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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불종자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님의 말·행동·마음 닮아가는 과정

누구나 가진 불성인 불종자
중생은 쉽게 알아채지 못해
부처님 닮아가는 수행으로
본성 깨닫는 날이 참된 귀의

 

머리카락을 깎고 살다보면 가끔씩 질문을 받는다. “스님은 어떤 인연으로 출가했나요?” 대답 이전에 여러 가지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스님들이 쉽게 받을 수 있는 질문이지만, 대답마저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 스님의 일화를 접하게 되고 매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당나라 당시에는 스님이 출가를 하려면 승과라는 고시를 통과해야 했다. 고시를 보는 장소에서 시험관이 현장 스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왜 출가하려고 합니까?” 현장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멀리로는 부처님을 계승하고 가까이로는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세상에 펴서 널리 빛내기 위해서입니다.” 출가자는 출가자가 해야 할 근본적인 일이 있다. 이 내용을 현장 스님은 출가 이전에 깊이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출가 이후 그 뜻을 평생 유지하면서 삶을 그의 뜻대로 살았다. 그의 원력대로 부처님의 법을 계승하고 부처님의 법을 세상에 펴서 빛나게 하였던 것이다. 스님들이 출가할 때의 사연은 다양하겠지만, 출가 이후 발심하고 뜻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정행품 경문을 보자.


“부처님께 귀의할 때면, 중생들이 불종자를 이어받아 위없는 마음 내기를 발원해야 한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이전에 부처님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부처님은 ‘깨달음이 지속되는 상태’를 이룬 분을 말한다. 무엇을 깨닫는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이르길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모두 갖추고 있건만,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망상과 집착 사이에는 분별이라는 번뇌가 생략되어 있다. 망상이란 무엇인가. 한 생각을 일으키고 움직이는 것이다. 한 생각이 움직이는 자리에 근본무명이라는 번뇌가 시작되고 자라난다. 한 생각이 멈추고 일어나지 않는 자리에서 깨달음이 시작된다. 부처님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에 머물고 있으면서, 항상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를 하시는 분이다. 부처님의 교화에 순응하며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이 진정한 귀의다.


우리 중생은 무량무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강하고 진한 생각을 일으키는 곳에 강하고 진한 괴로움이 따라다닌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생각이 움직이는 농도가 깊어지면 집착도 깊어진다. 집착이 떨어지면 생각의 농도가 얕아지고, 분별이라는 번뇌가 문제로 나타난다. 분별의 단계에서는 집착은 없지만 주관과 객관을 분명하게 나누어 보는 특징이 있다. 분별이 떨어지면 유식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러나 한 생각이 일어나고 움직이는 상태는 남아있다. 이 상태가 깨달음을 가로막는 마지막 관문이 된다. 이 관문을 넘어서면 일심의 세계가 되고 깨달음의 경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 경계에 진입한 분을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중생들이 불종자를 이어받아’에서 ‘불종자’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성을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을 무엇 때문에 이어받는가. 우리 중생은 우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열심히 수행을 해 보아야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종자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체험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부처님을 배우고 닮아가는 과정이다. 부처님 몸의 행위를 닮아가고, 말의 행위를 닮아가고, 마음의 행위를 닮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보는 법을 닮아가고, 생각하는 법을 닮아가며, 행동하는 법을 닮아가고, 습관들이는 법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닮아가는 수행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경계가 열리고 부처님 말씀이 모두 진실임을 알게 된다. 알게 되어도 수행의 완성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위없는 마음을 낸다’는 것은 보리심을 발한다는 말이다. 즉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코 수행을 멈추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겠다는 결심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천상의 복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아라한이나 벽지불 정도의 중간 과정의 수행결과에 만족하지도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진실한 보살도를 닦아 나가기를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홍서원의 ‘불도무상서원성’과 같다. 불도란 견성성불을 말한다. 목표가 지고하게 높다. 그리고 부처님에게는 이기심이 없다. 망상, 분별, 집착도 없다. 이러한 번뇌가 모두 끊어지고 습기마저 모두 사라졌을 때 성불하는 것이다.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이루고자 하는 이타적 대비심과 지혜가 이루어 내는 것이다. 화엄경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보살은 불도를 닦는다”고 하였으니 보리심은 ‘중생무변서원도’의 서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도암 스님.

우리 중생은 미혹해서 깨달음의 상태에 있지 못하고, 부처님은 깨달음의 상태에 머물면서 미혹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처님에게 귀의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발원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날, 부처님은 우리가 진실로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이다.

 

도암 스님 송광사 강주 doam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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