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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잔타·엘로라석굴 [끝]

기자명 법보신문

단단한 바위산 도량에 흐르는 견고한 신심·상생의 가르침

기원전 2세기부터 조성된
절벽 사원 아잔타석굴은
고대 교역로 따라 꽃핀
인도 석굴 예술의 기원


바위산 둘러싸인 엘로라엔
불교·힌두·자이나 공존
선의의 석굴 경쟁 펼치며
찬란한 예술작품으로 탄생

 

 

▲ 아잔타석굴군. 기원전 200여년부터 시작된 석굴 조성은 7세기 중반까지 계속됐다. 고대 교역로였던 와고라강가의 수직으로 솟은 절벽에 위치한 아잔타석굴은 1200여 개에 달하는 인도의 석굴 사원 중에서도 단연 백미로 손꼽힌다.

 


해가 기울고 있다. 길어야 한 시간 남짓이면 해가 질것이다. 서산에 내려앉으려는 해를 묶어둘 수 없으니 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매표소 입구에 내리자마자 달음박질치듯 내달려 셔틀버스로 갈아탄다. 매표소에서 계곡 입구까지 일행을 실어 나를 버스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싣고 힘겹게 산언덕을 오른다.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는 주인공은 아잔타석굴이다.


십 수 년 전 처음 인도를 여행하던 시절, 아잔타 석굴 입구까지 지프차를 대여해 타고 들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유독 눈이 커다란 인도인 운전사가 동행했다. 한낮이었지만 검은 배기가스를 쿨럭쿨럭 토해내는 차가 인적 드문 계곡으로 한 없이 들어가자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 대학 동기생들이던 우리 일행 여섯 명은 서로 눈짓을 보내며 만약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응할까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고 우리가 석굴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까지 차에서 무료하게 반나절을 보낸 기사는 과일을 사고 싶어 하는 일행을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싸게 살 수 있는 시장 입구에 내려주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날 밤 우리는 과일 파티를 벌이며 아잔타석굴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만 아무도 운전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순박한 친절함을 의심했던 각자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질녘이어서 그런지 흔들리는 셔틀버스 안에서 잠깐 동안 옛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 바뀌었다. 어디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었던 매표소 주변에는 상가들이 꽉 들어찼고 차량은 일체 계곡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됐다. 대기오염으로부터 세계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다만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계곡 입구에서부터 석굴 앞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정도다. 해가 서산에 거의 다다를 때 즈음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 비로소 석굴 입구에 도착했다.


아잔타석굴은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서 북서쪽으로 약105km 가량 떨어져 있는 와고라강가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 면에 자리하고 있다. 석굴 조성은 기원전 200여년 경부터 시작돼 서기650년까지 계속됐다. 석굴 조성 열기가 수그러들었던 적도 있고 잠시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아잔타의 29개 석굴에는 각 시기의 특징과 변화상 등 인도의 석굴 조성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잔타석굴이 위치하고 있는 와고라강 계곡은 북쪽의 잘가온과 남쪽의 아우랑가바드를 이어주는 교역로였다. 말발굽 모양으로 굽어 흐르는 강을 따라 오가던 고대의 상인들, 그들을 따라 흘러들어온 풍요로운 물산들이 이곳 석굴조성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석굴은 규모도 웅장하지만 섬세한 조각과 벽화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한때 이곳에는 수행자와 석굴 조성 장인 등 200여 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7세기 중반 아우랑가바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엘로라에 석굴 조성이 집중되면서 아잔타는 더 이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인도 불교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아잔타석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고 그렇게 1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석굴은 인적 끊긴 계곡에서 울창하게 자라난 수풀에 묻혀버렸다. 아잔타석굴이 다시 발견된 것은 1819년 호랑이를 사냥하던 영국군 존 스미스에 의해서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덕분에 석굴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편이었지만 세월의 무게에 훼손되고 발견 이후에는 도굴꾼들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1200여 개에 달하는 인도 석굴 중 아잔타석굴은 단연 백미로 손꼽힌다.


석굴은 계곡을 따라 입구의 1번 굴부터 28번 굴까지 줄지어 조성돼 있고 마지막 29번 굴은 조금 더 위쪽 절벽에 있다. 석굴의 용도는 스님들의 거처인 승방용 비하르와 예불 공간인 차이티야로 구분된다. 9번, 10번, 19번, 26번, 29번 석굴이 차이티야고 나머지는 비하르다.

 

 

▲ 엘로라 10번 석굴. ‘목수의 동굴’로도 불리는 이 석굴의 기둥과 서까래, 대들보 등은 마치 목조건축물과 같은 형태로 조각되었다. 12개의 불교석굴 가운데 유일한 예배용 차이티야 석굴이다.

 


아잔타석굴의 시작인 1번 굴은 가장 아름답게 장식돼 있는 석굴이다. 특히 벽화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상 벽화는 매우 유명하다. 벽화에 쓰인 안료는 이 지역 광물에서 추출한 석채지만 파란색만큼은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청금석이 사용되고 있다. 이곳이 고대의 교역로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아잔타에서 가장 큰 석굴은 4번 석굴이다. 28개의 돌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이 석굴은 미완성이지만 웅장한 기둥과 벽면에 조성돼 있는 보살상, 제자상들이 인상적이다. 9번 석굴은 차이타야 가운데서도 가장 초기에 조성됐다. 석굴 양쪽에 일렬로 서있는 석주는 안쪽까지 쭉 이어져 중앙에 조성돼 있는 불탑을 에워싸는 형태다.


