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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김득신, ‘벼타작’

기자명 조정육

부처님, 게송을 읊어 무지한 브라만 일깨우다

“수행자여! 나는 스스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얻고 있소. 당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어는 것이 어떻겠소?”


부처님이 코살라국의 에카사라라는 마을에 계실 때였다. 아침에 탁발하는 도중 어떤 브라만의 집 앞에 멈추어 섰다. 브라만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파종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부처님이 탁발하러 도착할 때는 마침 브라만이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브라만은 자신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부처님이 수행자입네하며 놀고먹는 것이 눈에 거슬려 비아냥거리며 한 말이었다.


부처님이 대답했다.


“브라만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얻고 있소.”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브라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나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당신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얻는 것을 보지 못했소. 그런데 당신이 농사를 짓는다니…. 도대체 당신의 쟁기는 어디 있소? 당신의 소는 어디 있으며 당신은 대체 무슨 씨를 뿌린단 말이오?”
그러자 부처님이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믿음은 나의 씨앗이요, 지혜는 나의 쟁기
 신구의 악업을 제어하는 것은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네
 정진은 내가 부리는 소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으며
 행한 일은 슬퍼하지 않으며 나를 편안한 마음으로 데려가네
 나는 이와 같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감로의 열매를 거둔다네”

 

부처님의 게송을 들은 브라만은 금세 그 뜻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은 브라만은 방금 전의 거만한 표정을 바꾸며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참으로 뛰어난 농부이십니다. 부처님께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시는 것은 불사(不死)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부디 이 음식을 받아주십시오.”


브라만은 탁발하러 온 부처님께 음식을 바쳤다. 부처님은 그 음식을 물리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게송을 읊고 음식을 얻지는 않는다. 그와 같은 일은 지견(知見)이 있는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게송을 읊은 대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깨달은 사람은 오직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이 생활이다. 그러므로 브라만이여. 온갖 번뇌에 얽혀 후회가 따르는 행동을 하지 말고 성자에 대해 진정한 마음으로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와 같이 음식을 공양하면 공덕을 원하는 사람의 복전이 되기 때문이다.” 
 

 

▲김득신, ‘벼타작’부분 《사계풍속도》, 1815년, 비단에 연한 색, 95.2×35.6cm, 삼성리움미술관

 

 

고정관념을 벗어난 그림읽기


김득신(金得臣:1754-1822)의 ‘벼타작’은 ‘사계풍속도’에 들어있는 여섯 번째 그림이다.  ‘사계풍속도’는 봄부터 겨울까지의 사계절 풍속을 여덟 장면에 담은 그림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이 그림은 단순히 가을이 되어 벼타작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다. 마름과 소작인들 간의 갈등이 은근하게 드러나 있다. 코흘리개의 손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쁜 수확 철에 소작인들은 타작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지주를 대신해서 나온 마름만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한가한 사람이다. 소작인들을 감시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목이 컬컬할 때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핀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 명의 소작인들은 통나무에 볏단을 내리치며 정신없이 타작하기에 바쁘다. 그 곁에서 한 사람은 타작할 볏단을 들어 올리고 있고, 삿갓 쓴 농부는 흩어진 나락을 빗자루로 쓸고 있다. 지나가던 스님은 행여 시주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지켜보는데 낯선 사람의 등장에 신경이 곤두 선 강아지가 잽싸게 뛰어나온다. 뒤쪽으로는 소등에 볏단을 싣고 오는 사람도 눈에 띈다. 그 와중에 암탉과 장닭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요령껏 모이를 주어먹는다. 벼타작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사소한 주변 풍경까지 시시콜콜 설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김득신의 성격이 묻어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타작’은 당시의 신분제의 모순과 계층 간의 갈등이 은근하게 풍자되어 있다. 그러나 풍자의 방법은 신랄하거나 비판적이기보다는 해학적이다. ‘익살스러우면서도 품위 있는 말이나 행동’의 풍자의 정의에 알맞게 유머러스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단순히 늦가을에 타작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지나칠 만큼 직설적이지 않다.


