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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윤두서, ‘진단타려도’

기자명 법보신문

전법의 길 떠나는 60아라한…“이제 천하가 안정되리라”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로 이루어진 불교 교단이 형성되었으니 신자가 빠질 수 없다.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을 베푸시던 때였다. 바라나시에는 야사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호화스런 나날을 보냈다. 계절에 따라 번갈아가면서 지낼 수 있는 별장을 세 채나 가지고 있었는데 우기와 건기 때는 별장에서 나오지 않고 여자 악사들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애욕에 빠져 살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야사가 새벽에 눈을 떠보니 시녀들이 아무데나 쓰러져 잠에 취해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야사를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술시중을 들던 시녀들이었다. 일어서려다가 무심코 시녀들을 본 야사는 경악했다. 어젯밤에는 그리도 아리따웠던 여인들이 아침에 보니 귀신같았다. 화장도 지우지 않은 얼굴에 침을 질질 흘리는가하면 머리는 산발하고 옷매무새는 흐트러진 채였다. 모두들 술에 취해 그대로 잠에 빠진 듯했다. 비파와 북을 내동댕이친 채 여기저기 뒤엉켜 곯아떨어져 있었다. 시체더미 같은 여인들의 모습을 본 야사는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

 

우연히 부처님을 만난 야사

 

우울해진 야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집을 나왔다. 정처 없이 걷다보니 부처님이 계신 녹야원이었다. 마침 그때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하고 계시던 부처님이 야사를 발견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탄식하는 야사를 보고 부처님이 말을 걸었다.


“젊은이여, 여기에는 괴로운 것도 없고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이리 와서 앉으라. 그대를 위해 내가 진리를 말해 주겠다.”  


야사는 황금으로 만든 신발을 벗고 부처님께 예를 올린 뒤 자리에 앉았다. 부처님은 야사를 위해 진리를 말씀하셨다. 원래 총명했던 야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금세 깨달음을 얻었다. 야사는 그 자리에서 출가했다. 야사를 찾으러 온 야사의 아버지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환희심을 얻었다. 그 자리에서 재가신자가 되어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했다. 그 이튿날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과 야사를 그의 저택으로 초대해 설법을 듣고 공양을 올렸다.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도 곧 삼보에 귀의해 최초의 여성 신자가 되었다.


야사의 출가는 바라나시의 상류 가정 자제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야사가 출가하기 전에 사귀었던 친한 친구 네 명은 야사가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부처님께 법문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역시 정식으로 출가했다. 그 뒤를 이어 다시 50명의 젊은이들이 집단으로 출가해 깨달음을 얻어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을 포함해 모두 61명의 아라한이 탄생했다. 제자들이 60명으로 늘어나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나와 그대들은 신과 인간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이제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과 신들의 이익을 위해, 안락을 위해, 세상에 자비를 베풀기 위해 먼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마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 내용과 이론이 갖추어진 진리를 말하라. 안전하고 깨끗한 수행 생활을 보여주어라. 세상에는 때가 덜 묻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한다면 퇴보하겠지만 진리를 듣는다면 깨우칠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사방으로 보내 법을 전하게 했다. 부처님도 바라나시를 떠나 마가다국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길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아 있을 때였다. 서른 명의 상류층 청년들이 모두 아내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독신자로 기생을 데려왔던 모양이다. 모두들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기생이 패물을 훔쳐 도망가 버렸다.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안 청년들이 기녀를 찾기 위해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이 앉아 계신 곳까지 왔다. 청년들은 부처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한 다음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청년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물론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와서 앉으라. 그대들에게 진리를 말하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 내게도 유용한가. 내가 찾고 있는 것 중 어떤 것이 중요한가. 서른 명의 청년들은 부처님 앞에 앉아 설법을 들은 후 모두 그 자리에서 출가했다. 부처님의 새로운 교단은 점점 더 커졌다.

 

 

▲이인상, ‘송하수업도’, 종이에 연한 색, 28.7×27.5cm, 개인

 

 

