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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우과창누(牛過窓檽)

기자명 법보신문

코끼리와 물소의 꼬리에서 자리와 이타의 간극을 보다

창살에 걸린 코끼리 꼬리
제거해야 할 마지막 번뇌


창살 통과 못한 물소 꼬리
탈출구 알려주는 자비마음


홀로 깨달음에 만족한다면
자비의 가르침에 위배 돼

 

오조(五祖) 법연(法然) 화상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물소가 창살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머리, 뿔, 그리고 네 발굽이 모두 창살을 통과했는데, 무엇 때문에 꼬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인가?”

무문관(無門關) 38칙 / 우과창누(牛過窓檽)

 

 

▲그림-김승연 화백

 

 

1. 선종도 튼튼한 이론 토대가 있다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그러니까 동아시아에서 가장 특징적인 불교는 선종(禪宗)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선종 전통이 이론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적인 깨달음을 지향했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 모든 이론적 작업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종 전통에도 나름대로 탄탄한 이론적 토대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국의 종밀(宗密, 780~840) 스님이나 우리나라의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이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선종의 수행도 나름대로 교종의 이론 체계로 설명 가능하다는 거지요. 물론 선종의 이론은 글자 그대로 강을 건너면 버려야 하는 배와 같은 방편일 수밖에 없지요. 이 점에서 선종은 배에서 절대 내리지 않으려는 교종 전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과연 선종은 어떤 이론에 근거하고 있을까요.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선종이란 방대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쟁쟁한 선사들의 선어록(禪語錄)을 넘겨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선종 역사를 빛나게 했던 선사들은 어떤 경전에 의지해서 제자들을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바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이 책을 동아시아 불교의 동력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선각자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바로 소성거사(小性居士) 원효(元曉, 617~686)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효가 스님으로 청정한 생을 마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동침하면서 스님으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스스로 어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설총이란 자식을 낳으려고 동침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임신한 요석공주를 미혼모로 만들지 않으려고 동침한 척 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계율을 어기자마자 그는 바로 민중들을 교화하려고 세상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가 평상시 자리(自利)와 함께 강조했던 이타(利他)의 길로 과감하게 나아간 겁니다. 민중 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이미 그는 계율을 어겨서 검은 떼가 묻은 상태였기 때문이지요. 민중들도 원효를 자신의 동료처럼 품어주었습니다. 요석공주와의 동침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아지는 대목이지요. 분명 스캔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원효는 그 스캔들을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는 발판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중생들을 어둡게 만드는 온갖 번뇌의 시커먼 떼를 털어내려면, 손에 검은 떼를 묻히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원효는 신라의 큰 스님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자리와 이타를 행하는 소성거사로 살게 된 것입니다.


2. 이타의 차원에서는 생멸도 진여

 

‘대승기신론’에 주석을 달면서, 원효는 자리와 이타라는 대승불교 정신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자리(自利)는 집착으로 들끓는 마음을 고요한 물처럼 만드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타(利他)는 고요한 물이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모습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승기신론’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리는 생멸(生滅)의 마음이 진여(眞如)의 마음으로 변하는 것이고, 이타는 진여의 마음이 생멸의 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타의 차원에서 생멸의 마음은 자리의 차원에서 생멸의 마음과 다른 겁니다. 자리의 차원에서 생멸의 마음은 스스로 집착해서 세계를 왜곡해서 보는 마음이라면, 이타의 차원에서 생멸의 마음은 깨달은 마음이 중생들의 고통과 슬픔을 담아서 그 고통과 슬픔의 빛깔을 띠는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조금 어렵나요.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울 대용으로 쓰였던 고요한 물, 즉 지수(止水)를 비유로 들어보도록 할까요.


