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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자기의 신앙만을 최고로 믿는 집착이 갈등 씨앗 낳는다”

종교에는 표층·심층 존재
예수불신지옥은 표층일 뿐
코끼리 다리 만진 맹인 같아
이웃종교 간 서로 연구하며
존경으로 화합할 때 참 소통

 

 

▲ 오강남 교수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런 말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과연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믿는 기독교는 변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일부 불교인들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다 그런거야”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두 가지 층이 있습니다. 표층과 심층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표층종교라는 말입니다. 불교도 표층만 보고 “그것이 불교다”라고 단정 짓는다면 억울합니다. 유교, 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명확합니다. 바로 심층종교입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서울대에서 기독교를 전공했습니다. 표층만 가지고 기독교라고 여겼던 시절입니다. 그러다 불교의 심층을 만나면서 기독교도 심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제야 기독교의 심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는 말은 어느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발언입니다.


사실상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영향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일요법회를 어떻게 보시나요. 기독교의 주일예배와 관계가 있습니다. 찬불가도 찬송가와 상당한 관계가 있지요. 중요한 사실은 서양 기독교가 불교를 통해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서양 기독교 신학자들은 불교의 공사상을 배웁니다. 사찰에서 부처님에게 절하고 자식이 좋은 대학 가길 바라며 절하는 것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불교의 공사상을 배워 신학에 반영합니다. 과정신학의 대가라 불리는 존 캅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 불교를 연구해 학위를 받은 분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날 그 분을 학회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면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더군요. “서양 기독교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불교적 절대관, 그러니까 공이란 말은 ‘절대’에 이성이 들어갈 곳이 없다는 얘깁니다.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견해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이라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니, 전지전능이니, 무소불위니 하는 말은 군더더기라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부정의 신학이라고 해서 ‘하나님은 000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현대에는 주로 ‘하나님은 000다’라며 이것저것 갖다 붙입니다. 불교에서는 갖다 붙이지 말라고 이릅니다. 심지어 “있다, 없다”를 말해서도 안된다고 합니다. 언어를 뛰어넘어있다는 의미에서 공입니다. 그런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서 이렇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겁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유명한 사상가가 있습니다. 장자를 정말 좋아해 ‘장자의 길’을 펴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장자만 좋아한 게 아닙니다. 선불교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선불교 대가 중 일본사람인 스즈키 다이세쓰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돕니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집트로 피난 간 아기예수는 동방박사가 가져다 준 선물을 팔아 생활했으리라 추정합니다. 사실, 우리는 아기예수가 탄생할 때 동방박사 세 명이 유향, 몰약, 황금 등 세 가지 선물을 가져다 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실상 기독교 성서에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머튼의 말 가운데 더 중요한 얘기는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기독교가 다시 활력을 회복하려면 동방에서부터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선물이 뭐냐. 선불교와 노장사상 같은 동양사상입니다.


지금 동양사상이 서양사상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칸트, 하이데거, 소크라테스, 플라톤, 쇼펜하우어, 니체 등등. 이들이 동양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불교에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니체입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배경은 바로 불교를 공부해서입니다. 니체의 초인사상이나 영혼회귀 사상은 불교사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절대적 신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신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신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잘 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고, 병나면 고쳐주는 그런 신을 지칭합니다. 제가 ‘예수는 없다’는 책을 썼을 때도 예수의 역사를 말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상식으로 보고 있는, 이기적으로 이해하는 예수를 믿는다고만 하면 천국을 가는 그런 식의 예수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떤 예수가 있어야 하는지 우리가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한다는 게 책의 요지입니다.


머튼의 말도 니체와 같습니다. 서양 기독교가 너무 표층에 속해있다는 겁니다. 기도하면 되고, 믿습니다 하면 천국 가고, 이 세상에서 필요한 건 다 해주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는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잘못 믿으면 큰일 납니다. 왜 날씨가 좋은 지 물었을 때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답하면 기상학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왜 가난한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가난하다고 하면 도와줄 마음도 안 생깁니다. 그러나 덴마크 사람들은 모두의 책임이나 시스템 문제라고 여기고 고치려고 하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복지 시스템이 잘 돼 있는 겁니다.


머튼은 서양문화의 몰락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동양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서양인들이 불교를 많이 따른다고 하는데, 그네들은 스스로 동양과는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은 민속불교라고 한다는 거죠. 그네들 스스로는 참선불교 혹은 명상불교라 칭합니다. 또는 엘리트 불교, 백인불교라 부릅니다. 참선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하겠다는 의지이지, 뭔가 빌어서 이루겠다는 게 아닙니다.


종교는 표층과 심층이 있습니다. 표층의 특징은 첫 째, 지금의 내가 잘되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겁니다. 남 보란 듯 살겠다는 종교는 표층입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종교의 시작이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이 깊어져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참나 혹은 더 큰 나 혹은 불성을 찾고 이를 깨닫는 게 심층입니다. 두 번째, 표층은 무조건 믿음을 강조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으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목사님 말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둥, 스님이 당신 말씀은 부처님 가르침이라며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표층입니다. 그러나 심층은 무조건 믿지 말고 스스로 깨달으라는 겁니다. 검토하고 맞다고 여기면 그 때 받아들이라고 부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깨치고 이해하고 알게 됐을 때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심층은 깨침의 종교입니다. 또 하나의 표층은 문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며 심층은 문자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만 진리를 갖고 있다 여기면 표층이며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제 것을 절대적이라 주장하지 않는 게 심층입니다. 그런 종교인이 심층 종교인의 특징입니다.


종교가 표층에만 기울면 싸움이 생깁니다. 군맹무상(群盲撫象), 여러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는 얘기가 있습니다. 배 만진 이는 코끼리가 바람벽이라고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이라고 합니다. 만약 자기주장만 맞다고 우긴다면 코끼리의 실체를 알 수 있을까요. 종교간 갈등이 바로 여기서 생깁니다. 다 같이 둘러 앉아 서로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종합해야 대략 코끼리에 가까운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는 겁니다.


우리가 이웃종교의 심층을 잘 봐야 하는 이유를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철수는 자기 집에서 밥 먹을 땐 영양을 따집니다. 한데 친구 영수 집을 갔더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중요했습니다. 영희 네는 밥 먹는 습관, 즉 예의범절을 중요시했죠. 또 다른 친구 집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인연이 닿았던 모든 이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 때부터 철수는 밥 먹는 행위가 영양 섭취만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더 풍요로워 진겁니다.


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간 대화 없이는 세계평화는 없다. 그리고 이웃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가 없다면 종교간 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기독교인이 불교로 박사학위를 받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러나 불교인 중 기독교로 박사 학위를 받는 분은 제가 알기론 매우 드뭅니다.


배운 불자들도 기독교는 접시물인데 불교는 바다라고 이웃종교를 폄하합니다. 이는 표층만 본 겁니다. 기독교도 바다가 있습니다. 이웃종교를 존경하는 마음을 토대로 종교화합과 협력체계가 이뤄지면 한국은 진정한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자 다양성이 풍부한 사회일 겁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열린 종교관입니다.
 

정리=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이 내용은 10월12일 불교여성개발원이 세계평화를 실천할 차세대 지도자 양성을 위해 마련한 ‘영108을 위한 글로벌 임파워먼트 프로젝트’에서 오강남 교수의 ‘열린 종교관’ 강좌를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오강남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및 동대학원에서 서양 종교사상을 전공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대학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에서 27년 동안 비교종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다. 저서로 ‘도덕경’, ‘장자’, ‘예수는 없다’,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등이 있고, 역서로 ‘예수의 기도’ 등 다수가 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법보신문에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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