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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부는데 누가 이 소리를 알겠는가

기자명 법보신문

황벽 가르침 알아들을 이가
과연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하늘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임제의 답은 자신감의 발로
거칠 것 없는 경지 드러내
 

 

 

▲광효사는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도량이다. 중국 최초의 보리수와 의발탑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師行脚時에 到龍光하니 光이 上堂이라 師出問 不展鋒鋩하고 如何得勝고 光이 據坐한대 師云, 大善知識이 豈無方便고 光이 瞪目云, 嗄하니 師以手指云, 這老漢이 今日敗闕也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행각할 때 용광 스님이 계시는 곳에 갔다. 용광 스님이 마침 법당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데 임제 스님이 물었다. “칼을 뽑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용광 스님이 자세를 고쳐 앉자 임제 스님이 말했다. “대선지식이 어찌 방편이 없으십니까?” 용광 스님이 똑바로 뜨고 보면서 “사!”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늙은이, 오늘은 나에게 졌습니다.”

 

강의)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 곁을 떠나 제방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스님들이기 때문에 어떤 스님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스님들이 있습니다. 용광 스님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상당히 뛰어난 스님으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던 선지식이었을 겁니다. 임제 스님은 마치 무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합을 벌이듯 뛰어난 스님들을 찾아가 법거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용광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는데 임제 스님이 바로 질문을 던집니다. 칼을 뽑지 않고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느냐는 것인데, 말을 하지 않고 불법의 대의를 설명해 보라는 뜻일 겁니다. 이 말을 못 알아들었을 용광 스님이 아닙니다. 바로 자세를 바로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임제 스님을 압도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슬쩍 미끼를 하나 던집니다. 대선지식이라는 분이 왜 중생을 제도할 방편 하나가 없느냐는 것이지요. 중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용광 스님은 ‘사’하며 칼로 베는 듯한 소리를 냅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말합니다. “당신은 오늘 나에게 졌습니다.” 칼집에서 칼을 빼지 말라고 했는데, 칼을 빼어버린 셈입니다. 침묵에서 이탈해 말을 해버렸으니 이미 승부가 나 버린 것입니다.

 

到三峯하니 平和尙이 問 什麽處來오 師云, 黃檗來니라 平云, 黃檗이 有何言句오 師云, 金牛昨夜에 遭塗炭하야 直至如今不見蹤이로다 平이 云, 金風이 吹玉管하니 那箇是知音고 師云, 直透萬重關하야 不住淸소內로다 平云, 子這一問이 太高生이로다 師云, 龍生金鳳子하야 衝破碧瑠璃로다 平云, 且坐喫茶하라 又問, 近離甚處오 師云, 龍光이니라 平이 云, 龍光이 近日如何오 師便出去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삼봉에 갔을 때 평화상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황벽 스님에게서 왔습니다.” 평화상이 물었다. “황벽 스님은 어떤 가르침을 내리는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황금으로 만든 소가 지난밤에 용광로에 빠져 아직까지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평화상이 말했다.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부는데 누가 이 소리를 알겠는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바로 만 겹의 관문을 통과해서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평화상이 말했다. “그대의 한마디 물음이 매우 높구나.” 임제 스님이 말했다. “용이 황금빛 봉황의 새끼를 낳으니 푸른 유리 빛 하늘을 뚫고 날아갑니다.” 평화상이 말했다. “자, 앉아서 차나 들게.” 평화상이 또 물었다. “요즘은 어디를 다녀왔는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용광 스님에게 다녀왔습니다. 그러자 평화상이 물었다. “용광 스님의 근황은 어떠한가?” 임제 스님이 곧바로 나가버렸다.

 

강의) 임제 스님이 이번에는 삼봉에 있는 평화상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인 황벽 스님은 무슨 가르침을 내리느냐는 평화상의 질문에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의 가르침을 시로 답을 합니다. 황금으로 만든 소가 지난밤에 용광로에 빠져 아직까지 자취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은 황벽 스님의 불법은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결코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한 평화상의 다음 질문이 아름답습니다.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부는데 누가 이 소리를 알겠는가?” 그렇다면 황벽 스님의 그 곱고 청아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에 임제 스님은 모든 관문을 뚫고 하늘까지 올라갔지만 그 하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소리를 알아듣는 것을 넘어 황벽 스님의 그림자마저도 벗어났다는 자신감의 발로입니다. 스스로를 봉황의 새끼로 비유하면서 거칠 것이 없는 활달한 경지를 드러냅니다. 임제 스님이 평화상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차나 한잔 들라는 말 속에 평화상의 흡족해 하는 마음이 읽힙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쳤는지 갑자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어디를 들렸는지, 그 인물은 어떠한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묻습니다. 가만히 앉아있을 임제 스님이 아닙니다. 용광 스님의 근황을 물어보는 질문에 그냥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립니다. 용광 스님의 경지가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굳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到大慈하니 慈在方丈內坐어늘 師問, 端居丈室時如何오 慈云, 寒松一色은 千年別이요 野老拈花萬國春이로다 師云, 今古永超圓智體여 三山이 銷斷萬重關이로다 慈便喝한대 師亦喝하니 慈云, 作麽오 師拂袖便去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대자 스님이 계신 곳에 갔을 때, 대자 스님이 방장실에 앉아 있었다. 임제 스님이 물었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계실 때의 경지는 어떤 것입니까?” 대자 스님이 대답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른빛이 한결같아서 천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푸르건만 들녘의 노인들이 꽃을 꺾어 드니 온 세상이 봄이로구나.” 임제 스님이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대원경지의 체성을 초월했고 삼산(三山)은 만 겹의 관문으로 꽉 막혀버렸다.” 그러자 대자 스님이 대뜸 “할”하고 고함을 질렀다. 임제 스님도 이에 “할”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자 스님이 물었다. “어떠한가?” 그러자 임제 스님이 소매를 떨치며 나가버렸다.

