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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지의 중요성

기자명 법보신문

시대의 지문 담긴 타임캡슐…문화원형 파악의 단초

전국 5400여개소 알려져
문화재 등록 사지는 3%
80%가 주거 등으로 훼손
“단순히 폐허로만 여겨”

 

 

 

▲미면사는 12세기 말 정통 스님에 의해 백련결사가 진행된 곳이다. 현재 미면사지는 폐경지로 방치되고 있으며, 조경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지 내 석재들이 반출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2010년부터 문화재청과 함께 전국의 사지 현황에 대한 일제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매해 해당 지역의 조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지금까지 종합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부작용이 매우 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과거 조사 및 지정을 통해 문화재로 등록된 사지는 전체 사지의 3%가 되지 못하며, 그나마 문화재로 지정된 동산문화재와 관련된 사지를 포함해야 전체 사지의 10% 정도에 해당될 뿐 나머지 사지는 문화재 관리체계 범주에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또한 사지가 위치한 곳 토지의 70% 이상은 이미 개인 소유가 되어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특히 경작, 묘역, 주거, 축사시설 등이 들어섬에 따라 문화유산이 훼손되고 있는 경우도 80%에 가깝다.


문화재 관리체계 범주에 벗어나 있는 비지정 사지의 훼손 사례는 상상을 초월한다. 논이나 밭 등의 경작지로 이용되는 경우는 양반에 속한다. 골프장, 아파트, 도로, 학교 등이 원 지형을 파괴한 후 조성된 사례도 있으며, 묘 상석이나 석축을 사지와 관련된 석탑, 석등 부재를 이용하여 짓기도 한다. 또한 마을 내 정자나 재사건물의 초석에 옥개석이나 탑신석이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마을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석불이나 석탑은 어느 날 밤에 도둑맞기도 하고, 전혀 상관없는 식당이나 가옥의 정원에 옮겨지기도 한다.


지정된 문화재가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나 사지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역시 훼손 상황이 심각하다. 지정 석탑이나 불상 주변은 펜스를 두르고 잔디를 심는 등 정비되어 있지만 원래 석탑 앞에 우뚝 서있어 불상을 봉안했어야할 불전이 있을만한 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거나 축사가 들어서 있다. 불전이나 법당, 요사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잘 치석된 초석부재는 밭 주변에 뒹굴고 있거나 이미 고물상에 팔아버리기도 한다.


왜 사지는 이렇게 홀대당하고 있을까? 아직 사지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사지에는 눈에 보이는 문화재가 아주 적기 때문에 사지를 단순한 폐허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지(寺址)란 법등이 끊긴 사찰의 유허지(遺虛址)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적 신앙행위가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중지됨에 따라 그와 관련된 건조물이 없어지고, 이후 흔적만 남게 되는 시간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불교를 제외하고 한국의 역사에 대해 논하기는 매우 어렵다. 최초 불교를 도입할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문화, 사회, 경제, 군사 어느 하나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정치적으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유용한 사상이 되었고, 외교정책 전반에 걸쳐서도 직·간접적 영향을 주거나 활용수단이 되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도 설화, 민요 등 구비문학의 원류는 불교였다. 또한 불교와 관련된 문화유산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문화에서 불교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모두와 관련이 있으며, 심지어 고급문화에서 저급문화까지 전반적으로 분포한다.


현재 930여 곳이 전통사찰로 등록되어 있는 것에 비해 사지는 전국적으로 약 5,400여개소가 알려져 있다. 사지가 전통사찰보다 약 5배정도 많지만, 이것도 학계에 알려진 것일 뿐 불교문화재연구소의 현황조사사업이 완료되면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사지의 숫자가 사찰에 비해 너무나 많은 이유는 빈번했던 외침과 전란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찰이 없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찰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을 경우 끊임없는 이질적 문화와의 접변에 따른 문화변동이 생길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유허지로 남게 됨에 따라 당대(當代)의 코드를 간직할 수 있어 문화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사지의 대명사로 알려진 경주 황룡사지는 신라삼보新羅三寶 중 천사옥대를 제외한 장륙상과 구층탑 두 보물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의 기술로도 복원이 어려운 목탑지와 현재 남아있는 어느 목조건축물보다 규모가 컸던 것으로 짐작되는 금당, 강당지 등이 남아 있다. 익산 미륵사지에는 2009년 서탑 사리장엄구가 출토됨에 따라 서동요에 대한 역사적 검토 및 당대 기술력 확인이 가능했다. 부여 능산리사지의 백제금동대향로 사례도 있다.


