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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에 거칠고 미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기자명 법보신문

임제 스님의 분별하는 질문에
밥상 걷어 차 버린 보화 스님
선에는 확고부동한 정답 없어
자유자재한 선의 핵심 보여줘


늘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은
과거·미래 연연하지 말고
오늘 현재 충실히 살라는 뜻
매 순간 스스로가 주인 되면
걱정없는 걱정하는 어리석음
눈 밝은 선사에겐 결코 없어

 

 

▲육조 혜능 스님이 30여 년간 주석하며 법을 펼친 중국 남화선사의 스님들.

 

 

師見普化하고 乃云, 我在南方하야 馳書到潙山時에 知儞先在此住하야 待我來하니라 乃我來하야 得汝佐贊이라 我今에 欲建立黃檗宗旨하노니 汝切須爲我成褫하라 普化珍重下去하다 克符後至어늘 師亦如是道하니 符亦珍重下去하니라 三日後에 普化却上問訊云, 和尙이 前日에 道甚麽오 師拈棒便打下하다 又三日에 克符亦上하야 問訊乃問호되 和尙이 前日打普化하니 作什麽오 師亦拈棒打下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보화 스님에게 말했다. “내가 남방에 있으면서 황벽 스님의 편지를 전하려고 위산에 도착했을 때 그대가 먼저 이곳에 와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앙산 스님의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그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내가 황벽 스님의 종지를 세우고자 합니다.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 그러자 보화 스님이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뒤에 극부 스님이 오자 임제 스님은 보화 스님에게 한 말을 똑같이 했다. 극부 스님 역시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삼일 후에 보화 스님이 다시 올라와서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스님이 일전에 뭐라고 하셨지요.” 그러자 임제 스님은 주장자를 들고 바로 내리쳤다. 삼일 후에 극부 스님이 올라와서 인사를 하고 물었다. “스님은 앞날 보화 스님을 주장자로 내리쳤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임제 스님이 역시 주장자로 내리쳤다.

 

강의) 유명한 보화 스님이 등장합니다. 보화 스님은 반산보적(盤山寶積) 스님의 제자로 따로 전기는 전하지 않고 다만 임제 스님 관련 기록에만 등장하는 스님입니다. 임제록의 기록에 보면 보화 스님의 선은 활달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임제 스님의 활달함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임제록이나 임제 스님과 관련된 기록에만 유독 보화 스님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임제 스님의 인정이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위 내용을 보면 임제 스님이 대중을 교화하는데도 적지 않게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지금 보듯이 보화 스님의 등장 장면이 벌써 예사롭지 않습니다.

 

師一日에 同普化하야 赴施主家齋次에 師問, 毛呑巨海하고 芥納須彌하니 爲是神通妙用가 本體如然가 普化踏倒飯牀한대 師云, 太麤生이로다 普化云, 這裏에 是什麽所在관대 說麤說細오
師來日에 又同普化赴齋하야 問, 今日供養은 何似昨日고 普化依前踏倒飯牀한대 師云, 得卽得이나 太麤生이로다 普化云, 瞎漢아 佛法說什麽麤細오 師乃吐舌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하루는 보화 스님과 함께 어느 신도의 점심공양에 참석했다가 보화 스님에게 물었다. “작은 터럭 하나가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 한 알에 수미산을 다 담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신통묘용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근본당체가 그러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자 보화 스님이 발로 차 밥상을 엎어버렸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너무 거칠지 않습니까.” 그러자 보화 스님이 말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데 거칠다 미세하다 이런 소리를 하는가?” 임제 스님이 다음날 또 보화 스님과 함께 신도의 집에 공양을 하러 가서 물었다. “오늘 공양은 앞의 것과 비교해서 어떠합니까?” 보화 스님이 전과 마찬가지로 밥상을 발로 차 엎어버렸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기는 하지만 너무 거칠지 않습니까.” 그러자 보화 스님이 말했다. “눈먼 사람이로고! 불법에 대해 무슨 거칠고 미세한 게 있겠는가?” 이에 임제 스님이 혀를 내둘렀다.

 

강의)  여기서 말하는 재(齋)는 공양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탄거해(毛呑巨海) 개납수미(芥納須彌). “작은 터럭 하나가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 한 알이 수미산을 다 담는다”는 이 말은 유마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마 재가자의 공양을 받은 김에 재가법사인 유마거사의 고사를 인용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머리카락 한 올처럼 작은 것 같지만 크기로 말하자면 허공을 담고도 남습니다. 깨달음의 경지 또한 이렇습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은 이런 경지가 수행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는 것인지,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인지 묻습니다. 임제 스님이 살짝 떠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화 스님의 대답은 거칠기 그지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밥상을 엎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임제 스님이 거칠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질문에 대한 답이 떨어집니다. 이곳이 어떤 곳인데 거칠고 미세함이 있겠는가. 불법에 무슨 거칠고 미세함이 있느냐는 힐난입니다. 임제 스님이 다시 떠봤지만 보화 스님의 경지는 여전히 확고합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분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임제 스님이 혀를 내두를 밖에 없었을 겁니다. 감탄이 절로 나왔겠지요.

