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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가섭찰간(迦葉刹竿)

기자명 법보신문

본래면목은 누구에게 줄 수도 결코 받을 수도 없다

시험이라는 평가형식은
철저하게 노예의 삶 강요


화두는 시험이 아닌 시험
주인으로 서야 절로 뚫려

 

아난(阿難)이 물었다. “세존(世尊)께서는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전한 것 이외에 별도로 어떤 것을 전해주시던가요?” 가섭(迦葉)이 “아난!”하고 부르자, 아난은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섭은 말했다. “문 앞에 있는 사찰 깃대를 넘어뜨려라!”

무문관(無門關) 22칙 / 가섭찰간(迦葉刹竿)

 

 

▲그림=김승연 화백

 


1. 내면의 심층에 있는 기억 아뢰야식

 

당혹스런 일입니다. 직장에 출근하자마자, 놀라운 장면이 벌어집니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과 검정 사인펜이 놓여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시험지였습니다. 세 문제가 출제되어 있는 겁니다. “1. 직장인의 대인 관계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2. 상사의 부당한 명령은 지켜야 하는가? 3. 비정규직을 늘리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벌써 직장에서 잔뼈가 굵은지 오래되었지만, 이런 난처한 상황도 처음입니다. 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심하게 투덜거릴 겁니다. 학생도 아닌데 시험까지 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기분 나쁘고 모욕적인 일이니까요. 아마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반응은 둘 중에 하나 일 겁니다. 터프한 척 시험지를 발기발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화는 나지만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봐 답을 나름 정성스레 적어 넣을 겁니다. 물론 나중에 시험을 보도록 한 사람에게 불평을 토로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터프해 보이는 전자의 반응과 순종적인 것처럼 보이는 후자의 반응 중 어느 것이 그나마 괜찮아 보이나요. 아마 전자라고 쉽게 단정할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 두 반응 사이에 정말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두 가지 대응 방식은 모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시험지에 반응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던지는 행위도 비록 시험을 거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험을 거부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험을 인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반면 정답을 찾아 답을 쓰는 행위는 시험을 인정하고 그것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결국 터프한 반응이나 순종적인 반응은 모두 시험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 반응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사람들은 순간적이나마 학생이란 신분에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시험을 강하게 의식하는 존재가 바로 학생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졸업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터프한 반응을 보였던 회사원이나 아니면 순종적인 반응을 보인 회사원들이나 아직도 그들 내면에는 학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잠재되어 있던 겁니다. 불교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nnāna)을 떠올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 내면의 가장 심층에 있는 기억의식이 바로 아뢰야식이니까요. 이미 졸업을 했지만, 학창시절의 경험이 내면 깊은 곳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는 겁니다. 근사한 여인과 포옹을 하고 난 뒤에도, 그녀의 향기가 옷에 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회사 안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시험지가 과거 학창 시절 시험을 보느라고 내면에 각인된 학생이었을 때의 기억을 촉발했던 겁니다. 아마도 시험이 주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그 결과에 대한 부담감은 학창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 있을 겁니다. 아마 정신분석학자라면 이런 학생이었을 때의 아픈 기억을 트라우마(trauma), 즉 ‘심리적 외상’이라고까지 이야기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2. 화두의 답은 스승에게서 얻을 수 없다

 

