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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대산 상원사

기자명 법보신문

천고의 지혜로 깨어있는 마음 닦는 무채색의 정진 터

패륜의 업 닦고자 했던
세조의 간절한 발원에
문수동자 화현한 도량


한국전쟁 당시 전소 위기
한암스님 목숨 걸고 막아

 

명저 ‘선방일기’의 탄생지
화두 든 선객 바뀌었어도
구도의 열기는 변함 없어

 

 

▲오대산 상원사가 눈에 잠겼다. 계곡의 물소리조차 덮었다. 시끄러운 것, 번잡한 것, 욕심으로 뒤섞인 것들은 모두 내려놓고 순백, 욕망을 털어낸 무채색이 되어 발을 들여야 할 것이다.

 

 

마침 첫 눈이 왔다. 눈길을 달려 오대산에 들었다. 법향이 그윽해서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는 성지이다. 수정암, 사자암, 미륵암, 관음암, 지장암 등과 더불어 온갖 생명붙이들이 적멸보궁을 향해 경배하고 있다. 눈은 하염없이 내려 계곡의 물소리까지 덮어버렸다.


‘이 시대의 더러운 말(言)과 거짓을 덮어버렸으면…….’


저 설국(雪國)에 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을 버려야할까. 길 위의 스님들이 설경을 보며 웃는다. 그 미소가 유독 천진하다. 하얀 눈 속의 잿빛 승복은 어떤 욕심도 떨쳐버린 듯 그 자체로 성스럽다. 본사 월정사를 남겨 두고 계곡을 따라 말사 상원사로 향했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마다 눈꽃이 피었다. 첫눈은 섬세해서 산과 나무들의 자태가 맑으면서도 신비로웠다. 눈길은 길었고, 상원사는 한참 뒤에 나타났다.


한낮인데도 상원사(주지 인광스님) 경내는 고요했다. 눈 치우기 울력에 나섰던 스님들은 다시 선방에 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수도량 상원사는 ‘왕의 사찰’이었다. 온통 조선 세조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 두 왕자가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었다. 그러다 세조 12년(1466년) 대대적인 중창을 했다. 낙성식에 왕이 참석했다. 세조는 누구인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형제와 수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 유교의 근간인 충효사상에 피를 뿌린 인물이다. 그가 왜 상원사 중창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물론 사연이 있다.


세조는 집권이후 친형수이며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렸다. 현덕왕후는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저주를 퍼부었다. 세조는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왕후의 저주 때문이라며 형수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덕왕후가 꿈속에 나타나 저주와 함께 침을 뱉었다. 세조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 나의 업보가 크고 또 오래가는구나.”


그리고 세조는 피부병을 얻었다. 왕의 몸을 살피던 어의가 새파랗게 질렸다. 예사 종기가 아니었다. 백성들 사이에 현덕왕후가 침을 뱉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었다. 업보가 피부에 달라붙은 것이 분명했다. 종기에서 나오는 피고름은 다름 아닌 그 옛날 그가 죽인 사람들의 피였다. 닦아도 닦아도 솟아났다. 그것은 잊고 또 잊으려 해도 나타나는 악몽과 다름없었다. 세조는 명산대찰을 찾아 나섰다.


세조는 자신이 아끼던 신미대사(훈민정음 창제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승)와 함께 다녔다. 신미 대사는 왕의 몸은 물론이고 마음이 썩어 들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은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에 들렀다. 상원사 위에는 남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于筒水)가 서대 염불암 옆에 있다. 그래서 상원사 앞을 흐르는 오대천 물은 예부터 맑고 영험했다. 10월이라 차가웠지만 왕은 문득 멱을 감고 싶었다. 자신의 병을, 아니 죄를 씻겨줄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신하들을 물리고 계곡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동자승 하나가 그런 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이 등을 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동자승이 다가가 왕의 더러운 등을 밀었다. 왕이 말했다.


“고맙구나. 그런데 어디 가거든 임금의 옥체를 씻겼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그랬더니 동자승이 빙그레 웃었다.


“왕께서도 어디 가시거든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세조가 놀라 돌아보니 동자승은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몸의 종기가 아물었다. 왕은 감격했다.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했다. 기억을 더듬어 실제와 비슷한 동자화상(畵像)과 이를 토대로 목각문수동자상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화상은 없다. 얼마 전 다량의 국보가 쏟아져 나온 목각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만 모셔져 있다.


병을 고친 이듬해 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예불을 올리려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고양이는 곤룡포 자락을 입에 물고 뒤로 잡아 당겼다. 예감이 이상했다. 밖으로 나가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뒤졌다.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있었다. 자객을 끌어내 참하는 사이에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왕은 다시 논을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즉 고양이 논, 또는 고양이 밭이란 뜻이다. 상원사 경내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상원사는 본사인 월정사와는 달리 6·25 전쟁 때도 화를 입지 않았다. 한암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공, 수월 등과 함께 선풍을 진작시킨 한암 스님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고 상원사를 지켰다. 전쟁이 터지고 월정사를 불태운 군인들이 상원사에 올라와 법당을 태우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했다. 자신도 함께 태우라는 것이었다.


