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 일본 도쿄대학 소장 세키노 타다시 자료

기자명 법보신문

훼손된 한국문화재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1909년 이후 매년 방한해
최초의 한국문화재연구 주도
관련자료 4000여점 남겨


2010년부터 한·일 공동으로
세키노 자료 연구조사 착수

 

 

▲세키노가 건판 사진·필름·탁본·실측도면·모사도 등의 형태로 남긴 자료는 문화재가 훼손되기 이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좌로부터 경주 원원사지,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좌상 광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필름.

 

 

한국의 문화재 관련 연구는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현재 도쿄대학에는 대학원 공학계연구과, 종합연구박물관 등에 그들이 조사한 한국관련 자료가 상당수 남아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세키노 타다시다. 현재 세키노의 문화재 조사 자료는 도쿄대학대학원 공학계연구과 건축학전공에 3만여점 소장돼 있으며, 이 중 한국관련 자료는 약 4000점으로 알려져 있다. 세키노의 자료는 유리건판 사진, 필름, 탁본, 실측도면, 모사도, 건축·고고유물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한국관련 자료 중에서는 유리건판 사진이 3000매 이상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유형별로는 고고, 건축, 조각, 공예, 회화 등 모든 분야의 문화재를 망라하고 있으며, 시기별로도 낙랑 이전부터 근세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문화재 연구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1차 자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자료 전체가 공개된 적은 없고, 다만 몇몇 연구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제공된 적이 있을 뿐이다.


도쿄대학 연구팀은 1997년부터 세키노의 한국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있으며, 그 성과로서 2005년 ‘野貞アジア踏査-平等院·法隆寺から高句麗古墳壁畵へ(세키노 타다시의 아시아 답사-뵤도인·호류지에서 고구려고분벽화까지)’라는 전시를 개최했고, 도록을 출간한바 있다. 이 전시에서 세키노의 자료가 일부 공개됐지만, 지극히 부분적인 공개였을 뿐 아직 세키노의 자료 전체를 공개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는 세키노 자료 연구의 완결편이라기보다는 연구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는 1895년 7월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가(造家)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고사사(古社寺) 수리공사감독으로서 나라현에 부임한다. 1897년 우리의 문화재보존법과 같은 고사사보존법(古社寺保存法)이 제정되면서 나라현 기사(技士)에 임명된 후 5년 여간 나라에서 고건축조사와 보존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다. 1901년에는 도쿄제국대학 조교수에 임명되었으며, 1902년에는 도쿄제국대학의 의뢰를 받아 처음으로 한국조사를 시작했다.


그 후 1909년에는 한국도지부(韓國度支部)의 촉탁으로 초청되어 한국의 고건축과 고분에 대한 전면 조사를 개시했다. 이 시기의 조사에서는 문화재를 갑·을·병·정 4종류로 분류하고, 보존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가 나라(奈良)에서 했던 작업의 연장이었는데 이렇듯 한국문화재에 대한 근대적 조사의 첫 번째 대상이 건축이었기 때문에 남대문이 국보 1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후 매년 한국에 건너왔으며 1910~1913년 강서대묘·중묘, 매산리사신총, 화상리감신총, 화상리성총, 용강대총, 쌍영총, 간성리연화총 등 고구려고분과 묘향산 보현사, 속리산 법주사, 부석사, 해인사 등 사찰을 조사했다. 특히 1913년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집안에 가서 고구려 광개토왕비를 조사하기도 했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의 고적주임이 됐으며, 1915~1917년 백제, 낙랑, 고구려의 고분을 조사했다. 1918~1920년에는 2년3개월에 걸친 중국·인도·유럽 등의 조사로 한국조사는 중단됐다. 일본에 귀국 후 1921년 낙랑군치지(樂浪郡治址) 조사를 시작했으며, 1922년~1926년에도 조선고적조사를 진행했다.


‘세키노 타다시 자료(野貞資料)’라는 것이 확실한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키노 타다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세키노가 수집한 것들과 그것들을 바탕으로 세키노가 생산한 것들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한 도구로서 상정한 것이다.


