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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해자

기자명 법보신문

성벽 따라 난 물구덩이
적 침입 막아주는 방책
부끄러움은 삶에 있어
막행막식 막는 절제력

 

지구에서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고도의 사회성을 지닌 종(種)이 바로 인류라고 한다. 인류는 다양한 사회를 구성하며 발전시켜 왔고, 더불어 고도의 정신문명도 발달시켜 왔다.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왜 다른 종의 생명체는 인류와 같은 길을 걷지 못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두 가지 요인 때문은 아닐 것이며, 매우 많은 요인들이 얽혀 오늘날의 사회와 문명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 많은 요인들 가운데, 한 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 가능할까. 필자는 참괴(愧)라는 것을 꼽고 싶다. 참괴는 두 가지 단어로 구성된 것으로, 참은 자신의 죄나 허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괴는 자신의 죄나 허물에 대해서 남을 의식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부끄러워 함’이다. 이에 대해 ‘화엄경’ 59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지고 있다.


“보살의 바른 법(正法)의 성(城)은 반야로써 성벽을 삼는다. 부끄러움은 깊은 해자(深塹)가 되고, 지혜는 성가퀴(却敵)가 된다.”


정법이라는 성이 온전하게 지켜지기 위해서는 반야로 이루어진 담장과 부끄러움으로 마련된 깊은 해자, 그리고 적이 오는 것을 지켜보고 물리치는 성가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해자란 성 주위에 구덩이를 파서 물이 흐르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적이 쉽게 성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든 방책인 셈이다. ‘화엄경’에서는 이 해자를 부끄러움에 비유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 일게다.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제자들에게 ‘비구들이여,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고 말씀하신다. 부끄러워 할 줄 알면, 말과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생각마저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단속하며, 경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부끄러움을 소극적인 삶의 방식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자기 절제가 없어진다. 말 그대로 막행막식(莫行莫食)하게 된다. 부끄러운 줄 모르니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무데서나 방뇨를 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하며, 거침없는 애정행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먹는 것도 가리지 않으니, 몸에 좋다고 하면 그것이 뭐가 되었든 거침없이 먹는다. 오죽하면 인육으로 만든 캡슐까지 몰래 거래가 될까. 남의 눈은 아랑곳 않고, 나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들어설 자리는 없게 된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스님이나 목사, 신부와 같은 성직자들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인들도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직자의 제일 덕목은 도덕성이다.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고, 신도들의 눈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신도들 눈만은 두려워해야 한다. 만약 그것도 싫다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할 것이다.

 

▲이필원 박사

그리고 이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위가 무애행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한 무애행은 욕망과 번뇌로부터 벗어난 행(行)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이지, 막행막식이 결코 아니다.

 

이필원 동국대 연구교수 nikay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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