김득신의 ‘벼타작’과 비슷한 작품을 김홍도도 남겼다. 두 작품이 구도나 인물배치가 거의 비슷해 김득신이 김홍도의 작품을 참고해서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가을에 타작하는 장면이 당시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흔한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부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모내기, 피 뽑기, 밭 갈기, 타작 등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농사를 짓는다. 여인들은 누에치고 길쌈하고 베 짜는 일을 하면서 자식을 기르고 세참을 내 가고 집안일을 한다. 이런 ‘경직도(耕織圖)’류의 그림은 궁궐에 사는 왕과 세자가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알 수 있도록 제작된 경우가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벼타작’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음주상(飮酒像)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 논문에는 ‘벼타작’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견해가 담겨 있었다. 마름으로 생각했던 한량은 소작인들을 감시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농부들을 도와주고 감독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마름이라 부르기보다 ‘권농관(勸農官)’이라 불러야 타당하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모내기철부터 추수할 때까지 모든 농사현장을 그린 그림에는 권농관이 있었다. 특별히 감시가 필요하지 않는 곳에도 권농관이 있었다. 그걸 무시한 채 나는 ‘벼타작’속의 인물들을 오로지 계층 간의 갈등관계로만 읽었다.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파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좋은 논문 한 편이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셈이다. 이전까지의 나는 부처님께 ‘농사’에 대한 게송을 듣기 전까지의 브라만과 같은 수준이었다.


부처님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풍성한 ‘감로의 열매’가 열렸다. 바이살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해에 바이살리에 혹심한 가뭄이 들었다. 굵어죽는 사람이 넘쳐나고 질병이 유행하자 거리 곳곳에는 버려진 시체가 즐비했다.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은 종교지도자를 불러 악귀를 쫓아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바라문교(힌두교)에서 하는 대로 제사를 지내자는 의견,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에게 부탁하자는 의견, 아지비카교의 교주를 찾아가자는 의견 등이 분분했다. 결국 그 어떤 종교도 만족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부처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죽림정사에 있던 부처님이 소식을 듣고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5백 명의 비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부처님이 강을 건너 바이살리의 영토에 첫 발을들여놓자마자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큰비가 내렸다. 쩍쩍 갈라진 땅바닥이 순식간에 빗물로 채워졌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부처님은 바이살리에서 이레 동안 설법을 펼치셨고 8만4천명이 불교에 귀의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는 유명한 불이법문(不二法文)을 펼친 유마거사(維摩居士)도 바이살리 출신이다.  

 

 

▲김홍도, ‘서당’ 《사계풍속도》, 종이에 연한 색,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서당’

 


 

진실은 언제든 밝혀진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다. 김홍도의 ‘서당’은 진짜 작품이고 작자미상의 ‘서당’은 김홍도의 작품을 보고 베낀 가짜다. 먼저 김홍도의 ‘서당’을 보면, 채색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도 선의 강약과 색의 농담변화로 인해 인물의 표정과 특징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먹색의 변화는 훈장님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훈장님의 옷은 먹으로 그렸다.

 

허리띠도 먹으로 그렸다. 그런데 옷과 허리띠가 분명하게 구분된다. 가짜 그림의 훈장님에서는 구분이 어렵다.

 

진짜 작품에서의 선은 마치 소리를 옮긴 듯 살아 있다. 울고 있는 아이의 옷주름 선은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어진다. 선을 그린 색도 진한 색과 연한 색이 뒤섞여있다. 떨고 있는 아이의 움직임을 보여주려 함이다. 웃고 있는 아이들의 옷주름 선은 끊어짐 없이 이어졌다. 그 대신 연한 색으로 그렸다. 김홍도가 선과 색을 통해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고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가짜 그림에서는 그런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아이들의 머리카락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 가짜에서는 아이들이 마치 가발을 쓴 듯 어색하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은 낙관이다. 낙관과 제시는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구성 요소다. 작가는 낙관을 아무 데나 함부로 찍지 않는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게 도장을 찍어 겸손함과 자긍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낙관이다. 가짜 그림에서는 낙관이 마치 주인공 같다. 김홍도라면 어림없는 생각이다.


부처님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시기하고 음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머물러 계실 때의 일이었다. 부처님을 질투한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이 계략을 꾸몄다. 친차라는 예쁜 여인을 이용해 부처님을 모함하기로 한 것이다. 몸을 예쁘게 단장한 친차는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고 해질녘에 기원정사로 향했다.

