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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산문화재

기자명 법보신문

흩어진 문화유산의 비극…‘장소의 가치’ 회복이 급선무

‘삼화령 미륵삼존불상’과
‘청와대 불상’은 원위치서
옮겨진 ‘이산문화재’ 분류


문화유산 복원 과정에서
‘의미 있는 장소’ 인식과
가치지속 위한 노력 절실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의상’은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곡 상류에 있는 절터에서 발견됐다.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불상을 들라면 1위는 단연 남산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의상일 것이다.


특히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많이 좋아하는데, 처음 만나도 스스럼없이 친해져 이내 같이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이 불상에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친하고 싶은 대상이 생기면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꼭 만지고 싶어 하는데, 이 삼존불의 발가락이 까맣게 반들거리는 이유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나라 단체 관람의 특성상 작품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시품을 힐긋거리며 지나쳐 온 아이들도 이 삼존불 앞에 오게 되면 재잘거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스킨십을 감행한다. 그러나 전시대는 높고 본인의 팔은 짧으니 결국 닿을 수 있는 곳은 발가락의 끝 부분. 그것도 앉은키 160cm 정도의 본존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체구의 예쁜 협시보살에 손이 먼저 가게 되는 것 같다.


이 삼존불 중 중앙의 본존은 원래 경주 남산 장창곡의 상류에 있는 절터에서 발견된 것인데, 1925년 도괴된 상태로 노출된 석실 내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26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옮겨졌다가 마을에 보관되어 있던 2구의 보살상과 함께 3존불로 모셔진 것이다.


양 다리를 정면에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본존은 연화문이 새겨진 원형의 두광을 갖추고 있다. 현재 대좌로 사용되고 있는 연화대좌는 경주시 탑동의 민가에서 옮겨온 것으로 불상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들어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형태며, 왼손은 옷자락을 쥔 형태로 무릎 위에 두고 있다. 노출된 가슴 중앙에는 ‘卍’자가 양각되어 있다. 무릎에 표현되어 있는 옷 주름은 소용돌이 형태의 융기선으로 새겨져 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작고 낮으며 둥근 형태의 얼굴에 반쯤 감은 듯한 눈을 표현하였다. 코는 발견 당시에는 온전한 형태였으나 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 파손된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걸터앉아 있는 의자의 모습은 후면에 얕은 부조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양 보살상은 손의 위치를 제외한 대부분의 형상이 대칭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은 모두 삼면보관을 쓰고 신체 전면에 이중‘U’자형으로 표현된 천의를 걸치고 있다. 원형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팔찌, 간략한 형태의 원형 두광도 모두 동일하다. 현재 좌협시보살은 오른손에 연봉오리 형태의 지물을 지니고 가슴 앞으로 올리고 있는 모습이며, 우협시보살은 왼손에 지물을 들어 어깨 부근에 올리고 있다.


삼존불은 아기 같은 신체 비례, 반쯤 감은 듯한 부은 눈, 옷 주름의 표현 방식과 부드러운 조각법 등으로 볼 때 동시에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원래 삼존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의좌형(倚坐形)’이라는 자세는 우리나라 고대 조각에서는 보기 드문 도상적 특징으로, 이 불상을 ‘미륵’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현재 이 삼존불은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生義寺石彌勒條)에 등장하는 ‘삼화령 미륵세존’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 때 도중사(道中寺)에 거주하던 승려 생의(生義)가 현몽을 꾼 후 돌미륵을 발견하여 삼화령에 안치하였고, 이후 선덕왕 13년(644)에 이곳에 사찰을 짓고 ‘생의사’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또 충담(忠談) 스님이 매년 3월3일과 9월9일, 차를 달여 공양하였다고 하는 불상도 바로 이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이다.


삼존불이 있던 원 절터는 남산 해목령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완경사의 계곡 끝자락이다. 장창곡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서 북서쪽 능선부로 오르면 밀양 박씨, 월성 박씨 등의 묘역이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석불이 발견된 곳은 묘역의 가장 상부에 위치한 평탄지다.


평탄지 내에는 3기의 분묘가 있으며, 그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분묘가 석불이 출토된 곳이다. 현재 불상이 출토되었던 곳은 봉분형으로 복토되어 있으며, 우측 전반부를 제외한 세 방향에 석주가 세워져있다. 이 석주들의 모습은 발견 당시 사진과 비교해 보아도 불상이 출토되던 당시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생의사터에 오면 ‘미륵삼존불을 박물관이 아닌 생의 스님이 창건하고, 충담 스님이 차공양을 올리던 이곳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누구나 차를 올릴 수 있고 편안하게 부처님 주변에서 경배하고 감상할 수 있는 장소, 게다가 그곳이 1500년 전 처음으로 불상을 모셨던 경주 남산의 어느 계곡 능선 자락이라면 그곳을 찾기 위해 얼마간의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신라인들이 보았던 풍광을 보고 느낀다는 것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자 미적 체험이겠는가. 이러한 종교적·감정적 공동체험은 그 장소를 방문한 당사자들에게 문화적 연대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남불’로 알려진 청와대 불상은 원래 이거사에 있었다고 알려졌다. 1913년 총독관저로 옮겨진 후 청와대에 모셔졌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옮겨져 있는 문화재를 이산문화재라고 한다. 사실 이산문화재 중에서 삼화령 미륵삼존불상처럼 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있는 문화재는 다행스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와대 같은 의외의 장소에도 이산문화재가 존재한다. 현재 대통령 관저 뒤 편 보안구역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불좌상 1구가 있다. 일명 ‘청와대 불상’ 또는 ‘미남불’로 알려진 불상이다. 지난 1974년 1월15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불상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불상은 8~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으로 경주 석굴암의 본존상과 닮았다. 불상이 청와대에 소장된 경위는 이구열 선생이 저서 ‘한국문화재 수난사’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1913년 무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小平)라는 일본인의 집 정원에 있던 이 불상을 눈여겨보자 오히라가 불상을 총독관저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후 이 불상은 1927년에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 갔고 현재도 청와대 안에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의 원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왔지만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이근직 선생의 의견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시대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이 재위 35년(736)만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성덕왕릉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절터를 이거사지라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거사지에는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서 유적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또한 사역은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보호시설 없이 다수의 석재와 탑재 등이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무너져 방치된 이거사지 석탑은 한 번 더 수난을 겪게 된다.

 

 

▲‘경주 이거사지석탑’은 1963년 관료들에 의해 남리사지 동탑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한 재료로 사용됐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주를 순시하게 되자 당시 관료들은 무엇인가 보여 줄 것을 궁리했고, 주인 없는 남리사지 동탑을 순시코스로 옮기기로 했다. 당시 동탑도 1층 옥개석과 기단부 일부 부재가 사라져 온전치 않았지만, 관료들은 폐사찰터인 이거사터에 방치된 석탑 부재들 중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식으로 구정동 불국사역 삼거리에 옮겨 세웠다. 이때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이거사탑의 1층 옥개석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임석규 실장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2003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남산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남리사지의 정비작업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남리사지 동탑의 귀환운동도 시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여론에 따라 경주시는 2006년부터 본격적인 이전복원을 시작했고, 남리사지 사유지를 매입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마침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나는 남리사지 복원정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실행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원칙 하나를 되새겼다.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할 때 ‘의미 있는 장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장소의 가치’를 지속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제 강점기와 박정희 정권 때 불상과 석탑의 옥개석을 빼앗긴 이거사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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