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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화왕산 관룡사

고통의 바다 파도 천년을 이겨 내며 피안으로 안내하다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은
신라시대 용선대 돌부처님
1300년간 중생 굽어 살펴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았다. 장맛비 품은 운무가 화왕산을 드리웠고, 볕은 아직이었다. 관룡사 용선대 부처님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비바람 견디며 중생들을 굽어 살피셨을까? 왼쪽 뺨이 언뜻 엷은 미소를 피웠다.

 

 

장대비 같던 장맛비도, 창녕 화왕산에 든 객의 숨소리도 잠시 멎었다. 숨 고르는 비구름의 숨결이 화왕산을 희뿌옇게 물들였다. 아직 못다 뿌린 비가 아쉬운지 구름은 화왕산 자락에 머물고 있었다. 운무에 휩싸인 화왕산, 숨겨졌던 화왕산의 여름이 비로소 신비스러운 제 몸을 드러내니 숨이 멎고 입은 말을 잊었다.


화왕산 군립공원 초입에서 관룡사(주지 광우 스님)로 드는 길, 돌장승 부부가 마중이다. ‘관룡사 석장승(경남 민속자료 제6호)’이다. 여기부터 관룡사라는 말 없는 표식이다. 왼쪽이 남장승이고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관룡사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 있다. 하나 무섭기보단 소박하고 친근했다. 단순히 관룡사 소유 토지 경계를 위한 표식은 아니리라. 사찰 안에서 사냥을 금하는 호법이자 도량에 잡귀가 드나듦을 막는 신장일 게다. 2003년 9월경 사라졌다 이듬해 충남 홍성군 구항면의 한 폐벽돌공장에서 찾았단다.


돌장승 커플 사이로 난 오솔길이 정겹다. 짧은 오솔길을 뒤로 하고 한참 오르니 어른 키 만한 문 없는 담장을 만났다. 석벽에 ‘佛’자가 새겨졌다. 관룡사에 따로 일주문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예가 일주문인 셈이다. 문 뒤로 운무에 휩싸인 관룡사가 가만했다. 고개 숙이고 마음 낮춰 담장을 지나 사천왕문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길이 어여쁘다. 주지스님이 돌장승에서 담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복원한다니 반가울 따름이다.

 

 

▲ 관룡사에 삿된 기운 못 들도록 입구를 지키고 선 돌장승.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로 꼽히던 유서 깊은 명찰이란다. 일설에 따르면 원효 스님과 그 제자인 송파 스님이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던 중 화왕산 정상의 세 개 못에 아홉 마리 용이 깃들어 있다 절이 창건될 때 구름 위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를 기뻐하며 용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관룡사(觀龍寺)’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관룡사는 오밀조밀했다. 조선 후기 건물양식인 대웅전(보물 제212호)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령각, 칠성각이 모여 앉았다. 대웅전 맞은편 쪽엔 누각 원음각과 종각이 자리했다. 사자를 깔고 앉은 종각 법고의 모양새가 이채롭다. 각 전각으로 오르는 샛길에 놓은 돌계단이 가지런했다. 대웅전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관룡사 드는 길에 만났던 인연이 법당에 들어 무수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절 한 번에 온 마음 실은 듯 했다. 곧바로 일어서지 않고 바닥과 이마 사이에 합장한 손을 두고 손가락은 108염주를 잡았다. 숨소리조차 미안할 지경이었다. 아미타와 석가모니, 약사여래 부처님은 말이 없었다. 부처님 앞 향초를 태우던 불꽃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불꽃은 사그라질 듯 하면서도 주위를 밝혔다. 순간, 불꽃이 부처님을 향했다. 법당 안을 장엄하고 있는 기도객 신심일까. 적막한 법당은 바람 한 점 들지 않았다. 살며시 부처님 뒤로 향하니 대웅전 후불탱화 뒤쪽 벽엔 관세음보살님이 자애롭게 웃고 계셨다. 수월관음도다. 염주 돌리며 독경 중인 몇몇 기도객을 피해 대웅전 마당으로 나섰다.

 

 

▲ 장맛비 다녀간 관룡사.

 

 

임진왜란 때 전소한 관룡사

약사전만 그을림으로 그쳐

약사기도도량으로 '유명'


대웅전 왼쪽 종무소와 공양간으로 쓰이는 곳 옆은 약사전(보물 제146호)이다. 작은 삼층석탑(경남 지방유형문화재 제11호)이 지키고 섰다. 약사전엔 놀라운 실화가 얽혀 있었다. 평해 군수 신유한이 1733년 정월 잠시 고향에 들렀다 찾은 관룡사에서 명학 스님에게 들은 내용을 작성한 ‘관룡사 사적기(경남 지방유형문화재 제183호)’ 이야기다. 임진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을 피로 물들였다. 당시 관룡사도 전란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불을 질렀고, 관룡사는 잿더미로 변했다. 민초들은 1610년, 관룡사 스님들과 옛터를 정돈해 선당 몇 칸 세워 관룡사 명맥을 지켰다. 몇 년 뒤 영운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탄식했다.


