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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김복진, 도쿄미술학교 입학

기자명 법보신문

근대 불교조각 새로운 영역 개척한 불모

1920년 9월 22일 조각 입문
최초 조소작가·미술평론가
금산사본존불 등 다수 남겨
39세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김복진
정관 김복진(1901~1940)은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다진 선구적인 미술작가이자 근대기 불상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연 불모(佛母)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근대기 최초의 조소작가이자 미술비평가, 문예운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을 비롯해 예산 정혜사 관음전 관음보살좌상 등 수많은 불상을 조성해 근대 불교조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또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구속돼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유증으로 불면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겪었고, 늦은 나이에 얻은 딸마저 병으로 잃고 그 충격으로 자신도 요절하는 등 비운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충북 청원에서 대지주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20년 9월22일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소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사실 그가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은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해 6월 우연히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일본미술원 전시회에서 출품작 ‘노자’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조소를 공부하겠다는 발원을 세웠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1887년 개교해 1949년 도쿄예술대학 설치로 폐교될 때까지 58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일본 최고의 미술학교였다. 특히 이 학교에는 조선, 중국, 대만은 물론 서구의 학생들도 유학을 올 정도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 김복진은 불상조각의 최고 권위자였던 다카무라 고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예술적 재능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인 유학생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김복진에게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늘 혼자였고, 일본인들의 차별은 극심했다.


이런 그에게 그나마 위안을 준 것은 불교였다. 춘원 이광수에 따르면 김복진은 유학시절 불교에 귀의해 짧은 기간 일본의 한 사찰에서 수행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은 그가 훗날 불상조성에 열정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1925년 3월 도쿄미술학교 졸업과 함께 국내로 돌아온 그는 잠시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서울 효자동에 위치한 야학 ‘고학당’의 교사로도 활동했다. 당시 고학당은 조선공산당 계열에서 운영하던 곳으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중학교 과정의 교육시설이었다. 김복진이 사회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그해 8월 김기진, 박영희 등과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또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아 훗날 한국전쟁 당시 최후의 남부군으로 알려진 이현상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2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5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긴 감옥생활은 오히려 그를 좌파적 문예운동가에서 불교를 비롯해 전통예술에 대한 개안과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옥중에서도 다수의 목조 불상을 조각했으며 불교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안목을 넓혀 나갔다. 그에게 있어 전통문화와 불교에 대한 재인식은 민족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멸실되어가는 식민지 시대에 제국주의와 맞설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자 일종의 자기 정체성 확인을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가 출옥 이후 주로 불상 조성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1930년 목조 ‘관음상’을 시작으로 1935년 ‘계룡산 소림원 ‘미륵불 입상’, 1936년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 1939년 ‘예산 정혜사 관음전 관음보살좌상’ 등 수많은 불상을 남겼으며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청주 법주사 미륵대불도 그에 의해 시작된 불상이었다.


그러나 김복진은 1940년 고문의 후유증과 어른 딸을 잃은 충격으로 39세의 일기로 요절했다. 한국근대미술사의 새 지평을 열었던 김복진. 이런 그의 업적에도 사회주의 활동 경력과 제자들의 월북 등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오랜 세월 박했다. 냉전의 산물인 이념논쟁으로 한국근대사의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의 삶을 송두리째 매장하는 것은 우리시대 또 다른 비극이 아닐까.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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