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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법석 위에 있던 관세음보살은 어디로 가 버렸나

기자명 법보신문

옛 도반 대각에 불자 든 임제
예를 갖추려 하자 불자 던져
바로 뒤돌아 처소로 향하자
뜻 모른 대중들은 어리둥절
권위·차별 깬 자재함 돋보여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탄생시킨 중국 하북성 조주현 조주시 백림선사 관음전 앞엔 지금도 측백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師見僧來하고 展開兩手한대 僧이 無語어늘 師云, 會麽아 云, 不會니다 師云, 渾崙을 擘不開하니 與汝兩文錢하노라

 

해석) 임제 스님이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그 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알겠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혼륜산을 쪼개서 나눌 수 없구나. 그대에게 돈이나 두어 푼 주어야겠군.”

 

강의) 임제 스님께서 양손을 펼쳐 보이신 것은 환영의 뜻이거나 인사의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도 임제 스님께 그냥 공손하게 인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너무 긴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임제 스님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절을 하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바로 알아차리고 나의 행동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봅니다. 그 스님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정직하기는 한데 너무 답답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 같습니다. 임제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긴 한 것 같은데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산을 쪼개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진리를 설명해도 그 스님은 받아들일 틈이 없습니다. “돈이나 두어 푼 주겠다”는 말은 짚신이나 사 신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더 배우고 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혼륜(渾淪)은 중국 서쪽에 있는 상상의 산이라고도 하고 중국 서쪽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 벽창호 같은 답답함의 정도를 곤륜산에 비교했습니다. 임제 스님이 느끼셨던 답답함의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大覺이 到參에 師擧起拂子하니 大覺이 敷坐具라 師擲下拂子한대 大覺이 收坐具하고 入僧棠하다 衆僧이 云, 這僧은 莫是和尙親故아 不禮拜하고 又不喫棒이로다 師聞하고 令喚覺하니 覺이 出이라 師云, 大衆이 道호되 汝未參長老라 覺이 云, 不審하고 便自歸衆하니라

 

해석) 대각 스님이 임제 스님을 찾아 참문했다. 이에 임제 스님이 불자를 세우니 대각 스님이 좌구를 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이 불자를 던져버리자 대각 스님은 좌구를 거두어 승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중 스님들이 말했다. “저 스님은 임제 스님과 가까운 사이 아닌가. 절을 하지도 않고 또 얻어맞지도 않네.” 이에 임제 스님이 이 말을 듣고 대각 스님을 불러오게 했다. 대각 스님이 다시 오자 임제 스님이 말했다. “대중들이 말하는데 그대가 큰 스님인 나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 그러자 대각 스님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는 바로 대중들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강의) 대각 스님은 황벽 스님 밑에서 임제 스님과 함께 동문수학했던 사이입니다. 대각 스님이 임제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임제 스님이 불자를 세우자, 대각 스님은 도반이기는 하지만 큰스님인 임제 스님에게 예를 갖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이 갑자기 불자를 던져버립니다. 임제 스님은 대각 스님의 경지를 짐작하고 높고 낮음을 따지는 인사 같은 세속적인 잣대가 불필요함을 알았겠지요. 대각 스님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대각 스님은 방석을 거두고는 곧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버립니다. 깨달은 사람들의 무언의 대화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하는 어두운 대중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임제 스님이 대각 스님이 도반이라고 해서 편의를 봐 주는 것 아니냐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에 임제 스님은 대각 스님을 불러오게 하고 대중들의 불평을 그대로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자 대각 스님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도반인 임제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임제 스님과 대각 스님의 모습이 군더더기 없는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진제(眞諦)에서는 두 스님 모두 깨달음에 차별이 없지만 속제(俗諦)인 지금 그 자리에서는 여전히 큰 스님과 그저 그런 대중 스님일 뿐입니다. 이것을 두 분 스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 대각 스님 모두 권위와 차별 의식을 완전히 털어버린 자재한 모습이 일품입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참이 된다”는 임제 스님의 가르침을 두 분 스님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趙州行脚時에 參師할새 遇師洗脚次하야 州便問, 如何是祖師西來意오 師云, 恰値老僧洗脚이로다 州近前, 作聽勢어늘 師云, 更要第二杓惡水潑在니라 州便下去하다

 

해석) 조주 스님이 행각 하다가 임제 스님을 찾아왔다. 그때 임제 스님은 발을 씻고 있었다. 조주 스님이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마침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다시 두 번째 발 씻은 구정물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그냥 가버렸다.