스승과 제자


국화꽃이 핀 걸 보니 가을이다. 소나무를 휘감은 덩굴 잎도 군데군데 갈색을 띤다. 소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아직은 햇볕이 따가운 초가을인 것 같다. 날이 추웠더라면 그늘 밖으로 나와 해바라기를 했으리라. 무엇을 해도 좋을 만큼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날, 스승과 제자가 바위 앞에 앉아 공부를 한다. 사방관을 쓴 스승님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책에 적힌 성현의 말씀을 강의하는 중이고, 고개를 수그린 제자는 종이를 펼쳐놓고 뭔가를 적을 심산이다. 종이 옆에는 먹과 벼루, 연적이 놓여 있고, 방금 전에 바위 곁에서 꺾은 국화꽃도 곁들였다. 스승님 앞에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주황색 호박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다. 강의하다 목이 마르면 차 한 잔 마시며 목을 축인 후 스승의 강의는 계속될 것이다. 격렬했던 번뇌의 시간과 결별하고 속살이 여물어지는 계절 가을. 스승의 강의는 껍데기는 날려버리고 알곡만 건져낸 가을 추수 같은 지혜로 가득하리라.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이 그린 ‘송하수업도’는 가르치는 자의 사명감과 배우는 자의 진지함이 배인 작품이다. 이인상은 자(字)가 원령(元靈), 호(號)는 능호관, 보산자(寶山子), 종강칩부(鐘崗蟄夫), 뇌상관(雷象觀), 운담인(雲潭人)이다. 그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후손으로 명문 집안 출신인데 이인상의 증조부가 서얼이었던 관계로 그도 반쪽짜리 양반이었다. 서얼이 속한 중인은 문무과가 아닌 기술관직에만 종사할 수 있었다. 온전한 양반이 아니라는 신분상의 약점은 오히려 그에게 더욱 양반다워야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작용한 듯하다. 완고할 정도로 올곧은 성품 때문에 벼슬살이하는 내내 불화했다.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자존심과 강퍅함을 문기(文氣) 넘치는 남종문인화에 오롯이 담았다. 자신의 꼿꼿한 지조를 소나무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송하관폭도’와 ‘설송도’에는 부러지지 않는 이인상의 결기와 고집스러움이 서려 있다. ‘송하수업도’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배경으로 등장한 까닭에 소나무의 존재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절제된 붓질과 담백한 색체 속에 솔향기를 담았다.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려는 가르침이 솔향기 같았으리라.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장소에도 맑은 바람이 흘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야사처럼 쉽게 부처님의 법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카샤퍄 삼 형제의 경우처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카샤퍄 삼형제는 바라문 집안 출신의 출가승으로 불을 섬겨 해탈을 얻으려 했는데 마가다국 나이란자나 강변에 살고 있었다. 많은 신자와 제자들이 카샤파 삼 형제를 믿고 따랐다. 맏형 우루빌바 카샤파는 5백명, 둘째인 나디 카샤파는 3백명, 셋째인 가야 카샤파는 2백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고 맏형인 우루빌바 카샤파를 찾아가 불을 모시는 회당에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우루빌바는 그곳에 독을 뿜는 큰 용이 있어 죽을 수도 있다며 거절했다. 부처님의 거듭되는 요청에 마지못해 허락한 우루빌바는 아까운 사문 한 사람이 또 목숨을 잃겠구나 생각했다. 


부처님은 회당에 들어가 풀방석을 깔고 좌선한 다음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었다. 애초부터 부처님은 독룡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독룡 또한 구제해야 할 중생이 아닌가. 부처님은 온 몸에서 불을 뿜는 화광삼매로 독룡의 신통력만을 빼앗았을 뿐 상처는 입히지 않고 작게 만들어 발우 속에 넣었다. 이튿날 아침, 죽은 줄로만 알았던 부처님이 용을 발우에 담아 걸어 나오시자 우루빌바는 경악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아라한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자만심을 버리지 못했다. 부처님은 우루빌바에게 3,500가지의 신통력을 보여주셨다. 설법을 하실 때면 사천왕을 비롯한 인드라, 브라흐만 등의 천상의 신들이 와서 예배를 드렸고, 입고 있던 분소의(다 해진 누더기)를 빨래할 때면 인드라가 나타나 부처님 앞에 연못을 파고 돌을 놓았다. 한 겨울 추위 속에서 불이 필요할 때면 5백 개의 화로가 생겼고, 강물이 넘쳐 물난리가 날 때도 부처님이 서 계신 자리는 물이 들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우루빌바 카샤파는 마침내 부처님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다. 백 스무살 넘은 우루빌바가 젊은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기이했다. 부처님은 우루빌바가 수많은 바라문 수행자를 거느린 지도자이니만큼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결정하라고 충고했다. 우루빌바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했다. 우루빌바의 제자 5백명의 바라문들은 스승을 따라 머리를 깎고 부처님께 귀의했다. 형 우루빌바가 부처님께 귀의하자 그의 동생 나디 카샤파와 제자 3백명, 가야 카샤파와 제자 2백명도 함께 귀의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 그들은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백 살이 넘도록 느껴보지 못한 평화였다. 이로써 부처님의 제자는 새로 1천 명이 늘어났다.