원래 고요한 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거울삼아 자신의 외모를 정돈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살게 되면서, 고요한 물은 탁해지고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생멸의 마음이지요. 물은 애써 노력해서 미꾸라지를 잡아서 쫓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당연히 탁하고 요동치던 물은 이제 고요한 물로 돌아간 것이지요. 진여의 마음이 달성된 것이고, 마침내 자리가 이루어진 셈이지요. 이제 다시 고요한 상태를 회복하니, 물은 이제 사람들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추한 사람은 추하게 비추고,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답게 비출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지만 고요한 물 자체는 그대로 고요한 채로 있는 겁니다. 단지 그 표면에만 다양한 것들이 명멸할 뿐이지요. 이타의 차원에서 진여의 마음은 바로 생멸의 마음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제 구분이 되시나요. 미꾸라지가 분탕질을 해서 생멸을 일으키는 마음과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비추느라 생멸을 일으키는 마음은 이렇게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겁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서른여덟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데 사용할 준비가 이제 다 갖추어진 셈입니다. 오조산(五祖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법연(法然, ?~1104) 스님은 우리에게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물소와 관련된 화두를 하나 던집니다. 그 물소의 “머리, 뿔, 그리고 네 발굽이 모두 창살을 통과했는데, 무엇 때문에 꼬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인가?” 많은 선지식들은 이 화두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몸은 이미 출가해서 수행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세속의 욕심을 버리지 않아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스님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화두라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는 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설급고장자여득도인연경(佛說給孤長者女得度因緣經)’이라는 경전에는 몸통은 빠져나왔는데 꼬리는 빠져나오지 못한 코끼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지요. “급고독이라는 부자의 딸이 깨달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부처가 설명한다”는 취지의 제목을 가진 이 경전에는 코끼리의 꼬리는 분명 아직도 버리지 못한 탐욕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3. 홀로 깨달음에 만족해선 안된다

 

법연 스님은 선사입니다. 선사는 앵무새처럼 앞 사람의 경전을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된 선사가 남이 만든 각본과 감독의 지시대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연기, 각본, 그리고 연출도 모두 스스로 해내야 하니까요. 법연 스님도 분명 ‘불설급고장자여득도인연경’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 물소의 꼬리에 대해 어떤 답을 할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법연 스님이 과거 경전에 의지해야 풀릴 수 있는 화두를 냈을까요. 선사가 당신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1,000년 뒤 우리들에게 경전의 문자에 의지하라고 가르칠 리 만무합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선종의 종지 중 하나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법연 스님의 화두는 정말 뚫기 어려운 화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몸통은 통과했지만 아직도 창살을 통과하지 못한 물소의 꼬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창이 있는 방을 생각해보세요. 그곳에 자유를 잃고 갇혀 있는 물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남달랐습니다. 구속에 적응하기보다는 그 물소는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자유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인지, 그 물소는 창살을 지나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의 대로가 펼쳐진 겁니다. 이제 그냥 아무 곳이나 뛰어가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몸통이 창살을 통과했다면, 꼬리는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요. 몸통이 지나자마자 창살이 좁아들어 꼬리가 잡혔다는 황당한 상상은 하지 마세요. 선불교가 그렇게 황당무계한 사유체계는 아니니까요. 그럼 무엇일까요. 창살을 통과하지 않는 그 물소의 꼬리는? 자유를 되찾은 그 물소는 혼자서 자유를 만끽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신이 탈출한 방에는 아직도 동료 물소들이 갇혀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물소들이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탈출구를 동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꼬리를 창살에 남겨둘 수밖에요. 이것이 자비의 마음, 다시 말해 이타의 마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불설급고장자여득도인연경’에 등장하는 코끼리의 꼬리와 법연 스님이 말한 물소의 꼬리는 다른 꼬리였던 겁니다. 전자가 고요한 물이 되기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미꾸라지와 같은 것이었다면, 후자는 깨달은 자가 검은 떼가 묻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고 내미는 자비의 손이었던 겁니다.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원효는 코끼리의 꼬리를 창살에서 빼어냈다면, 소성거사가 되면서 원효는 물소의 꼬리를 민중 속에,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드리웠던 겁니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원효는 말합니다.

 

▲강신주

“‘모든 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 온 세상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이다.” 집착이 사라진 공(空)의 상태에 머물면서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고 뻐기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홀로 얻은 깨달음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자비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일이니까요. 합장!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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