청소년을 비롯한 별도의 사회복지 시설도 들어서는데 이 또한 선운사가 맡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스님들의 노후복지 일환으로 조성되는 수행마을은 원만하게 진행중이며 벌써 찻집과 ‘백우당’ 등 몇 채의 요사채가 들어서 스님들이 살고 있다.


‘지역 대중과 함께’하겠다는 법만 스님은 의료서비스가 부족한 농촌 현실을 직시하며 동국대 병원과 결연을 맺어 고창 지역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다. ‘보은염(報恩鹽)’으로 유명한 선운사 인근 지역의 소금을 ‘선운사 브랜드’로 판매해 지역민들의 살림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또 선운사 옆에 흐르는 도솔천을 중심으로 옛길을 복원함은 물론 길을 따라 생태문화 공간까지 마련했다. 나아가 도솔천 안과 밖을 이어주는 아치형 석교도 복원해 출세간이 둘이 아니라는 메시지도 전했다.


분명, 선운사 옛 위상이 다시 서고 있다. 한 사람의 원력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법만 스님이다. 궁금했다. 선운사를 조계종 본사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만든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제가 일군 게 아닙니다. 전직 소임을 사셨던 스님들의 원력과 선운사 사부대중, 고창주민들의 힘입니다. 저는 계획만 세워 볼 뿐입니다.”


대중이 원하는 일이기에 추진할 수 있었다는 뜻이리라. 딱 하나, 스님 자신이 생각해도 참 잘했다는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고 한다. 만세루 개방이다. 창고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만세루에는 10여개의 찻상이 놓여 있다. 주민들과 참배객들이 앉아 언제든 차를 즐기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고창의 명소로 탈바꿈된 지 오래다.


“만세루는 부처님 진리가 오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옛적에는 강원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데 한 100년 전부터 창고로 쓰인 듯합니다. 선운사를 찾은 분들이 차 한 잔과 함께 사유하며 나눈 대화도 법담 아니겠습니까?”


경전 구절이나 선어록 정도는 나눠야 ‘법담’이라는 통념을 깨는 한마디다.


“세간의 희로애락이라 해도 그 또한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고 자신을 반추해 간다면 그 자체 또한 법담 아니겠습니까!”

 

 

▲ 법만 스님의 주도로 최근 완성된 선운사 아치형 석교.

 


만세루에 앉아 있는 동안이나마 잠시라도 가려져 있던 청정심이 일기를 바라는 스님의 소망이 깃들어 있음이다. 만세루의 법담이 끊이지 않는 한 부처님 법음과 광명 또한 끊어지지 않을 터이다.


주지 취임 이후 추진한 불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법만 스님은 ‘사중의 심부름꾼이 한 일이 뭐 그리 대수냐’며 손사래를 친다. 그보다는 정호 스님, 그러니까 ‘석전 박한영’ 스님 기념관 건립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살림 형편 닿는 대로 기념관 건립에 매진할 것이라며 기자 개인 인맥이라도 동원해 사진, 유품 등의 자료 수집 홍보에 힘을 보태 달라 한다.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에 담겨 있는 시 ‘추사와 백파와 석전’에 3인의 깊고도 기막힌 사연이 있다.


‘…추사 김정희가 만년의 어느 날 찾아들었습니다. 종이쪽지에 적어온 ‘돌이마’란 아호 하나를 백파에게 주면서 누구 주고 싶은 사람 있거든 주라 했습니다. 그러나 백파는 그의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 혼자 지니고 있다가 이승을 뜰 때 “이것은 추사가 내게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가 임자를 찾아서 주라”는 유언으로 감싸서 남겨놓았습니다. 그것이 이조가 끝나도록 절간 설합 속에서 묵어 오다가…박한영이라는 중을 만나 비로소 전했습니다…’


구암사에서 공부하던 정호 스님은 설유처명 스님으로부터 ‘석전’ 아호를 받았다. ‘훗날 법손 가운데 큰 도리를 깨쳐 나라의 기둥감이 될 재목이 나올 터이니 이 호를 전하라’는 추사의 부탁은 이때 이뤄졌다.


‘석전 박한영’이라고 알려진 정호(또는 영호)스님은 만해 용운 스님 등과 함께 이회광이 주도한 일본 조동종에 맞서 임제종 정통론을 내걸며 왜색불교 저지에 앞장선 대강백으로 1929년부터 1946년까지 조선불교 교정(종정)을 역임했다. 또한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만암, 청담, 운허, 남곡, 경보 스님을 비롯해 신석정, 서정주가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이며 정인보, 모윤숙,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도 석전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전 스님은 대석학이며 진정한 수행자이셨습니다. 단행본의 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편이 넘는 논술과 수필을 남기셨습니다. 한시만도 3천여수가 있습니다. 스님의 삶과 사상이 조명되어야 하는데 학술 접근은 고사하고 유품마저 먼지에 쌓이고 있습니다.”


조선불교 초대교정, 한국학(韓國學)의 태두로 추앙받은 석전 스님이지만 한반도 격동의 한파에 묻히고 있는 석전 스님을 그 누구보다 법만 스님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2009년 선운사에서 열린 '석전 영호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 세미나도 법만 스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 법만 스님이 고창군 뉴타운 내에 추진하고 있는 불교회관.

 


그러고보니 법만 스님은 미당시문학관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미당의 고향이 고창이기도 하지만 미당 또한 석전 스님 제자이니 선운사와는 각별한 인연이다. 더욱이 미당은 생전에 석전 스님을 두고 ‘나의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미당시문학관 독자적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선운사와 하나의 문화 벨트로 묶어야 미당시문학관도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선운사와 지역 문화 사이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무엇 하나라도 있으면 그 연결성을 더 굳건히 다지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선운사가 고찰이라 하지만 지역주민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홀로 남을 뿐입니다. 선운사와 고창이 함께 비전을 갖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비로소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라 봅니다.”


뉴타운 내 건립될 불교회관에 거는 기대도 남다르다. 포교와 불교문화저변 확대는 물론 귀농귀촌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겠다는 포부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운사가 소유하고 있는 농토와 차밭 등을 적극 활용하면 귀촌하려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활기반은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타당성 검토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단 몇 사람이라도 성공한다면 보람된 일 아니겠습니까?”


인드라망이다. 선운사를 중심으로 수행, 문화, 환경, 복지라는 키워드를 통해 선운사와 지역 각 단체와 주민들을 촘촘하게 연결해 서로 비춰가고 반조해가며 상생의 길을 확연하게 트고 있음이다. 선운사 지역주민과 탐방객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도 궁금한 게 남았다. 수행마을 하나도 쉽지 않을 터인데 뉴타운 내 불교회관 건립 불사금은 어떻게 마련하려는지 말이다. 스님은 단 한마디로 이러한 우려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투명하면 됩니다.”


사찰재정 투명성은 물론 자신이 걷고 있는 길 또한 여과 없이 진실 되게 보여주면 주변의 작은 뜻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뜻이리라. 청정을 바탕으로 한 ‘진실’이 우선임을 스님은 보여주고 있다.


10대 때 품은 의문이 해결됐을까? 파안미소를 보인 스님은 석전 스님의 일갈을 전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다.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동백의 자태를 엿본 도솔천 물도 청아한 소리를 자아내고 있다. 법만 스님의 진실함이 스며있는 한 선운사 위상은 날로 드높아질 게 분명하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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