도대체 시험이 그토록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험이란 형식이 기본적으로 우리를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도록 만드는 불쾌한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내는 사람도 내가 아닙니다. 그리고 시험 결과 평가를 하는 것도 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시험 출제자, 즉 선생님의 속내라고 할 수 있지요. 자신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그걸 시험 문제로 내지 않으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낙인찍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시험에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보기보다는 오히려 선생님과 같은 시험출제자의 내면을 읽는 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불교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바로 시험 아닌가요.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야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즉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상체계가 바로 불교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피력하기보다는 선생님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것. 아무리 사제지간이라고 해도, 이것은 분명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에 다름 아닐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피력하는 것이 주인이라면, 타인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숙지하고 반복하는 것이 노예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종(禪宗)이 교종(敎宗)을 비판했던 겁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선종이 표방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문자가 중요하지 않고 단지 자신만의 본래 마음이 중요하다고 선언하는 순간, 선생과 스승 사이에 이루어지는 시험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바로 선종의 상징이랄 수 있는 화두(話頭)가 가진 특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시험 아닌 시험”이기 때문이지요. 화두를 던진 스승의 속내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 그러니까 화두의 정답을 스승에게서 읽으려는 사람은 결코 화두를 뚫지 못할 테니까요. 반면 완전히 자기의 본래면목을 되찾은 사람, 즉 주인으로 당당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라면, 화두는 저절로 뚫리기 마련입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아니면 대학원에서는 정해진 성적을 얻으면 학생에게 졸업장이나 학위를 줍니다. 한 마디로 말해 선생님이 제자들의 수준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아니면 취업하기 위해서 졸업증명서나 성적증명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명문대학을 졸업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들은 자기 집에 아주 버젓하게 졸업장이나 석사나 박사 학위기를 전시해놓기도 합니다. 누군가 방문했을 때, 자신이 어느 대학 출신이지, 혹은 자신의 지도교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겠지요. 불행히도 자신의 대학이 추문에 휩싸이거나 혹은 지도교수가 무자격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런 사람은 무척 곤혹스러울 겁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긍정하기보다는 졸업장이나 학위기로 긍정했던 사람이니까요. 마치 토대가 무너진 집처럼 휘청거릴 겁니다.


3. 선종에서의 졸업장은 살불살조

 

선종 전통에서는 스승의 행동이나 말을 일거수일투족 따르는 사람을 부정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본래면목에 따라 살기보다는 스승의 면목에 좌지우지되는 노예에 불과하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선종에서도 졸업장 혹은 학위기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나 조사의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데 성공한 제자에게 스승은 자신의 가사를 내어줍니다. 다섯 번째 조사였던 홍인(弘忍, 601~674)이 혜능(慧能, 638~713)을 여섯 번째 조사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가사를 내렸던 적도 있고, 전설에 따르면 싯다르타도 가섭(迦葉, Kāśyapa)에게 자신의 금란가사를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선종에서는 자신의 가사를 탐내지 않는 제자에게만 가사를 내려준다는 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졸업장이고 학위기를 똥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선종의 스승은 제자들에게 졸업장과 학위를 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스승이 내린 가사에 감격하거나 혹은 그것의 권위를 자랑하거나 거기에 의존한다면, 그 제자는 결코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긴 ‘살불살조’의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부처나 조사의 가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긴 싯다르타의 본래면목과 가섭의 그것은 다른 것이고, 홍인의 본래면목과 혜능의 그것은 다른 겁니다. 사실 싯다르타가 입던 가사가 가섭의 몸에 맞을 리도 없고, 홍인이 입던 가사도 혜능에게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화두가 ‘시험 아닌 시험’이듯이, 깨달은 사람이 내린 가사도 ‘졸업장 아닌 졸업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무문관(無門關)’의 스물두 번째 관문을 보면, 아난(阿難, Ānanda)은 싯다르타가 가섭에게 내린 가사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아난은 싯다르타가 가섭에게 금란가사 이외에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난은 집요하게 물어보았던 겁니다. “세존(世尊)께서는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전한 것 이외에 별도로 어떤 것을 전해주시던가요?” 싯다르타가 가사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주었고, 그것 때문에 가섭이 싯다르타를 이어 스승이 되었다고 지금 아난은 믿고 있습니다.


가섭은 싯다르타의 인정을 받아 스승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달았기에 스승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섭은 아난의 철없는 질문을 무시하고 그에게 갑자기 말을 건넵니다. “아난!” 졸업장이나 학위가 있어야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아난의 잘못된 생각을 가섭은 끊어버리려고 했던 겁니다. 가섭의 호명에 아난도 쓸데없는 궁금증을 거두고 대답합니다. “예.” 주려고 해도 줄 수 없고 받으려고 해도 받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래면목입니다. 가섭은 그저 바랄 뿐입니다. “예”라고 대답하면서, 아난도 그만의 본래면목을 보았기를. 어쨌든 가섭은 아난에게 넘칠 정도의 가르침을 내린 겁니다.

 

▲강신주

그러니 설법이 끝났다고 선언한 겁니다. “문 앞에 있는 사찰 깃대를 넘어뜨려라!” 사찰 깃대를 세우는 것이 설법 중임을 나타낸다면, 그것을 거두는 것은 설법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니까요. 이제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아난의 몫으로 남은 겁니다. 아난은 가섭처럼 깨달음에 이르렀을까요. 우리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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