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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가 만난 활불-2

기자명 법보신문

400년만에 모습 드러낸 베일 속 홍교사원

1980년대까지 흑수현은
외부와 단절된 자치지역
전통 생활방식 잘 유지돼 


1988년 외부 도로 완공 후
한족 대거 유입되며 개방화
감춰진 티베트 문화 드러나
사원·활불 접할 기회 생겨

 

 

▲ ‘화후’는 야크와 양들의 천국이다. 이곳의 야크와 양 그리고 초지는 티베트인들의 먹거리를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대초원과 함께 공생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필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티베트를 탐방하고 왔다. 사단법인 우리는선우가 기획 및 주관을 맡아 40여 명의 불교신자들과 해발 3000미터 이상의 티베트 초원과 성스러운 사원들을 둘러보았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는 티베트 불교이야기(주로 天葬)와 처음 맛보는 대자연의 위대함에 서로 공감하였고 불교성지에 도착하면 사진과 걷기로 심신의 피로를 풀었다. 역시 공부는 도반이 있으면 보다 힘이 나고 외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 탐방에서 우리들을 사로잡은 가장 매력적인 공간은 루얼까이(若盖) 대초원과 랑무스 불교사원이라 할 수 있다. 랑무스 사원에 대해서는 앞서 잠깐 소개한 바 있어 이번에는 루얼까이와 딴바(丹巴) 그리고 기타 티베트 동네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코스들은 필자가 2008년 흑수현의 활불을 만나러 간 코스와 같다.


루얼까이는 인구 6만의 작은 현으로 사천에서 감숙으로 넘나드는 교통의 요지이며 해발 3470m의 고산지대이다.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은 처음 온 이방인의 오감을 시원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며 커피 한잔이 생각날 만큼 향기롭다. 이 대초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러얼()대초원인데 일반적으로는 ‘화후’(花湖)로 알려져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대초원과 호수는 티베트 유목민족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딴바는 해발 1700m에 위치하며 성도에서 38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의 ‘망루’를 발견할 수 있다. 보통 4각형, 5각형, 6각형,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망루의 높이는 10m에서 최고 35m까지다. 이러한 망루의 건축목적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외부세계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다. 딴바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는 찌아롱(嘉) 티베트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지아쥐짱싸이(甲居藏寨)가 집촌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보통 3층이나 4층으로 구성된 티베트식의 가정집이다. 1층에는 가축을 기르고 2층은 거실과 주방, 3층은 침실, 4층은 경당(經堂)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 티베트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목축대신 농업을 하고 있다. 따라서 농경위주인 한족의 문화를 많이 흡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 또한 찌아롱(嘉)방언을 사용하지만 문자는 없다. 젊은 층과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한어만을 사용한다. 다음으로 쏭판(松潘)이다. 사천의 북쪽 민산산맥 중부에 자리잡고 있는 쏭판은 인구 7만의 작은 현이다. 이 현에는 민산산맥의 주봉인 만년설산 쉐바오딩(雪寶頂, 5588m)이 자리하고 있다. 쏭판은 역사적으로 당번고도(唐藩古道)상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유명하다. 과거 이 지역은 토번과 당이 화친결혼(송첸감포와 문성공주)을 앞두고 전쟁을 벌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당시 왕의 사신이 청혼을 요청하기 위해 이 지역(송주)을 지나려하자 송주의 책임자는 사신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나라와 토번 간에는 쏭판을 중심으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1차전은 20만 대군의 토번이 승리하고 2차전은 대규모 군대를 지원한 당이 지금의 천주사(天珠寺)부근에서 대승한다. 서로 간에 막대한 소모전을 펼친 끝에 당 태종은 결국 토번의 화친에 응하게 되고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낸다. 이로써 토번과 당의 역사적인 문화교류가 시작되었고, 장안에서 라싸까지 변강의 오지를 오게 된 문성공주의 혼인길은 당번고도라는 중요한 문화 교류로가 되었다.

 


현재 쏭판 현의 중심지역에 한족의 문화와 장족의 문화가 융화되어 있음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런 하늘위의 동네를 나는 매년 자의반 타의반 돌아다니는 셈인데 올 때마다 그 초원이 그 초원이 아니고 그 야크가 그 야크가 아님을 느끼곤 한다. 왜일까? 암튼 이런 경로를 돌고 돌아 티베트의 고승(활불)을 만나러가는 것이다. 이러한 오감이 즐거운 동네가 있는가 하면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어두운 곳도 존재한다.

 

 바로 필자가 만난 티베트 홍교(寧瑪派)의 활불 ‘짜시게상’(가명)도 바로 이런 곳, 즉 흑수현(黑水縣)이라는 작은 마을의 산 정상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흑수현’의 명칭은 현에 존재하는 ‘흑수하(黑水河)’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티베트어 중 암도 방언으로 흑수를 추어취(措曲)라하며 추어(措)는 생기 있는 흑색의 철을 의미하고 취(曲)는 물을 의미한다. 과거 흑수하(黑水河)는 전체 현을 관통하고 있으며 강의 색깔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흑수(黑水)의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흑수현은 사천 성 서북부 고원, 아패자치주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4356㎢이며 평균해발이 3544m의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흑수현의 인구 분포를 보면 이 지역은 전형적인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지역은 1953년 중국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1차 전국 인구조사에서도 제외돼 통계를 내지 못할 만큼 변방이었다. 그러나 1964년 6월17일~7월31일 진행된 제2차 전국인구조사에서 흑수현의 총 인구는 4만 608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당시 통계에서 특이한 점은 대학문화정도의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는 숫자가 89명, 고등문화정도가 505명, 초중문화정도가 1307명, 소학문화정도가 6995명에 해당됐다. 나머지 2만2820명은 문맹 혹은 반문맹이었던 셈이다.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의 대다수가 문명과는 동떨어진 전통적 삶을 유지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지역은 1980년대 이전까지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소수민족의 융합지구였다.


그러다 1958년 외부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처음으로 흑수현도로 보수공사가 시도되었으나 변경의 외각지대인 만큼 1988년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완공되어 비로소 차량의 유입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정부에서 추진하는 변경의 도로공정 사업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한족인의 진입과 물질적 문화의 유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며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티베트의 현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흑수현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결국 1990년에 이르러 이 지역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이방인의 출입이 자유스러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서 400년 동안 숨어 지내던 티베트 홍교의 사원과 활불도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심혁주 한림대 연구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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