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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연재를 마치며 [끝]

기자명 법보신문

자연·인간 공존 티베트 전통 이어지길

자연에 순응하는 삶에서
겸손·공경의 미덕 배워
무분별한 현대문명으로
변질되는 모습 안타까워

 

 

▲디지털 문명시대에 티베트는 더욱더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사진은 관광객들 앞에서 티베트만의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를 춤과 노래로 표현하는 뮤지컬의 한 장면이다. 지금 티베트 전역에서는 이방인들에게 현대화된 방식으로 티베트 알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히말라야 오지 속에 숨어있는 티베트가 주는 매력은 무엇보다 문명세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거룩하고 성스런 ‘자연환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티베트)에 진입하려면 숨을 헐떡거리는 고산증을 감수해야 한다. 처음 이방인들이 티베트에 와서 놀라는 것은 해발 4000미터 상공에 펼쳐있는 일망무제의 푸른 초지와 호수인지 바다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천수(天水)이다. 모두들 믿기지 않는 자연환경의 경이로움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어쩌다 대하는 설산과 대자연의 풍광이 우리에게는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늘 그곳에서 살아온 티베트인들도 같은 생각을 할까. 그들도 그렇게 경탄하며 매일 매일 황홀해 하며 살아갈까. 티베트인들은 자연이 주는 특혜를 향유하고 감사하면서도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 또한 대자연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대자연의 심술이 무서운 것이다. 자연은 때로는 친근하고 삶의 자양분을 주지만 무서운 악마와도 같이 변하는 것을 종종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베트인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자연을 향해서 평화로운 삶을 기원했다.


티베트인들의 삶은 단순하다. 바람만 부는 고원에서 무슨 놀이가 있으며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에서 무슨 다양한 재미가 있으랴. 고원에서 방패연을 띄우거나 넓은 초원에서 느릿느릿한 기린만 있어도 삶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티베트인들은 사방에 존재하는 불교사원을 자주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일 매일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치며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티베트인들이 불교사원에 매일 가는 이유는 나름 내면적인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죽음’에 대한 원시적 두려움과 궁금증 때문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언제가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황량한 고원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불안감이 있다.


사원에는 전문적인 죽음준비 가이드가 항상 대기하고 있는데 그들을 외부에서는 ‘라마승’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어렸을 때(대략 5~10세), 사원에 출가하여 줄곧 티베트불교에서 중요시 하는 죽음에 관한 경전과 수행을 평생 공부해온 죽음의 전문가들이다. 그들 위로는 활불(活佛)이라 불리는 ‘깨달은 자’가 존재하는데 그는 자신의 법력으로 윤회(輪廻)의 업을 끊어버리고 환생을 주관할 수 있는 신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일반 티베트인들은 그들을 평생의 선생으로 모시고 ‘생노병사’를 의탁하며 살아간다. 사실 그들은(라마승과 활불) 아무것도 없는 고원에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자신들을 통솔하고 리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인 ‘멘토’들이다. 그들 덕분에 티베트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일찍부터 이해할 수 있었고 죽음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음은 그저 초원에서 야크를 몰고 유목하다가 초지가 부족하면 옆의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티베트인들은 외부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장법(葬法)을 추구한다.


라싸의 어느 사원에서 불공을 드리는 젊은 아낙네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머리에 병이 나서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아마 6개월 길어도 1년 안에 죽을 거예요. 그래서 다음 생은 어디서 태어날까 궁금해요.” 덤덤히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내면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처럼 좌절하거나 낙담한 표정은 아니었다. “죽으면 천장(天葬)을 하려고요. 식구들에게 이미 부탁했어요.” 천장(天葬)이 무엇인가? 티베트인들이 하늘에 지내는 장례 방식이다. 이방인들은 천장을 눈으로 확인하면 화들짝 놀란다. 인간의 육신을 처참하게 해부하는 이 낯선 풍경에 모두들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 그들을 보면 티베트인들은 “이봐요, 여기서 이보다 더 현실적인 장례는 없어요. 알고나 떠들어요”라고 힘주어 말한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에 갇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이웃과 사회,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티베트인들은 종교의 목적을 충분히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혼자 살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보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세상은 자기 힘만으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티베트인들은 일찍부터 깨달았다. 자연과 상호 공생해야 하고 야크와 양이 친구가 될 수 있고 히말라야의 설수(雪水)가 흐르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오감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사실 요사이 이런 티베트가 은근히 걱정되고 염려된다. 티베트가 세계인의 관광지로 전락하고 있으며 천년의 세월동안 누적시킨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경계를 허물고 들어온 외부의 인적 물적 자원으로 인해 티베트만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으며 절대적 권위였던 사원은 붕괴되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멘토들인 라마승들과 활불은 환속하거나 사라지고 있다.


티베트를 가는 이유는 학문연구의 목적이 있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티베트를 감성과 감각으로 알기 위해서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감의 감각을 세워 티베트인들의 생동적인 풍경을 맛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문명 세계로 내려와 그들의 삶(죽음 포함)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소개하고 싶었다. 티베트를 관념적이고 이론적이기보다는 보고 느낀 경험과 사건과 일상을 알리고 싶었다. 또 티베트가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생명성과 독보적인 인문학적 사유들을 알리고 싶었다. 이는 반대로 티베트가 사람들에게서 잊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체에 있어서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타인들로부터 잊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은 세계화시대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두 다 같이 디지털 문명의 세계 속으로 참여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중국 속의 티베트도 이 시대의 조류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족과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으며 낯선 이방인들과도 교류와 협력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더 문명화된 세계에서 이제는 나를 포함한 전문적인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티베트가 받길 희망한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티베트를 부탁한다.

 

심혁주 한림대 연구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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