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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본으로 가는 출항지 크라스키노

기자명 법보신문

발해를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사 연구의 국제적 보고

동북아교류서 교통 요충지로
한·중·일 관심 가지고 발굴
청동거울·철제화살촉 등 출토
고구려·발해 문화연속성 밝혀

 

 

▲크라스키노를 출발해 일본으로 향한 발해사신이 도착한 곳은 현재의 후쿠라항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쿠라항의 전경.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있는 발해성 유적에서 낙타의 뼈가 확인됐다. 발해 유적에서 낙타 뼈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8월 5일 연합뉴스)


동북아역사재단은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지난해 출토된 동물 뼈 중에서 낙타의 뼈가 포함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5일 밝혔다. 이것은 발해가 서역과 직접적으로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크라스키노 성이 발해의 국제교류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다량의 토기편, 철제 화살촉, 철제 창 조각, 토제 입방체 유물, 동물 뼈 등과 함께 발해의 청동거울(銅鏡)도 출토되었다. 발해의 청동거울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홍준어장 고분군과 지린성 허룽현 북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2점뿐이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크라스키노성 출토 청동거울은 전체가 남아있는 온전한 발해 청동거울로서는 세 번째 것이다. 특히 연해주 지역에서 출토된 발해 청동거울로서는 첫 번째 발견이다.


발해는 건국 이후부터 당, 일본, 신라 등 주변 국가들과 정치·문화·경제적 교류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일본과는 50여회에 걸쳐 사신이 오고갔다. 험한 바닷길을 통한 교류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본으로 가는 발해의 주요 출항지가 바로 크라스키노였다. 이곳에는 발해시대 성터가 잘 남아있는데 동경용원부 관할에 있던 염주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성터는 두만강하류 북쪽에 있으며, 러시아 연해주 핫싼구역의 크라스키노마을로부터 남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평면의 형태는 말발굽 모양이며, 동·서·남벽에 성문이 있다. 이번 발굴로 크라스키노성이 당시 동북아교류에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였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지역은 1871년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머무르던 빨라지 까파로프에 의해 최초로 발해유적이 발견된 곳이며, 그 후 러시아 발해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 샤프크노프박사가 중심이 되어 러시아 극동고고민속역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는 1993년부터 러시아와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시작했으며, 나는 1994년 문명대교수의 한국미술사연구소팀이 성 안의 절터를 조사할 때 참여하였다. 당시 절터 남쪽의 석축 부근에서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크라스키노성에 가면 살아 있는 발해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뿐만 아니라 북한, 일본, 중국도 큰 관심을 가지고 조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일찍이 발해와의 교류에 주목하여 성의 동쪽 문을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북한은 두만강을 공유하는 곳이 발해시대 역사영역이라는 점에서 최근 북한 내 발해유적과의 연계 고리를 찾고 있다. 특히 중국은 그들의 입장에서 발해를 해석할 때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유적지로 보고 러시아학자들과 교감을 쌓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크라스키노는 발해를 통해 다시 형성된 동아시아사의 국제적인 보고이자 각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적지에서는 그동안 다양한 발굴성과가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는 유구의 최하층까지 발굴하여 발해초기의 문화층을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층에서는 고구려시대 시루를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발해문화와 고구려의 연속성이 증명되었다. 고구려시대에도 이 지역은 일본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크라스키노성에서 긴 여정의 마지막 점검을 마친 발해의 사신단은 크라스키노항을 통해 일본으로의 대장정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는 곳은 어디였을까? 발해 사신단은 풍향과 해류에 따라 북으로는 데와(出羽), 서로는 이즈모(出雲)에 이르는 일본 해안 도처에 도착하였는데, 현재 이시카와겐(石川縣)의 후쿠라(福良)항이 주목된다. 이 항구는 에도시대에 홋카이도와 왕래하는 배들의 기항지로서 번영하였다. ‘속일본기’에는 ‘해상에서 조난하여 표착한 발해 사절을 후쿠라진에 머물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삼대실록’ 겐케이(元慶) 7년(883) 10월조에는 ‘발해사가 돌아가기 위한 배를 만들 때 후쿠라도마리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연유로 후쿠라는 일본에서 발해로 가는 도항지이면서 발해로 건너갈 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생각되고 있다. 서북쪽으로 열린 크고 작은 두개의 만으로 이루어진 후쿠라항은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항이어서 동해항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그 역할은 고대는 물론 중세·근세까지도 이어졌으며 옛 후쿠라 등대는 현존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유명하다. 현재는 이시카와겐 문화재로 지정돼있다.

