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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부탄의 영웅 샤브드롱과 심토카종

부탄 최초 통일 왕국 위업 이룬 ‘영웅 샤브드롱’의 역작

요새·사원 기능 결합된 최초의 종
1629년 부탄 영웅 샤브드롱이 건설
토착세력·티베트 공격 막아내며
독립국가 부탄의 중심지로 성장


1640년 정교 분리의 이원통치인
‘초에시’ 제도 시행된 역사적 장소
단 한번도 적에게 점령된 적 없는
철옹성의 요새이자 종의 원형 간직

 

샤브드롱, 최초로 부탄 통일 완성
1651년 정치 은퇴 칩거하며 수행
죽음조차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심토카종. 입구는 계곡이 막아서고 뒤로는 높은 산줄기가 둘러서 있어 한 눈에 보아도 침입이 어려운 천혜의 요새다. 지금은 문화와 언어 등을 가르치는 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승속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입학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사람 냄새 물씬 맡고 싶으면 시장만한 곳이 없다. 이곳 부탄의 수도 팀푸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부탄의 재래시장에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 버터 등이 거래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육류와 생선 등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육류는 말린 고기의 형태로 거래가 되지만 때마침 국가에서 지정한 한 달 간의 육류 거래 금지 기간이라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부탄에서는 일 년에 한 달 씩 육류의 거래를 금지하는 기간이 있는데 이때는 그나마 인도 등에서 수입해오던 육류의 거래마저 모두 중단해 일체의 살생이 없도록 한다. 부탄 사람들의 견실한 신심이 엿보인다.


시장에서 자두와 배 등 약간의 과일을 사들고 부탄 역사상 최초의 요새로 만들어진 성채인 심토카종으로 향한다. 정식 명칭은 ‘상각 자브돈 포드랑’. ‘탄트리즘의 깊은 의미를 간직한 궁전’이라는 다소 난해한 의미를 지닌 이 성은 1629년 부탄의 영웅 샤브드롱에 의해 건설됐다.

 

 

▲ 팀푸 시내에 위치한 재래시장. 각종 야채와 과일, 치즈, 버터, 향신료 등이 거래된다.

 


심토카종을 돌아보기에 앞서 샤브드롱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부탄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지도자이자 수행자다. 특히 ‘종’이라는 독득한 건축의 개념이 그로부터 시작됐고, 부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상당수의 종과 사원들이 그에 의해 창건되거나 적어도 그와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샤브드롱의 본명은 나왕남걀. 까규파의 한 지파인 드룩빠 까규파의 총본산인 티베트 랄룽사원으로부터 1616년 부탄으로 들어왔다. 당시 티베트에서는 각 종파간의 권력다툼이 치열했는데 드룩파 까귀파 역시 겔룩파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왕남걀은 23세에 꿈속에서 마하깔라라는 토착 수호신으로부터 ‘부탄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이 꿈 때문에 자발적으로 부탄으로 향한 것인지, 아니면 날로 치열해지는 권력 다툼을 피해 부탄으로 온 것인지, 혹은 드룩파 까규파가 종파의 명맥을 보존하기위해 그를 비교적 안전한 부탄으로 파견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부탄에 도착한 나왕남걀은 지방 토호들의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서부 부탄을 중심으로 설법을 하며 존경받는 린포체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가게 된다.

 

‘샤브드롱’이라는 그의 별칭도 이때부터 사용하게 됐는데 ‘만인의 경배를 받는 고귀한 보석’이라는 거창한 의미가 들어있다. 서부 부탄에서 입지를 굳힌 샤브드롱이 팀푸 남쪽에 자신의 거처로 만든 것이 바로 심토카종이었다. 사원이자 행정기관의 기능을 함께 갖춘 동시에 방어를 위한 요새의 형태로 만들어진,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 획기적인 건축형태로서 종이 등장한 것이다. 심토카종은 이후 여러 종 건축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심토카종이 요새로서의 기능을 그만큼 잘 수행했기 때문이다.


샤브드롱이 서부 부탄의 실권자로 명성을 높이자 동부 부탄 중심의 토호세력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연합군을 형성, 1629년 심토카종을 공격한다. 하지만 연합군의 첫 번째 공격은 가볍게 샤브드롱의 승리로 끝난다. 패배한 연합군은 티베트에 지원군을 요청, 재차 심토카종을 공격하지만 또다시 실패하고 만다. 그래도 연합군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라다크왕국에 지원군을 요청해 또다시 대규모 공세를 펼친다. 하지만 철옹성같았던 심토카종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1639년 10년간의 전쟁은 샤브드롱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반대파연합은 해체됐고 티베트는 샤브드롱을 부탄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하는 동시에 부탄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종전의 의미를 넘어 부탄이 티베트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이룬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 국립메모리얼초르덴의 입구에는 파드마삼바바, 붓다, 그리고 샤브드롱(왼쪽부터)이 조각돼 있다.

 


샤브드롱의 등장으로 부탄은 히말라야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며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몽골군이 가세한 티베트의 침략으로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고 이 전쟁은 무려 11년 간이나 계속된다. 샤브드롱은 산맥과 계곡 지형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 매복해 있다가 급습하는 형태로 몽골과 티베트 연합군을 공격해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이때 빼앗은 무기들이 지금도 심토카종과 푸나카종 등에 전시돼 있다. 부탄의 토호세력과 연합군을 형성해 처음 부탄을 침공했던 티베트는 1644년과 48년, 그리고 49년에 잇따라 부탄을 침입하지만 샤브드롱은 이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샤브드롱은 전쟁의 와중에도 승리를 기념하며 종을 새로 건설하는 등 내치에도 빈틈없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부탄의 절대적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완성해 나간다. 마침내 모든 전쟁이 끝나고 이후 1655년 부탄 전역은 완전히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영토를 티베트 남서부와 라다크지역으로까지 확대함으로써 부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당시 부탄의 영토는 현재의 여덟 배에 달했다고 하니 부탄이 명실상부한 히말라야의 최강자였음이다.


