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소재와 길상
20. 소재와 길상
  • 법보신문
  • 승인 2013.06.1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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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길상엔 불교인간관 투영
의례 수단이자 목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성불의 첩경

 

지난 호에서 천수경의 십원과 육향은 원을 채우고 악업을 소멸하는 것이라 했다. 지혜의 눈이 있어야 일체법을 바로 볼 수 있고, 좋은 방편이 있어야 중생을 건질 수가 있고, 지혜의 배에 올라야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고, 계정혜 삼학이 갖춰진 도라야 원적의 산에 오를 수 있고, 무위의 집에 모일 수 있을 때 법성의 몸과 같아진다고 발원하므로 이는 길상(吉祥, 최상의 행복)의 발원이 된다. 이에 비해 내가 만일 도산으로 향하면 도산이 저절로 꺾이고 화탕으로 향하면 화탕이 저절로 말라버리고 지옥으로 향하면 지옥이 저절로 다해진다. 굶주림으로 향하면 저절로 배가 불러지고 수라로 향하면 악한 마음이 저절로 항복되고 축생으로 향하면 지혜가 절로 얻어지기를 서원하는 육향은 소재(消災)의 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와 길상의 십원 육향에는 불교의 법계관(인간관)이 투영돼 있다. 일체 존재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범부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라는 네 성인의 세계로 구성된다고 불교에서는 이해한다. 십원 육향은 이 십법계관을 바탕으로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육향은 여섯 범부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 여섯 범부들은 여섯 범부의 몸을 벗어나 네 성인 중 마지막의 불(佛)이 돼야 한다. 해서 여섯 범부의 세계는 소멸해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소멸해야 할 범부의 여섯 가지 모습으로 향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향에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의 네 세계는 언급하고 있지만 천상은 별도로 언급되지 않고, 보통의 인간의 특징적인 모습을 지옥의 두 세계로 상징화돼 있다. 도산과 화탕은 인간의 분노를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노는 탐진치 삼독의 하나이지만 끊기가 대단히 어렵다. 지식인의 경우 더욱 그렇다고 한다. 여섯 범부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탐진치 삼독을 없애기 위한 불교의 수행으로 계정혜 삼학이 제시되고,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로 구체화한다. 탐냄을 없애기 위해 베풂을 설하고 성냄을 없애기 위해 인욕을 말하며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일체를 관조하며 정진하라고 한다.


여섯 범부의 세계를 없애는 천수경의 방법은 무엇인가. ‘향(向)’이다. 향하기만 하면 된다. 향에는 향해 간다는 의미가 있다. 간다고 하니 많은 역본들에서는 향하는 곳을 자꾸 대상화하고 실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지옥을 가면 지옥이 저절로 없어진다’고 하며 육향을 이타라고 이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육향에서의 ‘향’을 향해 간다라고 이해하더라도 ‘향’의 대상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궁구해야 한다. 십원 육향을 가만히 보면 십원은 ‘원아속득(願我速得)’하는데 비해 육향은 ‘아약향(我若向)’이라고 하여 내가 향하기만 하면 된다. 어디로 향하는가?

 

▲이성운 강사
바로 내 안이다. 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라보고 아는 것이다. 내 안의 탐내고 성질내고 어리석은 생각 등 여섯 범부의 모습, 재앙을 관조하는 것이다. 관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십원 육향의 문법에서 보면 계를 지니고 정을 닦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일체 법은 무자성의 공임을 알게 된다(照見五蘊皆空). 해서 육범의 악도로 향하기만 하면, 일체 존재의 자성이 공함을 알아 일체 중생의 고통과 액난을 건지는 것이다(度一切苦厄). 이렇듯이 소재와 길상은 의례의 수단이며 목적이고 성불의 첩경이다.


이성운 동국대 강사 woochun1@daum.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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