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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전 영부인 육영수

정치적 이해관계 뛰어넘어 국민적 사랑 받았던 자비 보살

박정희 전대통령의 영부인
양지회 설립해 보살행 펼쳐
매일 수십건 도움 요청 받아


깊은 불심이 자비행 원천
도선사 청담 스님께 수계
“남 위한 삶 살겠다” 발원

 

 

▲1973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 참석자들과 기념촬영.                    국가기록원 제공

 


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 날카로운 한발의 총성이 광복 29년 기념식이 열리던 국립극장 강당을 강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연설 중이었다. 단발마 총성에 경호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관중 속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더니 단상을 향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연설하던 박 전 대통령은 황급히 단상 아래로 몸을 숨겼고 경호원들이 단상을 막아서며 갑작스레 등장한 괴한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총소리가 뒤섞여 현장은 눈 깜짝할 새 아수라장이 됐다. 날뛰던 괴한은 얼마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에 의해 포박됐고 그렇게 사태도 진정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몸이 의자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조금 전까지 남편을 향해 박수를 보내던 그녀였다. 괴한이 쏜 총탄이 육 여사의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10시 20분, 그녀가 실려나간 뒤 덩그러니 남겨진 의자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다. 부지불식간에 발생한 끔찍한 사태에 아무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단상 뒤에 숨어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신을 차리고 아내가 남긴 신발과 소지품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육 여사는 곧장 서울대 의과대병원으로 이송됐다. 총탄이 왼쪽 뇌 정맥을 뚫어 출혈이 심했고 여전히 의식은 없었다. 숨가쁜 응급 조치가 이어졌다. 의료진은 육 여사를 수술실로 옮기고 장장 6시간에 달하는 뇌수술을 집도했다. 수술은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병원 앞은 육영수 여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신문사와 방송국마다 육 여사의 상태를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국민들의 걱정이 하늘을 치솟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내의 상태를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도록 지시했다.


저녁 7시 무렵, 애타는 국민들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육영수 여사는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연을 접었다. 그녀가 숨을 거두는 순간 핏빛 노을이 하늘을 덮었으며, 육 여사의 유해가 청와대로 떠날 때에는 세찬 소나기가 내렸다고 전한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온 거리에 충격과 비통함이 넘실댔던 것만은 분명하다.


국민들은 경악과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전국 각지에서 애도의 물결을 이어갔다.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육 여사의 유해가 안치된 청와대 빈소에는 3일간 30만명이 조객들이 분향했고, 전국 각 시도에 차려진 44개소의 빈소에는 90여만명의 시민이 찾아와 애도했다. 빈소마다 문상행렬이 1km 이상 이어졌다고 전한다. 이 기간 KBS 해외부에 접수된 애도 편지만도 무려 1262통에 달했다. 육 여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물결은 1년 뒤에도 이어졌다. 1975년 조선일보에 따르면 동작동 국림묘지 육 여사의 묘소에는 1년간 450만 6000여명의 참배객이 다녀갔는데, 이는 하루 1만 2300명에 달하는 숫자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으로 인한 이 같은 범국민적 추모 물결은 다소 놀라운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독재로 청와대를 향한 국민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박정희 전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될 정도니, 당시 국민들이 육 여사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70년 청와대를 방문한 세계 불교지도자들을 맞이하는 육영수 여사.

 


독재자의 아내 육영수 여사. 그녀에게 주어진 이상스러울 만큼 과분한 국민적 사랑의 이면에는 바로 진심어린 보살행이 있었다.


“육영수 여사는 이 땅의 어린이들을 친자녀처럼 사랑하고 외롭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두메산골과 나환자촌도 가리지 않고 몸소 찾아가 위로와 도움을 잊지 않았다. 그늘에 사는 사람들의 친근한 벗이요 협조자였던 육 여사는 하루 쉬는 일도 없이 그들을 보살피는데 온 정성과 노고를 쏟아왔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가교와 같은 소임을 맡아 국민들의 답답한 사정과 어려운 일에 노심초사하고, 전심전력을 나라와 겨레위한 사랑에 쏟아온 육영수 여사였다.”(동아일보)