우선 자료에는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와, 토기 등의 입체적인 조형물, 촬영된 사진(유리 건판·필름·인화), 메모(필드 카드), 탁본 등 현지가 아니면 수집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해 고찰을 덧붙인 보고서, 논문, 강연 등의 초고와 문화재 관계 서류도 포함되며, 세키노가 발간한 서적·논문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세키노가 부지런히 쓴 일기, 일지, 세키노가 연구자료·교재로서 작성·의뢰하여 구입한 건축 모형, 벽화·장식의 모사 등도 있다.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세키노의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도쿄대학대학원 공학계연구과 건축학전공에는 제국대학시기 이후의 자료가 다수 보존되어 있다. 교육과 연구의 필수 교재로서 수집된 것도 있으며, 교육 중에 생산돼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는 것도 있다. 그 안에 세키노 타다시와 관련된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지만, 최근까지 체계적 정리는 실시되지 않았다. 종류를 열거해보면, 졸업 설계 작품, 졸업논문, 조사 사진(중국·한국·일본 등)의 유리 건판·필름, 인화, 모형, 옛 기와·벽돌(塼)(중국·한국·일본), 모사도(뵤도인(平等院)봉황당 벽화·호류지(法隆寺)천개·고구려고분벽화 등), 탁본, 토기 등이다.


도쿄대학대학원 공학계연구과 건축학전공에서는 이러한 세키노 관련 자료 중 특히 유리건판은 방치해 두면 파손이 진행돼 사료로서 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위험이 있으므로, 조금씩 4개의 판형으로 현상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1997년부터는 한국고고학과 관련한 연구를 위해 유리건판의 인화가 필요했고, 사오토메 마사히로교수(인문·사회계 연구과)와 협력해 약 4000매를 인화했다. 동시에 한국 고고학과 관계있는 자료를 조사했다. 또한 이후에 일본 관련 사진의 일부도 인화했으며, 성과의 일부는 목록으로서 공표되어 있다.


또한 2003년에는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 후지모리연구실에 보관돼있던 세키노 타다시 자료(75상자) 전부가 종합 연구 박물관에 이관됐다. 이 자료는 세키노 타다시의 아들인 고(故) 세키노 마사루씨(전 생산기술 연구소 교수)가 정리한 것이다. 이 자료는 도쿄대측에 의해 ‘세키노 타다시 컬렉션’이라고 명명되어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자료의 종류는 인화사진, 유리 건판·필름, 탁본, 도면, 모사, 조사 기록, 필드 카드, 일지, 유물, 인쇄 밑그림, 강연 초고, 조사 서류, 서적 등이다. 역시 성과의 일부가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도쿄대학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던 것 같다. 이 후 세키노의 한국관계 자료에 대한 정리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특히 불교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 명칭이나 시대를 부여하는 일은 전공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데 현재 도쿄대학에는 세키노처럼 한국의 문화재 전반을 조사한 연구자는 물론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연구자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다행히 2010년부터 세키노가 남겨 놓은 방대한 자료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공동연구가 시작됐으며, 나는 불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정리를 담당하고 있다. 세키노는 사진자료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자료를 남겨 놓았는데, 현장에서 조사할 때 작성한 메모나 필드카드가 있으며, 일기나 여행기 등은 세키노 조사 자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키노 자료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깨지기 쉬워 관리가 매우 까다로운 유리 건판은 현재 나무상자와 종이상자에 수납되어 있다. 우선 상자 안의 건판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무엇이 찍혀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도쿄대학에서 이미 기본적인 분류를 해 놓았지만, ‘조선’이라고 명기된 상자 안에 일본이나 중국 관련 자료도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분류된 상자에 한국 관련 자료가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모든 상자를 다시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재분류된 유리건판 필름을 포함한 모든 자료는 전산화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이 보다 쉽게 자료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도록 할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는 건축학, 미술사학, 고고학 등 근대 한국의 문화재 관련 학문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논의와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는데, 특히 미술사학계에서는 세키노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연구가 다수 발표됐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입장에서 당시 일본 연구자들의 의식이나 사관을 파악하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키노의 자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치가 높은 것임엔 틀림없다.

 

▲임석규 실장

우선 일제강점기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실시한 유적조사였기 때문에 유적의 원상이 훼손되기 이전의 것이어서 현상 파악에 매우 긴요한 자료다. 그리고 고구려·발해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 이해에 필요한 유적 대부분이 중국과 북한에 산재하고 있어 직접 조사가 어려운 현실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조사내용은 관련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자료이기 때문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