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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정두희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대학원 수업받으며 인연
학자로서 스스로에 엄격
병마에 의연했던 연각승


댓돌 위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햇살이 조화롭던 가을날 오후라 바람도 보드라웠다.


구광루 앞마당에는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탐방객들이 왔겠거니’ 하면서 무심히 지나갈 참이었다. 누군가가 “법진 스님 아니신가” 하면서 내 이름을 먹이는 것 같았다. 살펴보아도 아는 이는 없었다. ‘‘밥상머리 정’을 나누었던 이가 탐방객으로 온 건가.’


“법진 스님 아니에요? 나예요, 정두희!”하는 게 아닌가. 정두희라면,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서강대 정두희 교수님뿐인데. 어디에도 그런 선생님은 없었다. 몸이 초췌하게 야위었고, 주름살도 너무 많았다. 그래도 친절하고, 맑고, 정감 넘치는 목소리만은 여전했다. 청화당으로 몰려가 그 동안 살아온 얘기, 학교의 여러 가지 변화들, 대학원생들의 공부 등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선생님은 몸이 왜 이렇게 많이 축나셨습니까?”


“아, 나이가 들어가니, 몸무게를 줄이는 게 좋다고 해서요.”


실은 건강 회복을 위해 서울 집을 정리하고, 덕유산 자락에 살 집을 새로 지어 이사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그때 이미 암으로 투병 중에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과는 단성호적을 분석하는 대학원 수업에서 만났다. 1980년대 초에 이미 미국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과거합격자 명단을 분석하여 한국사에서 주요 변화를 주도한 지배세력들 간의 변동을 검토한 바 있었다. 우리도 호적에 등장하는 다양한 내용들을 적절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가공하고, 유형화하고, 해석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역사적 변화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학기 내내 역사 연구에 필요한 새로운 시각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재작년 말 덕유산이 눈 속에 폭 파묻혀 있을 때, 무주 안성에 있는 선생님의 집을 방문했다.

 

듣기에, 병마를 이겨볼 요량으로 수차에 걸쳐 수술을 했지만 번번이 재발했고, 급기야는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손을 쓸 수도 없다고 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텐데 뭐라고 위로를 해드려야 하나 마음이 무거웠다. 선생님은 의외로 따뜻한 미소를 가진 옛모습 그대로였다.


시종일관 미소를 띠면서 평생의 역사연구를 통해 얻은 여러 교훈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조카딸의 이야기 등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털어내 놓으셨다. 역사가로서,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아직 짊어지고 있을 법도 한데,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은 것 같은 홀가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서는 방문객들 손을 잡고 날 풀리거든 남덕유산 향적봉에 함께 오르자고 했다. 우리도 오매가매 들르겠다고 했다.


간간히 전화를 걸면 병객임을 눈치 채지 못할만한 기운찬 목소리로 반갑게 응대해주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전화도 문자도 모두 불통되고 말았다. 또 다른 어느날 문득 선생님은 전화를 걸어와 “스님, 내가 집중해서 치료를 좀 받느라고…”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법진 스님
돌아보면, 역사가로서 자신의 학문과 탐구에 엄격하였고,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자상하였고, 자연인으로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가 넘치는 분이었다. 스스로 병객이 되어 병풍 뒤에 자신을 숨기거나, 병마 앞에 나약해져 실덕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가 만난 의연한 연각승이었다.

 

종회의원 / 완주 송광사 주지 법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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