어둡고 소외된 곳을 찾아 보듬는 그녀의 진심어린 보살행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봉사했고 또 가진 것을 나눴다. 장·차관 및 재벌 부인들을 모아 자선단체 양지회를 설립,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나눔행에 나섰으며 전국 77개소의 나환자촌에 도움의 손길을 건냈다. 신문을 읽다가도 안타까운 사연을 발견하면 즉시 도움이 될 만한 물품과 돈을 챙겨들고 현관을 나섰다. 양로원과 고아원, 직업훈련원 등 한번 인연을 맺은 곳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뜰하게 챙겼으며,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육 여사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청와대로 찾아드는 민원은 하루에도 수십통에 달했다. 그녀는 한 건의 민원도 허투루 읽지 않았다. 답장을 써야 할 것과 해결이 필요한 것, 해결이 어려운 것 세 종류로 분류해 반드시 이에 대한 후속조치가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육 여사는 민원편지를 처리하기 위해 하루 2시간씩 꼬박 서재에 머물러야 했다. 민원편지는 말 그대로 국민과의 대화였으며, 청와대를 국민 가까이 머무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국민들의 생각을 남편에게 전달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세상의 차별적 기준을 뛰어 넘어 모든 이를 존중하는 육영수 여사의 이 같은 심성은 바로 불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익히 알려진 대로 불심이 깊었고, 훗날 조계종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을 스승으로 따랐다. 1960년대 청담 스님과의 일화가 전한다. 당시 청담 스님이 머물던 서울 도선사 진입로는 도로가 나지 않은 가파른 비탈길이었는데 어느 날 육영수 여사가 수행원도 없이 불쑥 도선사를 찾았다. 그리고 7일간 석불전에서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고 청담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날 청담 스님은 그녀에게 ‘대덕화’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대덕화 보살은 이제부터라도 보살행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스님, 보살행은 어떻게 닦아야 할런지요.”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보살이고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이며 또 남을 살리는 것이 보살이다. 남을 위해 살면 보살이요, 자기를 위해 살면 중생인 것이다.”

 

▲봉사활동 중인 육영수 여사.

보살행을 남달리 강조했던 청담 스님의 가르침 덕분일까. 육영수 여사는 한평생 남을 위한 보살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또 바쁜 일정 탓에 꾸준하진 못했지만 틈틈이 경전을 읽거나 기도를 하며 부처님 말씀을 되새겼고 생일 등 특별한 날이면 큰스님을 초청해 법회를 열기도 했다. 가끔은 보은 법주사나 서울 도선사, 김천 직지사 등 인연 있는 사찰을 찾아 참배하고 기도하며 지친 마음을 내려놓기도 했으리라. 몇몇 사찰의 불사를 이끈 기록도 전해진다. 육 여사의 불사로 지금의 도선사 진입로가 다져졌으며 법주사 금동미륵삼존불 조성불사나 승가사 불사에도 화주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육 여사는 삶에 있어 가장 힘든 순간에도 사찰을 찾았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체제 발표와 함께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이후에는, 여러모로 고민을 안고 종종 도선사를 찾아 참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 언론을 중심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한 반발이 고조됐으며, 독재 타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육 여사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권력의 무상함과 부질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그녀는 남편이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청와대를 떠나길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어쩌면 바로 지금이 청와대를 떠나야 할 때임을 직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양지바른 언덕의 조그만 집에서 마음 평화롭게 가족과 오순도순 모여살고 싶다”던 그녀는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영부인의 마지막은 슬프고 갑작스러웠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2월25일. 대한민국 여성 첫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육영수 여사의 딸 박근혜였다. 그녀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으로 무려 5차례 대통령직을 연임, 부하의 총에 목숨을 잃는 날까지 권력을 버리지 않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기도 하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대해 일각에서는 유신의 망령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했으며 외신들도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함축적 표현을 담아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앞 다퉈 보도했다.


현재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국민들의 정서는 극명하게 갈린다. 무엇보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독단의 꼬리표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숨쉬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동시에 그녀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단정한 올림머리에서, 과거 국민들을 따스히  품었던 육 여사의 향수를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둡고 소외된 곳을 찾아 보듬는 육 여사의 진심어린 보살행이 이미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돼 있기 때문이리라.


정치적 이념과 가치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육영수 여사. 그녀가 머금었던 지혜와 자비의 향기가 딸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전해지길 기대하는 것은 많은 국민들의 바람이리라.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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