어느 석굴 하나 예사로 보아 넘길 것이 없다. 29개의 석굴 모두를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석굴 개방시간은 오후 5시30분까지다. 계곡이 깊어 해도 일찍 저무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아잔타석굴은 수많은 출가 수행자들과 그들을 후원했던 상인 등 재가불자들의 합작품이다. 수백 년 세월 이 곳에서 수행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승가와 그들에게 귀의했던 재가불자들의 역사가 세월을 넘어 흐르고 있다.


이 계곡에 꽃피웠던 인도불교의 찬란한 시절은 엘로라석굴로 이어져 마지막 불꽃처럼 타오른다. 하루를 꼬박 보내도 부족한 아잔타를 뒤로하고 돌아서 엘로라로 발길을 옮긴다.

 

 

▲ 아잔타 4번 석굴 벽면의 부조 보살상(왼쪽). 4번 석굴 중앙에 봉안돼 있는 좌불상.(가운데)
엘로라 10번 석굴 중앙의 불보살상(오른쪽).

 


엘로라석굴 순례는 이른 아침 시작된다. 아직 관광객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 아침 안개가 남아있는 엘로라석굴은 신비로운 신화의 한 복판 같다.


엘로라에는 모두 34개의 석굴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자이나교가 각각의 흥성 시기에 따라 차례로 조성돼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엘로라에 가장 먼저 석굴을 조성한 종교는 불교였다. 아잔타의 석굴 조성이 쇠퇴기에 접어들던 7~8세기 엘로라에는 12개의 불교 석굴이 조성됐다. 비슷한 시기 힌두교가 그 옆에 경쟁적으로 석굴을 조성했다. 힌두교 석굴 조성은 10세기까지 계속됐다. 현재의 13~29번 굴이 힌두교 석굴이다. 자이나교도 8~10세기에 이곳에 다섯 개의 석굴을 남겼다. 각각의 종교들은 서로 경쟁하듯 더 크고 화려한 석굴을 만들었다. 그래서 엘로라의 석굴들은 아잔타의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다른 종교에 비해 먼저 조성되기 시작한 불교 석굴도 초기의 것이 소박한 모습인데 비해 후대로 갈수록 더 규모가 크고 화려해진다. 간혹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은 장식이나 기법 등이 불교석굴에 사용되기도 했다. 서로 이웃 종교의 영향을 받았음이다.


12개의 불교 석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석굴은 10번이다. 불교 석굴 가운데 유일한 차이티야 석굴이며 인도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차이티야 석굴로 평가되고 있다. 석굴 입구의 기둥과 석굴 내부의 반원형 천장은 마치 목재를 이용해 지은 집처럼 대들보와 서까래 형태로 조각돼 있어 ‘목수의 동굴’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중앙에 모셔져 있는 불탑과 부처님의 법신에 부드럽게 드리워져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1번 석굴은 2층, 12번 석굴은 3층인데 모두 바위를 파고 들어가 조성했으나 바닥과 천장이 마치 회반죽을 바른 듯 매끄럽게 마무리 돼 있다. 석굴 조성에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어갔으며 장인들의 솜씨 또한 얼마나 놀라웠는지. 특히 12번 석굴은 승방인 비하라와 예불당인 차이티야의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 인도 불교 성지순례를 함께한 스님과 재가불자들.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 함께한 이들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대신한다.

 


불교 석굴군이 끝나면 곧바로 힌두교 석굴들이 이어진다. 불교와 힌두교가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모여 있다. 힌두교 석굴은 불교에 비해 훨씬 더 화려하고 역동적이다. 종교의 특색이 석굴 조성에도 반영돼 있음이다. 또한 불교 석굴들이 입구에서부터 석굴 안쪽으로 돌을 파고 들어가며 수평적으로 조성된데 비해 힌두교 석굴을 바위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고 내려오며 조성됐다는 점도 다르다. 특히 16번 석굴은 힌두교의 주신인 시바신이 산다는 카일라스산을 형상화 한 것으로 그 규모나 풍부한 조각의 양, 정교한 표현 등에 있어 건축사에 남을 만한 놀라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엘로라석굴은 이처럼 여러 종교가 갈등하고 대립하기 보다는 평화롭게 공존하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쳐 이룩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후대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하나의 종교가 주도권을 잡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주도적 종교나 여타의 종교를 핍박하고 파괴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새로 유입된 종교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이전 종교의 유물이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곤 했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우리들 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실크로드 주변의 수많은 불교 석굴들이 이슬람교의 유입으로 파괴당했고 불과 수 년 전에는 바미안의 대불이 이교도에 의해 파괴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엘로라에서는 40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가 서로 이웃한 채 공존했다. 때로는 그것이 경쟁이 되기도 했지만 이웃 종교를 핍박하고 파괴함으로써 자기 종교의 위상을 더 높이려는 폭력적인 행위는 적어도 없었던 것이다.


캘커타에서 시작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온 순례를 마무리하며 평화로운 공존의 역사를 바라보는 감회는 그래서 더 새롭다. 여러 종교가 치열하게 경쟁을 펼쳤던 인도,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철학과 종교의 꽃을 피웠던 시기에 부처님께서 나투셨다는 것은 평화로운 공존, 상생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비록 엘로라의 불교석굴을 끝으로 인도불교는 쇠락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 인도 땅에서 주목받는 종교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 가르침이 이제 세계일화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의 희망의 빛임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순례의 길을 함께 한 도반들, 미래의 희망을 말해주는 부처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연재를 마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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