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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단재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기자명 법보신문

일제강점기, 극심한 생활고에도 독립 위해 자신의 삶 헌신

총독부의원서 간호사 근무
 3·1운동 계기로 변화 맞아 
간우회 조직해 독립투사로


결혼 후엔 남편 활동 지원
극심한 생활고에 고통받다
해방 앞두고 외로운 죽음

 

 

▲1920년 단재 신채호 선생과의 결혼 사진(왼쪽).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박자혜 여사와 그녀가 운영했던 산파소 모습(오른쪽). 독립기념관 제공.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치욕을 딛고 역사 속 민족의 우수성을 일깨우고자 했던 단재 신채호의 선생의 일갈이다. 그는 민족계몽에 앞장섰던 역사학자이자 철학가, 언론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다. 일본의 농간에 흔들리던 역사를 철저히 고증해 한민족의 자주성을 증명해 냈으며 날카로운 필봉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독려, 위태로운 조국을 위해 자주독립과 국권수호 의지를 이끌었다. 한평생 일본에 고개 숙이지 않겠다며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민족의 암흑기, 일본의 핍박으로 위축된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그의 업적은 지금까지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업적이 가족들의, 특히 아내 박자혜(1895~1943) 여사의 처절한 헌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위대한 인물의 곁에는 한결같이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 마련인데, 신채호 선생의 경우 박자혜 여사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을 대신해 한평생 홀로 아이들의 양육과 생계를 책임졌고, 극심한 생활고에도 남편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은 1920년 북경에서였다. 당시 신채호 선생은 39세의 이혼남이었고 박 여사는 24세였다. 적지 않은 나이차에 조건과 상황, 무엇 하나 맞는 구석이 없었던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바로 조국 독립을 향한 한결같은 열망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당시 날카로운 필봉으로 이름 날리던 독립운동가였고, 박자혜 여사는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를 다니던 인재였다. 두 사람 모두 조국을 위해 활동하다 조국을 떠나 도피길에 올라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학문과 독립 이외엔 관심 없기로 유명한 신채호 선생의 무심함도 박 여사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녀의 독특한 이력과 총명함, 당찬 눈빛이 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것이다.


박자혜 여사는 시대적 흐름의 중심에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 조선왕실에 보내져 궁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한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모든 궁녀의 숙명이었지만, 몰락한 왕실은 이례적으로 100여명의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도 그 중 한명이었다. 어리고 총명했던 그녀는 운 좋게 고종의 처 황귀비 엄씨가 후원하던 숙명여학교에 입학해 신식교육을 받았고, 조산부양성소를 거쳐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졸업 후 조선 총독부의원에 취직했고, 일본이 주는 봉급을 받으며 민족의 독립에는 별 관심 없는 삶을 살았다.


그녀가 시대의 소용돌이에 다시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1919년 3.1운동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들은 독립을 부르짖는 군중들을 총칼로 학살하다시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어갔다.


서울시내 모든 병원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피비린내와 신음소리가 응급실을 가득 메웠다. 그녀가 일하던 총독부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놓으면 경찰들이 들이닥쳐 어디론가 끌고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내면에서 충격을 넘어선 분노가 치솟았다.


“왜 이들은 목숨을 내던지며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가. 왜 일본은 이토록 무자비하게 그들의 외침을 묵살하는가.”
생계를 위해 억눌렀던 애국심이 울분과 함께 터져 나왔다. 박 여사는 그 길로 만세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총독부의원에서 일하던 한국인 간호사들을 소집해 ‘간우회’를 조직했다. 당시 총독부의원 의사·간호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은 의사 4~5명과 박자혜 여사를 포함한 간호사 열명 남짓, 이 중 4명의 조선인 간호사가 동참의사를 밝혔다. 독립을 외칠 결전의 날은 3월10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0일이 되기도 전에 정보가 새나갔다. 거사는 무산됐고 박자혜 여사를 비롯한 간호사들은 일경에 체포돼 유치소에 수감됐다. 총독부의원장의 보증으로 풀려났지만 그녀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그녀를 과격 분자로 점찍고 감시망을 조여 왔으며, 그녀 스스로도 더 이상 일본을 위해 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피하듯 북경으로 왔다.