티베트와의 전쟁은 부탄이 외세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높인 사건인 동시에 부탄 고유의 정체성을 강화함으로써 티베트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부탄은 민족적으로 티베트에 원류를 두고 있지만 오늘날 티베트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바로 샤브드롱이 티베트로부터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차별성을 강조한 결과다. 고와 키라라는 독특한 부탄식 복장을 지정하고 머리모양 역시 장발이었던 티베트와는 달리 단발로 바꾼다. 무엇보다도 가장 다른 점은 정치제도였다. 티베트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640년 샤브드롱은 ‘초에시’ 제도를 만든다. 이것은 일종의 정교분리로 종교에 관한 부분은 ‘제켐포’라는 승단의 최고 지도자가 관장하고 정치 등 세속에 관한 부분은 ‘데시’라고 불리는 행정관이 담당하는 이원통치체제다. 초대 제켐포는 샤브드롱 자신이 직접 맡았고 데시는 선출직으로 명망있는 스님들 가운데서 선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샤브드롱에게 집중돼 있었다. 초대 데시 또한 샤브드롱이 직접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 초에시 제도가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심토카종이었다. 하지만 샤브드롱에 의해 시작된 초에시제도는 그의 사후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바로 선출되는 데시마다 자신들이 샤브드롱의 화신임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샤브드롱에 대한 신격화의 결과이기도 했다.

 

 

▲ 심토카종 내부의 중심건물 입구. 안의 기둥에는 적군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이 묶여 있다.

 


기록에 따르면 샤브드롱은 1651년 데시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고 칩거에 들어간다. 일종의 은퇴였다. 푸나카종으로 거처를 옮긴 샤브드롱은 이곳에서 깊은 명상과 수행에 전념했다고 하는데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살아서 수행중이라고 믿었으며 그의 죽음 역시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고 한다. 샤브드롱의 죽음은 그가 사망한지 아마도 수 십 년이 지난 후였을 1705년에 이르러서야 공표됐는데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100살이 훨씬 넘은 샤브드롱이 살아서 깊은 명상에 들어있었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왕은 아니었지만 살아서 최고의 권력자이자 수행자로 명성을 드높였던 샤브드롱은 사후에 부탄의 영웅으로 그리고 부처의 반열로 추대된다. 그러니 환생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환생임을 주장한 데시 가운데 일부는 그것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반대파의 저항을 불러왔고 권력다툼의 빌미가 되어 때로는 내전양상으로 치닫기도 했다. 이로 인해 샤브드롱 사후 200여년 간의 혼란기가 계속됐고 이후 영국 등 외세 침입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샤브드롱에 대한 부탄 국민들의 존경과 믿음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사원에는 붓다나 파드마삼바바 옆에 나란히 샤브드롱의 조각이나 그림이 봉안돼 있다. 심토카종에도 부처님상 좌우로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상이 있고 그 앞에 샤브드롱의 조각상이 있다. 사원의 기둥에는 총과 칼 등이 빼곡히 묶여 있다.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빼앗은 무기들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샤브드롱은 전쟁 중에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주술적인 의식을 행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그런 의미가 아닐까.

 

 

▲ 법당 입구의 벽과 문. 한번도 전소되거나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아 잘 보존돼 있다.

 


샤브드롱이 세운 심토카종은 종종 부탄 역사상 최초의 종이라고 소개되기도 하지만 최초의 종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종이 있었다. 다만 현재와 같은 개념의 종, 사원인 동시에 방어 기능을 갖고 있는 요새와 같은 성은  심토카종이 최초다.


심토카종은 17세기에 건축된 이후 몇 차례 소소한 화재를 겪기도 했지만 전소되거나 붕괴된 적이 없다. 특히 계속된 티베트의 전쟁은 물론 어떤 침략에도 무너진 적이 없는 진정한 철옹성이다. 입구는 남쪽에 단 하나, 중앙에는 삼층의 중심건물이 있는데 네 면에 각각 된캉이라 불리는 작은 법당을 설치해 불상과 지역 토착신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부탄불교의 모습과 종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동시에 그 안에 나란히 모셔진 샤브드롱상은 그가 여전히 부탄 최고의 영웅임을 말해준다. 현재 심토카종은 문화와 언어 등을 가르치는 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부속 건물이 많은 것은 그런 까닭인 듯 하다. 그런데 ‘심토카’는 무슨 뜻일까. 가이드의 설명은 이렇다.

 

 

▲ 심토카종 입구에는 커다란 마니차가 설치돼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돌리며 기도할 수 있다.

 


“심토카는 ‘악마의 바위’라는 뜻입니다. 샤브드롱이 오랜 명상 끝에 심토카종의 형태를 구상한 후 이 지역의 모든 악마들을 잡아 심토카종 뒷산의 바위아래 가둬버리고 종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악마를 잡아 가두고 그 자리에 탑이나 사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후 만나게 되는 사원과 불교유적마다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앞일을 알리가 없다. 설명을 듣고보니 악마들이 갇혀있다는 심토카종의 뒷산이 별스럽게 보인다. 

 

팀푸=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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