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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설봉산 영월암

미륵의 자비, 칠흑 밤 하늘 위 달빛처럼 천개의 무명을 비추다

중건한 스님 법호를 따 명명
이천시 굽어보는 마애미륵불
나옹 스님과 얽힌 설화 유명
어머니 천도 49일 지장기도
꽂아 뒀던 지팡이는 고목 돼

 

 

▲이천의 진산, 설봉산 초목들 사이로 마애불이다.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주는 시무외인 수인을 하고 있다. 넓적하고 큰 코와 두툼한 입술에 웃음부터 어린다. 웃음은 잡다한 근심을 몰아냈다. 쓸데없는 근심으로 먹구름 낀 우리네 마음 사이로 신심 한 줄기 얼굴 내민다.

 


이천의 진산, 설봉산은 가파른 만큼 속이 깊었다. 영월암으로 안내하는 야트막한 기와돌담은 이끼를 키워내고 있었고, 전화기 없는 공중전화박스는 세간출세간 인연을 잇던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낮은 기와돌담 끝에 덩그러니 자리한 공중전화박스엔 전화기가 보이지 않았다. 짝 잃은 낡은 전화번호부만 먼지를 뒤집어썼다. 쌓인 먼지 두께만큼 외로움도 짙었으리라. 외로움의 농도는 멀어진 세간과 출세간의 거리였다. 그래서 영월암엔 일주문이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일주문 대신 600년 넘게 영월암 입구에 그늘 드리운 은행나무가 반긴다. 나옹 혜근 스님이 꽂았다는 지팡이다. 그 지팡이는 수백년 지나 바위틈 뚫고 한 뿌리에서 두 줄기의 은행나무를 하늘로 뻗어 올렸다.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 말사 영월암(주지 보문 스님) 초입, 설봉산 깊은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꿈틀댔다.


공중전화박스를 막 지나면 종각과 안심당, 대웅전, 아미타전이 마중이다. 안심당, 대웅전, 아미타전이 ‘ㄷ’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로 오밀조밀 모여 앉았다. 마침 사중스님들은 기도 중이었다. 주지스님까지 대웅전 뒤 ‘영월암석조광배 및 연화좌대(향토유적 제3호)’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삼성각 옆 텃밭에 천불전을 짓고 그곳에 석조광배와 연화좌대, 부처님을 옮기기 위해 올리는 기도였다. 취재를 의뢰할 때 기도 끝나고 오라던 말씀을 그제야 이해했다. 점심을 공양해주던 신도들은 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스님’이란다.

 

 

▲석조광배와 연화좌대다. 불상 없이 외롭게 지내다 1980년 조성된 불상이 안치됐다.

 


영월암은 분주했다. 백중 49일 지장기도 회향이 바로 다음날인 탓에 사중스님들과 신도들 모두 음식을 준비하고 14폭짜리 금강경 병풍에 마른걸레질을 했다. 구름에 달 가듯 조용히 영월암을 참배했다. 대웅전을 들러 삼배 합장하고, 대웅전 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랐다. 도량 곳곳엔 새나 다람쥐 등 설봉산에 깃든 생명붙이들을 위한 견과류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영월암 마음씀씀이가 따듯했다. 합장이다.


처음 영월암과 마주했을 때 대웅전 뒤 저 멀리 심상치 않던 큰 바위를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보물 제822호)’이었다. 안내푯말에는 자연 암석을 다듬어 머리와 두 손만 얕게 조각했고 옷 주름 등은 선으로 새긴 입상이라고 적혔다. 높이만 9.6m에 이른단다.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이 나란히 앉아 향을 공양했다. 내리쬐는 여름 볕도 아랑곳 않고 두 눈 감고 한참 쭈그려 앉아 있더니 이내 자리를 떠났다. 참배하려는 요량으로 신발을 벗었다. 달궈진 돌이 설익은 신심에 화끈한 경책을 가했다. 삼배를 올렸다. 앉아서 올려다보니 마애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이리라. 사람과 사람, 너무 가까우면 허물이 보이지 않는다. 진짜 모습을 볼 수 없다. 너무 가까우면 빗나간 애정이 집착으로 변한다. ‘너’는 사라지고 오로지 ‘나’만 남는다. 그래서다. 마애불과 멀리 떨어져 다시 올려다봤다.


설봉산 초목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마애불이다. 이천 시내를 굽어 살피고 있었다. 가까울 땐 나한상이나 조사상 같더니 그렇지 않았다. 파르라니 머리카락 깎은 것처럼 보이던 머리 위엔 부처님 정수리의 상투처럼 솟아오른,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어렴풋이 보였다. 얼굴은 둥글었고 눈, 코, 입이 크고 뚜렷했다. 목에는 번뇌와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가 있고 가슴에 모인 두 손은 시무외인 수인을 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 중생심은 염불보다 잿밥인가. 넓적하고 큰 코와 두툼한 입술에 웃음부터 어린다. 웃음은 잡다한 근심을 쫓았다. 쓸데없는 근심으로 먹구름 낀 우리네 마음 사이로 신심 한 줄기 얼굴 내민다.


삼성각은 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앉아 있었다. 대웅전 아래서 올려다본 삼성각은 기막힌 장면을 연출했다. 대웅전 부처님이 키웠을까. 기와지붕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랐고, 시선이 푸르른 초목들 사이로 난 돌계단을 따라가면 이윽고 삼성각에 가 닿았다. 마애불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삼성각으로 향했다. 나한상이 없었다. 삼성각 뒤 큰 바위에 나한석상이 있었고 삼성각 유리벽을 통해서만 친견할 수 있었다. 삼성각 아래 오밀조밀 모여 앉은 안심당, 대웅전, 아미타전, 종각이 정겨웠다. 멀리 이천 시내와 설봉호수는 손에 잡힐 듯했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에 삼성각이 자리했다. 삼성각 유리벽 뒤로 석조나한상이 있다.