 

 

▲윤두서, ‘진단타려도’, 비단에 색, 111×68.9cm, 국립중앙박물관

 

 

나귀에서 떨어져도 행복해


조선시대 그림 중 가장 만화 같은 장면을 그린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작품이다. 나귀를 타고 가던 남자가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표정이 이상하다.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려야 마땅한데 그는 실실 웃고 있다. 뒤따르던 시종도 웃고 있다. 놀란 것은 앞서가던 꼬마 시종이다. 덜퍼덕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상전이 낙상했다. 깜짝 놀란 시동이 손에 든 책 보따리를 내팽개치고 뛰어갔다. 그런데 상전이 웃고 있다. 왜 이러시지? 머리를 다시셨나? 어린 시동은 상전의 웃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나귀에서 떨어져 턱에 멍이 들어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선비의 행동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호가 희이(希夷)인 진단(陳摶:872-989)은 중국 당나라 말에 태어나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 초기까지 살았던 도사(道士)다. 진단은 〈선천도(先天圖)〉를 그렸는데 이것이 나중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가 되어 송대 성리학자들의 상수학(象數學)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그런 재주꾼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화산(華山)에 은거하면서 다섯 왕조가 일어섰다 쓰러지는 것을 지켜만 봤다. 그는 한 왕조가 망하고 새 왕조가 일어섰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픈 듯 인상을 썼다.


그런 어느 봄날이었다. 진단이 흰 나귀를 타고 개봉으로 가다 행인에게서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하남성 개봉(開封)에 나라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천하가 이제부터 안정되리라!” 그러면서 박수를 치며 웃다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굴러 떨어졌다. 천하가 평화를 얻었는데 이까짓 낙상이 문제겠는가. 바닥에 넙죽 미끄러져도 진단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윤두서의 ‘진단타려도’는 진단의 터질 듯한 흥분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태평성대가 도래했으니 진단이 다시 인상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진단은 다시 화산으로 들어가 은둔했다. 조광윤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진단을 만나려 했으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림 상단에는 1715년(乙未) 8월(仲秋) 상순(上浣)에 숙종(肅宗)이 지은 어제시(御製詩)가 적혀 있다.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작스레 안장에서 떨어지나(希夷何事忽鞍徙) 
 취하거나 졸아서가 아니라 특별히 기뻐서라네(非醉非眠別有喜)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셨으니(夾馬徵祥眞主出)
 이제부터 천하에는 근심걱정이 없으리라(從今天下可無悝) 

 

조광윤은 낙양(洛陽)의 협마영(夾馬營)이란 군영(軍營)에서 태어나 절도사가 되었다. 당시 황제는 일곱 살이었는데 북쪽의 요나라가 쳐들어왔다. 군인들은 어린 황제로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해 조광윤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을 때 황포를 입혀 황제로 추대했다. 얼떨결에 황제가 된 조광윤은 진단의 판단처럼 중국 역사상 가장 너그러운 군주의 한 사람이 됐다. 정적을 죽이기보다는 포용했고, 사대부의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칼을 뽑지 못하게 했다. 그의 유훈을 받들어 후대의 황제들도 태조의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진단이 세상을 걱정하다가 조광윤에 의해 송나라로 통일됐다는 소식에 기뻐 나귀에서 떨어진 이야기는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알고 있었다. 공재 윤두서도 진단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의도로 ‘진단타려도’를 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진단타려도’는 윤두서가 숙종임금에게 올린 어람(御覽)용 그림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윤두서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사대부였던 윤두서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화원의 기교가 두드러지고 장식성이 강해 기량이 뛰어난 화원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작가가 누구든 궁중에 진상하는 그림이니만큼 화려한 청록산수화법(靑綠山水畵法)으로 그렸다. 먼 산은 청색을, 가까운 산은 녹색을 칠하거나 그 위에 청색을 덧칠하는 것이 청록산수화다. ‘진단타려도’에서는 바위와 언덕에 청색과 녹색을 연하게 칠한 다음 나무와 바위의 주름진 부분에는 작은 석록의 태점을 찍었다. 그림이 비록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진단의 이야기가 주제인 만큼 인물이 눈에 들어오도록 공간을 넓게 잡았다. 뒤쪽에 배치된 나무는 아랫부분만 그리고 윗부분을 비워놓았다. 어제시를 염두에 둔 구상임을 알 수 있다.

 

▲조정육

진단이 기쁨에 쌓여 나귀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웃는 모습은 부처님을 만났을 때의 제자들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제자들 또한 이렇게 외쳤으리라. “천하가 이제 안정되리라!” 조광윤의 출현이 한 시대를 안정시켰다면 부처님의 출현은 세세생생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2천5백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과거에도 현재도. 진리는 그런 것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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