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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겠어요

12월이 왔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간이다. 고향에 작은 사찰이 있다. 몇 해 전에 들렸을 때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있었다. 그 절에서 보내준 캘린더를 안방 벽에 걸어두고 매월 한 장씩 넘기며 보냈다. 11월 달력을 넘기니 부처님의 초상이 있는 12월이 펼쳐졌다. 문득 올해 부처님이 줄곧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에게 20세기 팝 뮤지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물으면 주저 없이 미셸 르그랑(Michel Legrand)이라고 할 것 같다. 처음 들은 그의 음악은 ‘42년의 여름(Summer of 42)’이라고 기억한다. 그 아름다운 선율에 내 영혼이 한없이 먼 곳으로 표류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 들은 것들이 ‘네 마음의 풍차(Windmills of Your Mind)’와 ‘셸브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이다. 이들 어느 하나도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팝 뮤직의 반열에서 빠트릴 수 없는 불후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셸브르의 우산’은 카트린 드뇌브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이다. 누군가 이 프랑스 노래를 영어로 ‘기다리겠어요(I will wait for you)’로 바꾸어 참으로 아름다운 가사를 붙였다. 미셸을 포함하여 나나 무스쿠리, 코니 프란시스, 쟈니 마티스, 루이 암스트롱 등 수많은 걸출한 뮤지션들이 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기다리겠어요’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록 영원히 기다려야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여름이 천 번 지나가도 나는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당신이 내 곁으로 돌아 와 내 품에 안길 때까지. 당신이 내 팔에 안겨 한숨지을 때까지.” 정처 없이 비바람 을 맞으며 낯선 거리를 헤맬 때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떨까? 누군가 고향에서 그 험한 여정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능엄경 염불원통장에서 초일월광불(超日月光佛)이 대세지보살에게 염불의 깊은 의미를 설하고 있다. 경에 시방의 부처님은 중생을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엾이 여기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식이 품을 떠나 도망치면 어머니가 아무리 자식을 생각해도 소용없다. 오직 돌아와 품에 안기기만을 영원히 기다릴 뿐이다.
‘기다리겠어요’의 다음 구절이다. “어느 곳에서 헤매건, 어느 곳으로 가건. 매일 기억하세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 가슴 속에 믿으세요. 내 가슴 속에 내가 아는 것을.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염불의 깊은 뜻은 우리를 자식처럼 한없이 사랑하는 부처님이 우리가 그 품에 돌아오기를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 것에 있지 않을까.


염불원통장에 두 사람이 있어 한사람은 다른 사람을 한마음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를 전혀 잊고 있다면 둘이 만나도 만나지 않고 보아도 보지 않는다고 설했다. 그러나 서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면 수많은 생을 쫓아 마치 그림자가 모습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서로 헤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참으로 어수선하게 한해를 보낸 것 같다. 세모가 되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보낸 무수한 시간들이 가슴 바닥에 가득히 쌓였음을 느낀다. 마치 보도 위에 수북이 쌓인 낙엽처럼. 쟈크 프레벨은 고엽(les feuilles mortes)에서 “북풍이 낙엽들을 실어 나르네요. 망각의 싸늘한 밤에. 추억도 미련도 함께”라고 노래했다.

 

▲이기화 교수
부처님이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고 한 해를 지냈다면 어땠을까? 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회한도 미련도 없는 시간이 미셸 르그랑의 아름다운 음악처럼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이기화 교수 kleep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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