 

그녀는 기원정사 부근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왔다. 사람들 눈에는 영락없이 기원정사에서 자고 오는 것처럼 보였다. 몇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물어보면 부처님의 방에서 자고 오는 길이라고 아예 드러내놓고 거짓말을 했다. 이윽고 아홉 달이 지났다. 배가 부른 친차가 부처님을 찾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는 장소에 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부처님의 아이를 가졌으며 만삭이 되었으니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소리쳤다. 법문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네 마리의 쥐가 나타나더니 친차의 옷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불록한 배에서 나무그릇이 떨어졌다. 가짜 임신부였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욕을 하며 달려들어 그녀를 쫓아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못된 수행자들이 순다리라는 여자 수행자를 죽여 부처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은 곧 규명됐다. 부처님과 불교 교단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공경을 받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진리를, 분노한 사람에게는 평안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가르침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업보(業報)’다. ‘업(Karma)’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하는 것과 그 세력’을 말한다. 선악의 업에 의해 과보를 받기 때문에 업과(業果)라고도 한다. 석가족이 멸망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업보에 의해서다. 사연은 이렇다.  


석가족은 이웃한 코살라보다 힘이 약해 그들의 권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코살라국의 국왕인 프라세나지트는 ‘진리의 구현자’인 부처님을 예배하고 존경했다. 프라세나지트왕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왕비 말리카의 힘이 컸다. 말라카는 진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왕이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프라세나지트왕은 그가 다스리는 영토 안에 불교 신자가 많은 것을 알고 석가족에서 후비를 맞아들이고 싶어했다. 왕의 뜻을 알게 된 석가족은 난처한 입장이 됐다. 석가족은 예전부터 동족 결혼만을 고수해 다른 종족과 결혼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코살라국은 강대국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요구였다. 그래서 마하나만이 종한테 낳은 딸 바사바를 공주라 속여 프라세나지트왕의 후비로 보냈다. 말라카는 불교에 귀의했지만 바사바는 부처님의 설법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라세나지트왕과 바사바 사이에 왕자 비두다바가 태어났다. 어느 날 비두다바는 외가인 석가족의 나라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비로소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었음을 알았다. 심한 분노와 모욕감을 느낀 비두다바는 언젠가는 꼭 석가족에게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비두다바는 아버지 프라세나지트왕이 밖에 나가고 없는 사이에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망명길에 오른 왕은 마가다국에 망명 가는 도중 죽었다. 새로 왕이 된 비두다바는 곧바로 석가족을 공격하기 위해 카필라 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길가의 마른 나무 아래 부처님이 앉아 있었다. 부처님은 비두다바왕이 태자 시절에 종의 자식이라는 것을 안 아버지가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유폐시킨 것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비두다바왕은 진격하던 마차에서 내려 부처님께 예배하고 물었다.


“이 근처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마른나무 아래 앉아 계십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대왕이시여! 친척의 그늘은 서늘합니다.”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린 왕은 군대를 돌렸다. 이렇게 세 차례나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비두다바왕이 석가족을 공격한 것은 단순한 원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웃나라를 침략해서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부처님을 봐서 공격을 멈췄지만 침략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드디어 네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 부처님은 석가족이 더 이상 업보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비두다바의 군대는 석가족의 수도 카필라바스투를 공격했다. 비두다바의 외할아버지 마하나만은 모든 사태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외손자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다시 떠오를 동안만이라도 사람들이 피난 가는 것을 막지 말아 달라.”


마하나만은 물속에 들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서 나무뿌리에 매어 놓고 떠오르지 않았다.


석가족을 멸망시키고 궁궐에 돌아온 비두다바는 배다른 형 제타 태자도 죽였다. 제타 태자는 수닷타 장자와 함께 기원정사를 세운 사람이었다.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침략 전쟁에서 승리한 비두다바는 그러나 이레만에 천재지변으로 죽었다.

 

▲조정육

강에 떠내려갔다고도 하고 연못 가운데 만들어놓은 전각에 불이 나서 타 죽었다고도 한다. 코살라국은 나중에 더 큰 강대국 마가다국에 흡수됐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따로 없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을 탄생시킨 위대한 석가족은 지상에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췄다. 부처님마저도 막아줄 수 없었던 업보의 결과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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