 

강의) 대자환중(大慈中, 780~862) 스님은 백장 스님의 제자로 절강성에 있는 대자산에 주석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임제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는 대자 스님에게 방장실에 앉아 계실 때의 경지는 어떤 것이냐고 묻습니다. 방장은 유마 거사의 작은 방에 3만2000명의 대중이 함께 문병을 갔지만 장소가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에 유래한 것으로 대자 스님이 유마 거사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자 스님은 시로 대답합니다. “깨달음의 본체는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지나도 항상 푸르른 소나무처럼 변함이 없지만 계절의 변화에 상응해 작용하는 것 또한 걸림이 없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도 시로 대답합니다. “진여, 또는 법신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있고, 만 겹의 관문으로 꽉 막혀있어 쉽게 이를 수 없다.” 여기서 원지체(圓智體)는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말하는데 바로 진여, 법신, 깊은 깨달음 등을 말합니다. 또 삼산은 도가에서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말하는데 대원경지와 같은 말입니다.


두 스님의 대화를 아직은 젊은 혈기를 지닌 임제 스님과 원숙의 경지에 이른 대자 스님의 문답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두 스님의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임제 스님은 대자 스님의 대답에 만족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자 스님은 푸른 소나무에 자신의 경지를 비유했지만 임제 스님은 이를 바로 맞받아칩니다. 소나무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계절의 변화에 걸림이 없는 정도로 어찌 깨달음을 얻었다 할 수 있느냐는 반문입니다. 진여의 세계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있고 만 겹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기만한데, 그 정도로 깨달았다 할 수 있겠느냐는 핀잔으로도 보입니다. 아마 대자 스님도 머쓱했을 겁니다. 이를 만회하려는 듯 대자 스님이 뒤늦게 ‘할’하고 고함을 칩니다. 이에 임제 스님도 고함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대자 스님은 안심이 안됐는지 이것으로 대답이 됐는지 다시 묻고 있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을 겁니다. 임제 스님으로서는 당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到襄州華嚴하니 嚴이 倚拄杖하야 作睡勢어늘 師云, 老和尙이 瞌睡作麽오 嚴이 云, 作家禪客이 宛爾不同이로다 師云, 侍者야 點茶來하야 與和尙喫하라 嚴이 乃喚維那호되 第三位에 安排這上座하라

 

해석) 임제 스님이 양주의 화엄 스님에게 갔다. 화엄 스님이 주장자에 기대어 조는 시늉을 했다. 임제 스님이 물었다. “노스님께서 졸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화엄 스님이 말했다. “역시 훌륭한 선객은 다르구나.” 임제 스님이 말했다. “시자 스님. 차를 한잔 가져와 큰스님께 드리세요.” 이에 화엄 스님이 유나를 불러 말했다. “이 스님을 셋째 자리에 앉히도록 해라.”

 

강의) 화엄 스님이라는 분은 누구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꽤 뛰어난 스님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화엄 스님이 임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조는 시늉을 합니다. 임제 스님이 어떻게 나오나 시험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모를 임제 스님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조는 시늉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임제 스님은 이렇게 졸아서 되겠냐고 핀잔을 줍니다. 당신은 조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깨어있지 못하다는 뜻일 겁니다. 보여주는 모습에 걸려들지 않고 본질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화엄 스님이 슬쩍 칭찬하는 것으로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 걸려들 임제 스님이 아닙니다. 시자 스님에게 화엄 스님의 잠을 깨우기 위해 차를 한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차나 한잔 마시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례한 말이긴 한데, 선종에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화엄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학인들을 지도하는 자리를 내 놓은 것을 보면 화엄 스님의 경지 또한 예사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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