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바우덕이
29. 바우덕이
  • 송지희 기자
  • 승인 2013.06.1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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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기예로 사찰 불사 적극 도운 대중문화의 아이콘

전국 유일 여성 줄타기광대
출중한 끼와 미모로 유명세
남사당패 우두머리 추대도


청룡사 근거지로 전국 유랑
조선 왕실, 정3품 벼슬 하사
불교와의 인연 평생 이어져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일순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소란스레 장내를 들썩이던 징과 꽹과리 소리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신명에 들떠 어깨춤 추던 이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찬물 끼얹은 듯 고요해진 장내엔 미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허공을 가로지른 동아줄 하나에 가닿았다. 까마득한 높이의 허공에 팽팽히 당겨진 줄은 살랑대며 지나는 미풍에도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객석은 그 미세한 흔들림에도 숨을 죽였다.


줄의 양쪽 기둥에는 술과 떡, 과일 몇 가지 올린 간단한 고사상이 차려졌다. 장정 대여섯이 넙죽 절을 하더니 줄 아래 여기저기 고사 술을 흩뿌린다. 놀이판에는 다소 생뚱맞은 분위기다. 하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묘한 설렘과 흥분마저 서렸다. 이 고사판은 바로 메인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놀이판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어름줄타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하물며 흔한 사당패의 그저 그런 줄타기도 아니다. 안성 남사당패의 흥행보증수표이자, 전국에서 소문이 자자한 ‘바우덕이의 줄타기’다. 그 유명한 바우덕이(1848~1870)의 재주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바쁜 농번기에도 온 마을 주민들이 일손을 놓고 한달음에 놀이판으로 달려와 줄 하나에 이토록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얼쑤!”


갑작스레 날아든 걸쭉한 추임새에 장내가 들썩였다. 징과 꽹과리 소리가 부산스레 찾아들더니, 장구채도 한껏 치달리기 시작한다. 신명나는 풍물소리는 금세 흥을 돋웠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어릿광대들은 앞으로 뒤로 몸을 날리며 익살스런 움직임으로 객석을 누비고 곳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땅재주꾼들이 주고받는 구성진 입담에 웃음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대중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놀이판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바우덕이란 이름의 어름사니(줄타기 광대)는 현란하게 재주를 넘으며 눈 깜짝할 새 줄 위에 안착하더니 객석에 농을 거는 여유마저 부린다. 앉았다 일어서고 앞으로 가다 홱 돌아서는 동작에 일말의 두려움도 없다. 허공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재빠른 몸놀림이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딱 보아하니 저 여인이 바로 그 바우덕이구먼.”


“과연 소문대로네 그려. 줄을 갖고 노는 폼이 웬만한 남정네보다 뛰어날세.”


공연 내내 사람들의 찬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바우덕이는 이미 전국에 이름난 스타 중의 스타였다.


경지에 이른 줄타기에 빼어난 미색, 거기에 전국 유일의 여성 어름사니로 희소성까지 지닌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매 공연마다 대중들은 바우덕이가 언제 등장할까 애를 태웠고, 줄 위에 선 바우덕이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보려 까치발을 들고 섰다. 항간에는 바우덕이가 허공에 높이 떠올라 재주를 부리며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구성지게 뽑아내는 가락에 재치 넘치는 입담도 둘째가라면 아쉬울 정도다. 천연덕스레 줄을 타며 땅재주꾼과 주거니 받거니 입담을 펼 때마다 관중석이 자지러졌다. 줄 위에서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하는 재주는 전국의 그 어떤 어름사니에도 비할 수 없는 바우덕이의 장기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낭창한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다. 부채를 쥐고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바우덕이의 남다른 맵시가 남성들의 혼을 쏙 빼놨다. 펑퍼짐한 바지에 오색끈을 두른 투박한 줄타기 복장도 바우덕이의 맵시를 감추긴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출중한 미색까지 겸비했으니 그 스타성은 단연 유례가 없을 정도다. 흰 고깔에 살짝 가려진 얼굴은 매끈했고, 새초롬한 표정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러니 누구든 그녀의 줄타기를 한번 보는 순간 그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을 법도 하다. 요즘으로 치면 이효리에 버금가는 스타 중의 스타, 연예인 중의 연예인이랄까.


무엇보다 그녀는 그 특출난 재능을 기반 삼아, 15살 어린 나이에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사당패의 꼭두쇠로 추대됐다. 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는 구성원들의 투표로 정해진다. 여사당패도 우두머리는 남성이던 시절,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에 여성이 추대된 것은 사당패 역사에 처음이었다. 바우덕이라는 대스타에 기댄 획기적인 결정인 셈이다.


