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언론에 주어진 가장 큰 의무는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동시대인들에게 알리는 데 있다. 언론이 그 의무에 충실할 때 그 사회는 성숙해갈 수 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리지 못할 때 공동체는 자칫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붓다가 일찍이 가르쳐 주었듯이 어떤 일이든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서로 인연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법보신문에 다시 칼럼을 쓰기 시작한 게 어느새 옹근 5년 전이다. 불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얼마나 바르게 담아냈는가 톺아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 사이 조계종단에 많은 ‘사건’이 발생했기에 더 그렇다. 그 사건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짚어 왔는지 자신은 없다. 다만 절필하지 않고 칼럼을 써온 데에는 ‘변화’의 희망이 보여서다.
이를테면 불교가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 옳고 그러려면 독자적인 ‘싱크탱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글을 법보신문에 여러 차례 썼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조계종이 연구소를 창립할 때 작은 보람을 느꼈다.
기실 언론인의 본령은 ‘얼굴’로 나서는 데 있지 않다. 글로 여론을 형성하는 게 ‘직분’이다. 조계종의 불교사회연구소 창립 때 못지않게 보람을 느낀 것은 엊그제 ‘붓다로 살자’라는 자발적 결사모임이 공식 발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붓다로 살자. 얼마나 듣고 싶던 말이던가. 2013년 6월22일 발족한 ‘붓다로 살자’는 “모두가 본래 붓다인 것을 무지와 착각에 빠져 잊고 살았다”는 성찰과 함께 “미혹에서 벗어나 붓다가 걸었던 대자유의 길을 걷겠다”고 서원했다.
옹근 1년 전 출간한 ‘붓다 일어서다’(법보신문 서평기사, ‘금불상 앞 떠나 시장바닥으로 들어가라’ 2012년3월28일)에서 나는 기독교의 ‘예수살기’ 모임을 소개하며, 불자들이 ‘붓다 살기’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돌아보면 ‘붓다 살기’를 처음 제안한 것은 봉은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서였다.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신도들이 모인 절에서 ‘붓다 살기’라는 모임이 만들어지길 은근히 소망했다. 아쉽게도 ‘호응’은 없었다. 마음 한 쪽에 담아두고 있던 그 소망이 현실로 구현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가슴이 우릿하다.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선 결사모임의 주체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자발적 결사모임 ‘붓다로 살자’는 조계사 대웅전에서 연 발족식에서 날마다 ‘붓다로 살자 서원문’을 읽으며 하루를 열고(서원), 매일 100원 이상 이웃을 위해 보시하며(보시), 열린 자세로 남의 말을 먼저 경청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며(애어), 소박한 밥상을 차리고 남김없이 먹으며 매주 하루 동안 자가용 없이 다니고 전기를 아껴 쓰며(이행), 매주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이웃과 정겹게 인사(동사)하겠노라 다짐했다. 아름다운 결기다. 욕심내지 않고 소박하게 일상에서 시작하겠다는 맑은 뜻도 읽힌다.
다만 우려는 있다. 오래 기다렸던 조계종 싱크탱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붓다로 살자’가 뜻을 이루려면, 일상의 실천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그마저 실천 못하면서 어떻게 더 큰 과제를 맡을 수 있겠는가 회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탐진치의 삼독을 집요하게 부추기는 ‘체제’를 가만히 두고, 일상에서 욕심을 벗어나라고 권하는 일은 결사모임 참여자들을 자칫 지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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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 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20gil@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