▲1936년 동아일보에 실린 박자혜 여사의 모습. 신채호 선생의 유골함을 안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상처받은 박자혜 여사에게 굳건한 의지처가 되어 줬다. 조국과 민족,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은 그녀의 번뇌를 맑히는 감로수였다. 두 사람은 사상과 이념을 공유하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결혼과 동시에 여관방에서 조촐한 신혼살림을 차렸고 1년 만에 첫아들 수범을 낳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민족의 미래를 짊어진 이들에게 사랑은 사치에 불과했을까. 두 사람은 결혼 2년만에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불가피한 이별을 맞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머리를 깎고 북경 관음사에 몸을 의탁했고, 박자혜 여사는 큰아들 수범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인사동 어귀에 산파소를 차렸다.


여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던 까닭에, 박 여사의 산파소는 손님보다 일본 경찰의 방문이 더 잦았다. 1923년 신채호 선생이 조선의열단에 가담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 무장투쟁을 선언하면서 일본 경찰들의 감시와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첫째 아들 신수범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빚을 내 학교를 다녔는데 등하교길에 일본경찰들이 불러 세워 가방을 뒤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손님은 열달에 한명 받기도 어려웠고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끼니를 때우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1928년 12월12~13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신채호 부인 방문기’가 당시 상황을 소상히 전한다. 이 기사는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국제위폐 사건으로 체포된 직후에 보도됐다.


“홀로 어린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 인사동 19번지 거리 ‘산파 박자혜’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 음산한 기운을 지어내니, 이 집이 조선사람으로서는 거의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의 가정이다.(…)삼순구식도 계속할 힘이 없어 어찌할 바 모르고 옥중에 있는 가장에게 하소연하니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으로 보내라’는 편지를 받고 복 받치는 설움을 억제할 길 없었다.”


기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처절한 생활고로 점철돼 있었다. 솜 두툼히 넣은 옷 한 벌 보내달라는 남편의 부탁에 재료살 돈이 없어 애간장을 태웠고, 좁은 방 한칸 6원50전에 불과한 월세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한채 야위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기 일쑤였다.


무심한 남편을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물심양면 남편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저술에 필요한 책을 요청해 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구해 보냈고 어려운 살림에 끼니를 굶는 한이 있더라도 활동비를 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산파소를 운영하며 독립 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남편과의 지속적인 편지 교류를 기반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간 정보와 물건 등을 전달하는 연락책을 담당했으며, 때때로 위험에 직면한 독립투사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1926년 나석주 의사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할 때, 목숨을 걸고 위치 안내와 숙식 제공 등 제반 사항을 도왔던 이도 박 여사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오랜 세월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19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한 평생 조국을 위해, 또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박자혜 여사의 삶은 마지막까지도 고되고 힘겨웠다. 남편과의 사랑도 가슴 아픈 비극으로 끝났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1936년 남편이 수감된 감옥에서다. “신채호 뇌일혈로 의식불명 생명위독.” 여순 고아동형무소에서 찾아든 비보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박 여사는 황망한 심정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형무소로 향했다. 그러나 10년만에 마주한 남편은 가족들이 곁에 온 줄도 모른 채 미동이 없었다. 그것이 남편의 마지막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틀 만에 옥중에서 세연을 접는다.


“여보,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개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불쌍한 당신의 혼이나마 부처님 품속에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이 밤이 밝아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대문 밖 지장암에 가서 정성껏 기도하겠습니다.”


박자혜 여사가 단재의 영전에 바친 추모글 ‘곡하는 마음으로’의 일부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할 정도로 상심했다. 당시 일간지에 남편의 유골함을 받아든 박자혜 여사의 모습이 실렸는데, 작은 흑백사진으로도 그 애끓은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다. 남편의 죽음 이후 박자혜 여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둘째 아들 두범이 1942년 영양실조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유추하건데, 여전히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아들을 떠나보낸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박자혜 여사는 좁은 단칸방에 홀로 누워 숨을 거뒀다. 조국의 독립을 불과 2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남편을 바쳤고 또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랬기에 그 삶은 더욱 고되고 외롭고 처절했다. 민족의 고통을 외면했다면 적어도 육신만은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외롭고 고단했던 삶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회했을까 아니면 홀가분했을까. 어쩌면 남편의 영정에 바친 추모글처럼, 삶의 모든 기억들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품에서 영면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던 박자혜 여사. 그녀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재가 존재함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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