남사당패는 춤과 기예 등 공연을 선보이며 숙식을 해결하고 돈을 버는 유랑집단인 만큼, 우두머리인 꼭두쇠는 사당패를 통솔하고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당시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사당패’로 불릴 정도로 바우덕이 개인의 기예가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니 그녀를 향한 사당패의 의존도가 날로 높아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바우덕이는 훌륭한 꼭두쇠였다. 특히 웬만한 남성보다 스케일이 크고 담대했다. 1865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사업을 벌일 때는 다른 사당패들과 경합에서 승리, 조선왕실의 인정까지 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내로라하는 사당패들을 뒤로하고 당당히 그 실력을 인증한 셈이다. 고된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바우덕이 사당패의 공연에 흥이 올라 신명으로 일했다. 공사판에 바우덕이 사당패의 흥겨운 풍물소리가 울려 퍼지면 지쳐 나가떨어진 이들도 이내 어깨춤을 추며 일어났다는 일화도 전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경복궁 공사에서 바우덕이 사당패가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경복궁이 완공된 이후 조선 왕실이 바우덕이 사당패에 특별히 당상관 정3품의 벼슬과 옥관자를 하사해 그 공로를 직접 치하했기 때문이다.


천민 중의 천민집단인 사당패에 당상관의 벼슬이 주어진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로써 바우덕이 사당패는 왕실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일개 사당패와 급을 달리하는 명성을 얻게 됐다. 전국 어디든 바우덕이 사당패를 거부하는 마을을 없었다. 옥관자가 걸린 바우덕이 깃발이 등장하면 모든 사당패가 만장기를 숙여 예를 표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바우덕이가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대된지 불과 2년만의 변화란 사실이다. 17세 어린 꼭두쇠가 걸걸한 남성 사당패를 진두지휘해 전국 최고의 사당패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놀라온 일화를 남기며 ‘대중문화의 효시’로 일컬어지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야박할 정도로 적다. 꼭두쇠로서 보인 일련의 행보들을 제외하면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전부일 정도다.


바우덕이의 본명은 박우덕, 혹은 김우암으로 전해진다. 안성 청룡사 인근 사하촌 불당골에서 태어나 5살에 남사당패에 들어왔다. 어린 사당들이 패거리로 유입되는 대체적인 과정과 같이 그녀 역시 부모가 없었거나 생계 문제로 남사당패에 넘겨졌을 것이다. 그녀가 소속된 안성 남사당패는 과거 사찰 불사를 위해 활동하던 승광대의 영향으로 형성된 놀이패였다. 근거지를 청룡사에 두고 신표를 받아 전국각지를 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청룡사 신표는 사당패의 신분을 증명하는 표식과도 같아 마을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우덕이와 불교와의 인연은 평생 이어졌다. 불심이 돈독해 공연으로 번 수입으로 사찰 불사를 도왔다고 전한다.

 

특히 청룡사와의 인연은 남달랐다. 전국을 유랑하면서도 겨울이면 어김없이 청룡사로 돌아와 몸을 돌보고 기예를 닦으며 다음 봄을 기다렸다. 어쩌면 바우덕이는 겨우내 사찰서 머무는 시간동안 청룡사 스님을 통해 불법의 깊은 진리를 배우거나 전해 들었을 것이다. 줄 하나에 몸을 의탁한 채 한치의 두려움도 없었던 두둑한 배포의 이면에는 생사불이(生死不二)라는 불교적 가르침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당시 청룡사는 천대받던 유랑단이 짐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였다는 점에서 기나긴 겨울 동안 대중 스님들과의 교감도 남다른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에 지칠대로 지친 그녀도 겨울이면 비로소 부처님의 자비로운 품 속에서 여독을 풀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는 한평생 사찰을 향한 대한 고마움을 시주로 회향했다. 공연으로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부분을 청룡사에 희사하며 불사에 힘을 보탠 것. 청룡사 법당 시주자 명단에 바우덕이 사당패 구성원들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사찰의 신표를 받아 전국을 도는 사당패는 왕왕 있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수익금을 쪼개 사찰에 회향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줄을 타며 이미 수없이 많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일까. 바우덕이는 23살 꽃다운 나이에 결핵으로 세연을 접었다. 그녀가 마지막 몸을 뉘인 곳 역시 청룡사 아래 불당골이었다. 여성의 몸으로 쉼 없이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하는 과정에서 병을 얻은 것이니, 모르긴 몰라도 과로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찌됐던 바우덕이는 변변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본인이 태어났던 불당골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이씨 성을 가진 단원 한사람만이 그녀의 마지막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러고보면 바우덕이의 삶은 마치 불꽃과도 같았다. 폭발적인 힘으로 화르륵 타올라 한 시대를 풍미하고 그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 꺼져갔다. 어쩌면 한평생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자유롭게 노닐었던 그녀지만, 정작 땅 위의 현실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더없이 짧은 삶에도 그 여운만은 강렬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풍물단이 명맥을 다하는 동안에도 바우덕이 풍물패만은 꿋꿋하게 그 역사를 이으며 한국 전통의 얼을 지켜가고 있다. 청룡사와 바우덕이의 남다른 인연도 여전하다. 청룡사는 2005년 바우덕이 사당 건립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바우덕이의 넋을 기리고 있다.

 

바우덕이는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남성 중심의 사당패를 이끌며 전국을 유랑한 최초의 여성 꼭두쇠였으며, 빼어난 재능과 끼로 조선의 왕부터 백성까지 모든 이의 마음을 뒤흔든 조선 최고의 연예인이었다. 한철 벌어 한철 사는 하루살이 인생에도 남다른 불심으로 사찰 불사에 가진 것을 희사한 청신녀이기도 했다. 안성 지역에 전해오는 노래 하나가 100년 세월을 뛰어넘어 그 삶의 여적을 전한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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