사지는 부동산문화재이기도 하면서 다수의 동산문화재가 있는 복합적 노천박물관이다. 국가 혹은 지방지정 문화재 중 과반수가 불교문화재이며, 그 중 석조물과 조각은 사지와 관련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일례로 국보로 지정된 불교문화재 중 석조물의 약 66%가 사지와 관련되어 있다. 수량뿐만 아니라 조성시기 역시 고려 이전에 제작된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전체 문화사적 궤도를 맞추는 근거가 된다. 이는 불교적 특성, 더 나아가 한국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사지가 얼마나 중요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군위 인각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개 이상의 별원(別院)으로 구성되었던 대규모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국가경영 차원의 중요한 교육, 문화,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지조사는 유허지로 남아 있는 사지에 대한 종합적 조사를 일컫는 것으로 관련 문헌조사를 시작으로 지표조사, 발굴조사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지는 남한에만 5,400여개소가 있음이 기존 문헌조사 결과를 통해 알려져 있으나 그들의 현황이 어떠한지, 어떤 역사적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체계화한 조사 사례는 없다.
사지현황조사는 우선 이러한 사지의 현황을 지표조사의 방법으로 진행한다. 조사 중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사지가 확인된 경우 주요사지로 별도 분류하여 심화조사 및 문화재 관리체계에 편입될 수 있는 기본자료를 구축한다. 또한 사지 전체에 대한 현황 분석을 통해 향후 사지에 대한 보존관리 및 활용을 위한 기본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2012년 조사에서는 경북문경의 미면사지등 14개 사지가 주요사지로 선정되었다. 고려시대 불교사에 있어 수선결사와 더불어 큰 의미를 두고 있는 백련결사의 주체로 알려진 전남 강진의 백련사 외 또 다른 백련결사가 진행된 곳이 미면사지(米麵寺址)이다. 미면사는 고려 말기의 승려 천책(天)의 시문집 ‘호산록(湖山錄)’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라는 기록을 통해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던 통일신라 직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12세기 말에 정통(精通)이라는 스님에 의해 백련결사가 진행되었다. 고려후기 이색의 시를 포함해 조선시대 지리지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처음에는 백련사라는 사명이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 미면사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하였고, 조선후기에는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사지현황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현황이 파악되기도 하였다. 현재 사지는 폐경지로 방치되고 있으며, 조경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지 내 석재들이 반출되고 있다. 이규보가 지은 ‘우기제백련사석대(又寄題白蓮社石臺)’라는 율시에 기록된 석대(石臺)로 추정되는 적석탑이 아직 사지에 남아 있으며, 석조광배와 석탑재, 승탑재 등이 문경새재 옛길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사지현황조사를 통해 주요사지로 분류된 곳은 발굴조사가 실시된다. 발굴조사는 지표 아래의 매장유구를 제토과정을 통해 밝혀내는 것으로 문화층으로 일컫는 토층 상황에 따라 초창과 중창, 중수에 대한 순서와 과정을 파악할 수 있어 현존하는 전통사찰과 달리 하나의 사찰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유기적으로 변화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분에 따라 주거지의 형식을 규제했던 기록이 남아있는데 사찰은 과거에도 특별한 건축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궁궐과 함께 고급건축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일본의 사례이긴 하지만 6세기 당시 사찰은 지붕에 기와를 얹었지만 궁궐에는 계획만 되었지 실행되지 못할 정도였으니 사찰건축의 격식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지는 지하에 이러한 높은 격식의 건축유구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를 통해 배치계획 및 평면형식이 확인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연구성과에 따라 입면도 복원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찰건축보다 더 폭 넓은 사찰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발굴조사를 통한 사찰건축이라는 하드웨어에 대한 파악은 더 나아가 의례, 생활패턴 등의 소프트웨어에 대한 공간적 파악을 위한 연구도 가능하기 때문에 문헌에만 기댈 수밖에 없어 단편적일 수 있는 문화 및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역사성이 보다 확대된 곳으로 군위 인각사지가 있다. 인각사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스님이 입적하신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연 스님을 위해 조성된 보각국사비와 보각국사정조지탑이 남아 있어 불교사, 미술사적 의의가 매우 깊은 곳이다. 지금은 작은 사찰이 남아 있어 황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일연 스님이 주석할 당시 사찰의 규모가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차발굴을 통해 대규모의 가람배치가 추가적으로 확인되어 과거 사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다수의 건물이 밀집되어 있었으며, 그 앞으로 회랑시설이 중첩되어 있어 흡사 양주 회암사지나 춘천 청평사와 같은 형태의 사찰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보다 앞선 시기는 최소 3개 이상의 별원(別院)으로 구성되었던 대규모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청동일괄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인각사가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국가경영 차원의 중요한 교육, 문화,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임석규 실장

사지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우리는 발굴조사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죽은듯하지만 살아있고, 서있는듯하지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지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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