 

 

▲크라스키노 출토 발해동경(왼쪽)과 석조불좌상(오른쪽).

 


발해와 일본의 바닷길은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해로에서 비극을 맞았는데 그 중 한사람이 발해의 승려 인정(仁貞)이다. 인정은 814년에 일본을 방문한 제17회 견일본사에 소속된 승려로 생년이나 경력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견일본사에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인정은 제17회 견일본사 녹사(錄事)라는 지위로 일본을 방문했다. 녹사란 견일본사의 구성에서 대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다음의 높은 직위로 역어(譯語)나 사생(史生) 등의 수행원과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사절 간부다. 승려가 공식적인 직위에 오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당시 일류 지성인이었던 승려들은 한문 서적에 통달했으며 고금 사례에도 정통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에서도 외교고문으로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분은 어디까지나 승려였기 때문에 승관이라는 불교 통제 기관의 관직에 오르는 일은 있어도 속계인 조정의 정규관직에 오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왕효렴(王孝廉)이 대사로 참여한 사절단의 간부로 일본의 수도에 입경한 인정은 정월 조하(朝賀)에 참석하여 위계를 수여받았다. 인정은 이때 종5품을 수여받고 비단제품 등 봉록을 지급받았다. 인정은 정월 7일 연회에도 참석하여 여러 사람들과 시담을 나누었는데, 인정의 시가 일본왕의 칙명으로 편찬된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818년경 편찬)에 실리기도 하였다.


815년 정월 22일, 견일본사는 사가천황이 발해의 희왕 대언의에게 전하는 국서를 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귀국길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이즈모(出雲)에서 출항한 일행은 도중에 만난 역풍으로 조난당해 에치젠(越前)으로 흘러갔고 배도 대파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사실이 일본 조정에 전해진 것은 5월로 에치젠국(越前國)에 귀국용 배를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6월에 대사 왕효렴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사가천황은 즉시 애도의 조서를 발표하고 정3품을 추증했다. 배가 새로 만들어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고, 이후로 출항하기에 적당한 바람이 불지 않아 다음 해인 817년 5월까지 귀국이 연장되었다. 그 사이 판관 왕승기와 인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정이 사망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문화수려집’에 있는 사카우에이마오(坂上今雄)의 시로 볼 때 816년 가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秋風, 寄渤海入朝高判官釋錄事一首 坂上今雄

 

大海途難 孤舟未得廻
不如關雁 春去復秋來

 

추풍 속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발해 판관 고영선과 녹사 인정에게 바치는 시 한 수 - 사카우에이마오

 

대해(동해)를 횡단하는 바닷길은 좀처럼 건너기 어려운 까닭에 한 척의 배(견일본사의 배를 지칭하는 것으로 9세기 견일본사는 대형선 한 척으로 건넜다.)는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중(關中) 농서(西)지방(중국 장안에서 감숙성에 이르는 지역)의 기러기들이 하늘로 쉽게 대해를 넘어 봄에 가서 가을에 돌아오는 것과 같을 수는 없나봅니다. (지금 기러기 소리를 들으니 견일본사 일행이 더 생각나고 몹시 딱해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이들의 죽음은 이들과 가깝게 지낸 일본 문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7회 견일본사가 다시 귀국길에 오를 때 사가천황은 발해왕에게 전하는 국서에 왕효렴과 인정 등의 사망과 그 사정을 언급하고, ‘심이창연(甚以愴然)’(이 일을 몹시도 마음속 깊이 애처롭게 생각합니다.)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임석규 실장

사절 중 한시의 즐거움을 나눈 이는 왕효렴과 인정 외에도 여럿이 있었지만, 일본왕의 칙명으로 편찬된 한시집 ‘문화수려집’에 외국인의 시가 실린 경우는 왕효렴과 인정뿐이다. 이는 그들의 시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본 문인들의 마음이 각별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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