 

師一日에 與河陽과 木塔長老로 同在僧堂地爐內坐하야 因說普化每日에 在街市하야 掣風掣顚하니 知他是凡가 是聖가 言猶未了에 普化入來어늘 師便問, 汝는 是凡가 是聖가 普化云, 汝且道하라 我是凡是聖가 師便喝하니 普化以手指云, 河陽은 新婦子요 木塔은 老婆禪이요 臨濟는 小厮兒라 却具一隻眼이로다 師云, 這賊아 普化云, 賊賊하고 便出去하다 一日은 普化在僧當前하야 喫生菜어늘 師見云, 大似一頭驢로다 普化便作驢鳴한대 師云, 這賊아 普化云 賊賊하고 便出去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하루는 하양 장로와 목탑 장로와 함께 승당의 화로 옆에 앉아있었다. 그때에 “보화 스님이 매일 길거리에서 미친 짓을 하고 다닌다는데 도대체 그가 범부일까 성인일까?”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화 스님이 들어왔다. 임제 스님이 보화 스님에게 바로 물었다. “그대는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보화 스님이 도리어 임제 스님에게 질문했다. “그대가 먼저 말씀해 보시오. 내가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임제 스님이 “할”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보화 스님이 손으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하양은 새색시이고, 목탑은 노파선이다. 임제는 어린애 같은데 한 개의 눈을 갖추었다.”라고 말했다. 임제 스님이 “이 도둑놈아!”하자 보화 스님이 “도둑놈아, 도둑놈아”하며 나가 버렸다. 어느 날 보화 스님이 승당 앞에서 채소를 먹고 있었다. 임제 스님이 이를 보고 말했다. “한 마리의 당나귀 같구나.” 그러자 보화 스님이 곧바로 당나귀 울음소리를 냈다. 임제 스님이 “야 이 도둑놈아!”하자 보화 스님이 “도둑놈아, 도둑놈아”하면서 나가버렸다.

 

강의) 하양 장로와 목탑 장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임제 스님보다는 나이가 많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들 스님들에 대한 보화 스님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하양 스님은 조신한 새색시고 목탑 스님은 말 많은 할머니와 같다. 그런데 임제 스님은 이들 중 제일 어리지만 지혜의 눈을 갖고 있다. 여기서 일척안(一隻眼)은 제3의 눈, 혹은 지혜의 눈을 말합니다. 안목을 갖췄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보화 스님을 향해 도둑놈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질세라 보화 스님도 도둑놈이라며 맞장구를 칩니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겠지요. 깨달음을 부처님의 심안을 훔쳤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서로 최상의 칭찬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因普化가 常於街市搖鈴云, 明頭來明頭打하고 暗頭來暗頭打하며 四方八面來旋風打하고 虛空來連架打하노라 師令侍者로 去하야 纔見如是道하고 便把住云, 總不與麽來時如何오 普化托開云, 來日에 大悲院裏有齋니라 侍者回擧似師한대 師云, 我從來로 疑著這漢이로다

 

해석) 보화 스님은 항상 길거리에서 요령을 흔들며 말했다. “밝은 것으로 오면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둔 것이 오면 어둔 것으로 치고, 사방팔면으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치고, 허공으로 오면 도리깨질로 잇따라 친다.” 임제 스님이 시자를 보내며 보화 스님이 그렇게 말하면 “바로 멱살을 움켜잡고 아무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묻게 했다. 시자가 그렇게 하자 보화 스님이 시자를 밀쳐 버리며 말했다. “내일 대비원에서 밥을 먹을 것이다.” 시자가 돌아와 말씀드리니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내 일찍이 그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강의)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한 것이 바로 선입니다. 보화 스님의 말씀은 그런 선의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에는 확고부동한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은 단 한번뿐입니다. 그러니 정해진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의 선은 임제 스님의 선이 돼야 하고, 조주 스님의 선은 조주 스님의 선이 돼야 합니다. 보화 스님의 선 또한 보화 스님의 선이 돼야겠지요. 수처작주(隨處作主 )해야 합니다. 매 순간, 매 경계에서 스스로 주인이 돼야합니다. 흉내를 내서는 안 됩니다. 보화 스님의 말은 그런 뜻입니다. 쳐버린다는 말은 경계를 맞아도 경계에 반연하지 않고 그 경계 그대로 쳐내버린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오면 부처가 돼 쳐내고 범부가 오면 범부가 돼 쳐내는 것입니다. 임제 스님께서 당나귀 같다고 하자, 보화 스님은 지체 없이 바로 당나귀 울음소리를 냈습니다. 존재 그 자체로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이 시자를 보내 또 살짝 떠봅니다. “아무것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에 대해 보화 스님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내일 대비원에서 밥을 먹을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속담에 사서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화 스님의 말씀은 이 속담과 맥락이 닿아있습니다. 순간에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에,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현재가 없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애써 걱정하거나 걱정이 없는 것을 걱정하는 비극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화 스님에게는 더 이상 이런 번뇌가 있을 수 없겠지요. 임제 스님이 파논 함정에 전혀 걸려들지 않습니다. 내일 대비원에서 밥을 먹을 것이라는 것은 나는 그런 것 이미 다 털어버렸어 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임제 스님도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고 있었겠지요.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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