 

강의) 임제 스님과 조주 스님은 하북 지방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스님들입니다. ‘조주록’에는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지만 임제 스님과 조주 스님의 역할이 바뀌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후대에 가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찌됐든 조주 스님이 행각을 하시다가 임제 스님께 들렀습니다. 마침 임제 스님이 발을 씻는 것을 보자 조주 스님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지금 발을 씻고 있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전혀 엉뚱한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조주 스님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뜻을 몰라 물어보지는 않았겠지요. 임제 스님을 떠 본 것일 겁니다. 조주 스님의 질문에 대한 임제 스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지금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조사가 이렇게 발을 씻고 있지 않소”라는 의미일 겁니다. 가만있을 조주 스님이 아니지요. 조사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처럼 임제 스님을 향해 조용히 귀를 기울입니다. 이에 임제 스님은 “이제 두 번째 구정물을 버리려고 한다”고 응수합니다. 그러고 보면 앞서 했던 임제 스님의 대답이 첫 번째 구정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의미는 아마 이런 뜻 같습니다. “조주 스님 이만 됐으니, 그만 농담하시지요.” 이심전심(以心傳心). 서로의 경지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에 조주 스님이 알아듣고 그대로 일어나 나가버립니다. 가면서 미소를 지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有定上座하야 到參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下繩床하야 擒住與一掌하고 便托開하니 定이 佇立이라 傍僧이 云, 定上座야 何不禮拜오 定이 方禮拜에 忽然大悟하니라

 

해석) 정상좌라는 사람이 임제 스님을 찾아와 인사를 하고 물었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임제 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 멱살을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고는 밀어버렸다. 정상좌가 멍하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스님이 말하였다. “정상좌여! 어째서 절을 올리지 않습니까?” 정상좌가 절을 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았다.

 

강의)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에게 불법의 대의에 대해 3번 묻고 3번 얻어맞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정상좌가 불법의 대의를 묻자 임제 스님은 바로 멱살을 쥐고 후려갈기고 밀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워낙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라 정상좌는 아마도 넋이 빠졌을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질문도 사라지고 본인도 사라지고 일체의 분별심이 사라진 상태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다가 옆에 있던 스님의 말에 문득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정상좌는 불법의 대의를 물으러왔던 그 정상좌가 아니었습니다. 임제 스님에게 절을 할 때 아마도 온갖 사량과 분별을 벗어버린 무심(無心)의 경지였을 겁니다. 깨달음은 이렇게 ‘몰록’ 오는 것 같습니다.

 

麻谷이 到參하야 敷坐具하고 問 十二面觀音이 阿那面이 正고 師下繩牀하야 一手로 收坐具하고 一手로 搊麻谷云, 十二面觀音이 向什麽處去也오 麻谷이 轉身하야 擬坐繩牀이라 師拈拄杖打한대 麻谷이 接却하야 相捉入方丈하니라

 

해석)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을 찾아와서 좌구를 깔고 물었다. “12면 관세음보살은 어느 면이 정면입니까?” 그러자 임제 스님이 법석에서 내려와 한 손으로는 좌구를 빼앗고 한 손으로는 마곡 스님을 붙잡고 말했다. “12면 관세음보살은 어디로 가버렸나?” 마곡 스님이 몸을 돌려 법석에 앉으려 하자 임제 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후려쳤다. 그러자 마곡 스님이 이를 붙잡아 서로를 잡고서 방장실로 들어갔다.

 

강의) 12면 관음보살은 11면 관음보살을 잘못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12면 관음보살로도 불렀던 것 같습니다. 마곡 스님이 법석 위에 있는 임제 스님을 보며 말합니다. 12면 관음보살은 어느 얼굴이 바른 얼굴인가?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임제 스님도 관음보살이고 자신도 관음보살인데 어느 관음보살이 참 관음보살이냐 이런 의미 같습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법석에서 바로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자, 저기 법석에 있던 관음보살은 이제 어디로 가버렸나.” 이 질문의 의미는 자신이 바로 진짜 관음보살이라는 말 일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마곡 스님이 아니겠지요. 마곡 스님이 바로 임제 스님이 앉았던 법석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무슨 소리, 내가 바로 관음보살이야”하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임제 스님이 이를 알아차리고 주장자로 후려칩니다. 그러자 마곡 스님이 이를 붙잡습니다. 주인과 객이 따로 없습니다. 임제 스님과 마곡 스님이 서로 주인이 됐다가 손님이 되기를 자유자재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첫눈에 알아봤겠지요. 서로가 관음보살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서로 붙잡고 방장실로 향했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한 것입니다. 아마 어깨동무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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