 


8월말, 그들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해서일까. 산사에 짝을 찾는 매미울음소리가 가득했다. 다음 생으로 시간을 이어가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절절했다. 설봉산을 가득 메운 매미울음처럼 우리네 마음속도 간절한 염원으로 그득할까.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은 주지스님이 건네는 차 한 잔으로 달랬다. 주지스님은 열 살에 영월암으로 입산했단다. 설봉산 깊은 속, 그곳에 자리한 영월암에서 잠자던 이야기가 막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영월암(暎月庵)은 이름부터 빼어났다. 달빛이 비추는 암자. 본래 ‘북악사’란 이름으로 문헌상에 기록된 고찰이다. 중건기에 따르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나 뒷받침할 문헌은 전해지지 않는단다. 여러 학자들 주장에 의하면 북악사가 영월암이란 이름을 가진 사연은 이렇다. 조선후기 1774년 영월 낭규 스님이 중건했고, 1899년 간행된 ‘이천부읍지’ 등 사료를 살필 때 영월 보은 스님이 낭규 스님의 법호를 사용해 1911년 영월암으로 개명했다.


마애여래입상은 설명과 달리 나한상이나 조사상이 아니랬다.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과 한국미술사연구소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미륵불이었다. ‘관불삼매해경’에 따르면 거구의 불상이 6m이상일 때 미륵불로 간주한단다. ‘관불삼매해경’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장육불상(4.75m 내외)이며, 미륵불은 16장(丈)불상(47.5m 내외)라는 것이다. 5.6m 이상은 미륵불로 봐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특히 고려시대 조사상을 크게 돌에 새긴 경우는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경주 남산 탑곡의 삼국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상 가운데 나무 아래 선정에 든 스님의 모습이 있단다.


왜일까. 영월암은 지장기도도량이었다. 주지스님이 연유를 설명했다. 일주문 대신 영월암 입구를 지키고 섰던 은행나무의 600년 신비는 여기서 옷고름을 풀었다.

 

 

▲낮은 기와돌담, 텅 빈 전화부스가 영월암으로 안내한다. 고목 두 그루가 일주문.

 


‘기이하도다.’

 

나옹 혜근 스님(1320~1376)은 양주 회암사서 설법을 마치고 북악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설봉산 기슭에 난데없이 곡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생을 하직한 모양이었다. 구슬픈 곡소리는 필시 한 많은 사람이 세연을 접었을 터였다. 영가에게 법문 한 자락이라도 들려주고 싶었다. 상여행렬과 마주한 스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여도 없고 관은 지게 위에 있었다. 상주도 없이 늙수그레한 노인이 요령을 흔들며 상엿소리를 구슬프게 메겼고, 두 명의 장정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따랐다. 마지막 길이 너무도 초라했다. 장정 뒤를 따르던 스님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누가 떠나길래 이렇게 상여행렬이 초라하단 말이오?” “아랫마을에 살았던 돌이 어멈인데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 사람이 갑자기….” 사연인 즉, 어린 자식을 잃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어미가 앞서 간 자식을 따라간 것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은 나직이 염불했다.


문득, 스님은 출가 전 자신이 고뇌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스무 살 때였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스님은 비통에 젖었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수없이 현자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하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이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그 길로 공덕산 요연 스님을 찾았다. 단박에 법기가 큰 사람임을 알아본 요연 스님은 다른 스님을 추천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나옹 스님은 4년을 밤낮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한 끝에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아직 멀었다. 더 큰 깨달음을 찾아 중국으로 떠나자.’ 1347년 나옹 스님은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 스님을 만나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그대로 체득했다. 2년 뒤 평산 처림에게 법의와 불자를 받고 사방을 돌아다니던 나옹 스님은 어느 날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애틋한 정이 솟았지만 출가사문의 본분을 지키고자 타국에서 왕생극락을 빌 뿐이었다.


불효였다. 나옹 스님이 선정에 들어 살피자 어머니는 무주고혼이 돼 중음신으로 떠돌고 있었다. 스님은 신음했다. ‘혹여 아들 모습도 못보고 눈을 감아 한이 골수에 맺힌 게 아닐까.’ 나옹 스님은 돌이 어멈일로 비로소 어머니를 떠올린 자신이 못마땅했다. 지옥의 고통에 허덕이던 어머니를 구했던 목련존자를 생각했다. 스님은 어머니를 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천도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옥 중생이 성불하지 않으면 자신도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명호를 목이 갈라지도록 부르짖었다. 49일째 되던 날, 스님은 철야정진에 들어갔다. 새벽녘, 동 트기 전 마애여래입상이 빛을 발했다. 눈부신 방광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극락에 왕생해 계셨다.


영월암 입구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은행나무는 나옹 스님이 떠나기 직전에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나옹 스님 얘기를 전한 영월암 주지스님은 “기도는 본래 품성인 불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일렀다. 탐욕과 괴로움에 갇혀 사는 우리네 일상에서 기도는 불성을 깨우는 간절한 행위라고 했다. 스스로가 본래품성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기도라는 말씀이었다. 영월암이 하안거나 동안거 동안 100일 간 불성을 찾아가는 기도를 올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했다. 가피는 덤이랬다. 지금도 절에 와서 봉사하는 원광 거사가 100일간 매일 마을에서 영월암까지 올라 마애불 앞에 기도해 암을 고쳤다고 했다. 기도의 본질은 암을 고친 게 아니었다. 영월암 봉사로 여생을 살아가는 그의 삶이 가피랬다.


작은 찻잔 속 찻물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031)635-3457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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