“이상하도다. 이 절이 화재를 입은 것은 깃털 하나가 화로 속에서 재가 되는 것과 같아 수습할 길이 없는데, 유독 약사전 하나만 아무 피해를 입지 않고 처마 끝에 불길이 살짝 닿았던 흔적만 있구나. 약사전에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길이 해독을 입지 않고 막아내 홀로 재앙을 면했구나.”


민초들은 기뻤다. 옛 모습대로 관룡사를 수리하기로 했는데, 약사전 대들보에서 먹으로 쓴 여섯 글자를 발견했다. ‘永和五年己酉(영화5년기유)’. 영화는 중국 동진 목제의 첫 번째 연호다. 345년에서 356년까지 5년 동안 사용한 연호다. 영화 5년은 349년이니, 무려 1664년 전에 약사전이 지어진 셈이다. 신유한은 ‘고문상서’가 진나라의 분서를 피한 것과 같다며 찬탄했다. 약사전을 설립하던 해로 관룡사 창건시기를 잡는다면 349년이다. 이는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던 527년보다 178년이나 이르다. 순도 스님이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들어온 372년(소수림왕 2년)보다도 23년 전이다. 정설인지는 모르나 창녕이 가야불교를 상징한다는 주지스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용선대 부처님 닮아가는 약사전 부처님.

 


약사전만 화마를 피해서일까. 관룡사는 약사여래기도도량으로 유명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신통스럽지 않을 정도였다. 객과 인연 닿은 6월19일에도 약사여래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이날 기도를 회향한 보덕월, 천진화, 연화정, 법등행 보살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길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을 땐 노보살들이 공양물 이고 지며 올라와 약사기도를 했단다. 오다 잠시 공양물을 내려놓으면 정성이 없다며 쉬지 않고 올랐다고. 공양물을 코 아래로 내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시어머니가 기도를 올려 지금의 남편을 낳았다는 보살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기도를 회향한 보살들은 딱히 바라는 바가 있는 게 아니었다. “뭘 바라는 게 아니라 내 공부 하는 거지 뭐.” 대수롭지 않은 대답은 평소 생각이리라. 그네들에게 기도는 마음가짐이었다. 늘 기도 올리는 정갈한 마음을 갖고자 백일기도를 쉬지 않고 한댔다. 옛날엔 백일 동안 몸 청결히 하고 멸치도 안 먹던 노보살님 같진 않다며 손사래다. 약사전 부처님이 유명하니 약사기도를 할 뿐이라고 했다. 마음에 부처님만 떠올리면서.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은 관룡사 용선대에 계신 석불을 본 떠 조성된 고려시대 불상이었다. 약사전 부처님 영험은 용선대 부처님 분신일까. 관룡사에서 용선대로 이르는 숲길을 따라 680m를 걸었다. 이정표가 뚜렷하지 않아 길을 잃었다. 그러다 만난 돌탑에 안도했다. 기도객들 간절함이 쌓은 탑이니 돌탑 무더기만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15분 정도 숨이 가쁘게 오르니 멀리 큰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이 보였다. 그 바위가 용선대였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인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은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았다. 장맛비 품은 운무가 부처님을 감쌌고, 볕은 아직이었다. 용선대 부처님은 얼마나 긴 세월 이 곳에서 비바람 견디며 중생들을 굽어 살피셨을까. 왼쪽 뺨이 언뜻 엷은 미소를 피웠다. 동쪽을 내려다보는 용선대 부처님 시선 안에 저 멀리 관룡사가 보였다. 관룡사에서도 날이 좋으면 용선대 부처님이 보인다고 했다. 민초들 마음을 헤아리셨던 걸까.

 

 

▲대웅전엔 기도하는 객의 신심만 가득했다.

 


몇 해 전 팔각형 연꽃무늬 좌대에서 722~731년 사이 용선대 부처님이 제작됐음을 보여주는 명문이 발견됐단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가 676년이니, 부처님을 불사한 이는 반세기 동안 아물지 않았던 후삼국 민초들의 아픔을 달래주길 바랐으리라. 세 갈래로 갈라진 석굴암 천개석이 하나로 이어진 것도 이와 같을 게다. 용선이란 고통의 바다를 헤치고 가는 반야용선이다. 반야용선은 중생을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으로 싣고 가는 반야바라밀의 배다. 그렇다면 그 위에 앉으신 용선대 부처님이 선장인 셈이다. 후삼국 민초들의 아픔 실어 바다에 버리고 평안의 세계로 안내하셨을 게다.


멎었던 비가 내렸다. 부처님은 그대로 계셨다. 1300여년 동안 가부좌 틀고 엷은 미소로 화왕산 자락 민초들을 바라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비 피할 요량으로 날벌레 한 마리 부처님 품에 안겼다. 무심코 올려다본다. 부처님 왼쪽 뺨이 빙긋 웃는다. 055)521-1747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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