“부처님 제자로 법당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니 어서 나를 태우시오.”


이에 감복한 국군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절 마당에서 태웠다. 연기를 피워 법당을 태우는 시늉만 내고 떠나갔다.

 

 

▲ 상원사 마당을 지키는 아기부처님들이 눈 속에서도 미소 짓고 있다.  

 


한암 스님의 법력은 법당 뿐 아니라 나라의 보물인 동종도 구했다. 바로 상원사동종이다.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은 경북 안동 누문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예종 때 이곳으로 옮겼다. 왕명이었다. 하늘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은 일반인이 봐도 비범하다. 그 솜씨로 미루어 천상의 소리를 낼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혹여 상할까봐 유리관 속에 모셔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같은 크기의 모조 동종을 만들어 달아놓았다. 하지만 천봉만학을 굽이치며 불음(佛音)을 전했을 범종을 저토록 가둬놓는 것이 과연 법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진정 진짜와 가짜는 무엇인가. 가짜는 진짜를 위해 죽도록 울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상원사 범종은 언제 소리를 낼 것인가. 갇혀 있는 진짜를 보며, 겨울바람을 홀로 맞고 있는 가짜를 보며 묘한 생각이 일었다.


눈 속에서 만난 인광 주지 스님은 눈처럼 포근하고 편했다. ‘승려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스님에게서 받은 울림이 결국 세상을 밝게 할 것이다. 스님은 상원사는 어머니 같아서 도무지 내려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스님은 달마다 오대광명(五臺光明) 포살법회를 갖고 있다. 법회가 열리면 멀리 서울 조계사, 봉은사에서도 신도들이 몰려온다. 스님은 맑은 몸과 정신을 지니고 바른 행동을 하면 오대광명이 찾아온다고 이른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몸이 맑아집니다, 생각이 밝아집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 가피로 소원이 이뤄집니다.”


 

▲ 눈 속에서 만난 주지 인광 스님은 따뜻한 차 한잔으로 객을 맞아준다. 

 

 

상원사에는 오래된 보물보다 훨씬 더 값진 보물이 있다. 바로 상원사의 선방이다. 바람 맑고 볕이 밝으며 위로 적멸보궁이 있으니 화두를 붙들고 마음 씻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인광 스님은 상원사 선방에 들면 “기상은 살아있으면서 고요해진다”고 말했다. 명성이 쌓여 동안거나 하안거 때는 전국에서 스님들의 안거 신청이 밀려든다. 일찍이 지허 스님은 상원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난 이야기를 ‘선방 일기’로 남겼다. 고독한 선승이면서 또한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수행자의 모습이 담백하게 그려져 있어 감동을 준다. 잠깐 상원사 선방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본다.


결핵에 걸린 스님이 동안거 중에 각혈을 했다. 떠나가야 했다. 결핵은 전염병이고 선방은 대중처소이기 때문이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한 40대의 스님이어서 의지할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으면서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은 사람들은 돈을 모으기로 했다. 바랑 속을 뒤지고 호주머니를 털었다. 스님 둘은 시계를 풀어 놓았다. 선객들이 무슨 돈이 있을 것인가. 모인 돈은 너무도 작았다. 그래도 병 든 스님은 감사하고 죄송하다며 바랑을 걸머졌다. 지허 스님은 떠나는 스님을 이렇게 묘사했다.


“눈 속에 트인 외가닥 길을 따라 콜록거리면서 떠나갔다. 그 길은 마치 세월 같은 길이어서 다시 돌아옴이 없는 길 같기도 하고 명부(冥府)의 길로 통하는 길 같기도 하다. 인생하처래 인생하처거(人生何處來 人生何處去)가 무척이나 처연하고 애절하게 느껴짐은 나의 중생심 때문이겠다. 나도 저 길을 걷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선방일기’ 중 ‘병든 스님’에서)

 

 

▲ 상원사로 가는 순백의 눈길. 그 위를 걷는 잿빛의 승복은 그냥 그대로 환희롭다.

 


아마도 병 든 스님은 우리가 올라온 그 길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눈길에 몇 번이나 피를 토했을 것이다. 지허 스님도, 각혈을 하며 눈길을 떠난 스님도 이 세상에는 있지 않다. 그래도 선방은 남아 또 다른 선객들이 자신을 닦고 있다. 멀고 긴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 선객은 달라도 진리는 같을 것이니, 지금도 누구는 위장병을 앓고, 누구는 수마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상원사 선방은 ‘천고의 지혜로 깨어있는 마음’을 닦는 정진의 터전이요, 한국불교의 미래로 열려있는 보물인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리는 눈이 더없이 포근해 보였다.

 

본지 고문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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