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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김정희, ‘불이선란’

기자명 조정육

화선일치(畵禪一致)의 툭 터진 자유로움, 그 속에 추사가 있다

올바른 가르침이란 어떤 것일까. 그 가르침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부처님의 교화를 받은 후 인생이 백 팔 십도로 바뀐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준 사람은 앙굴리말라일 것이다.

삿된 가르침으로 연쇄살인마가 된 앙굴리말라

석가족이 멸망하기 전의 일이었다. 프라세나지트왕이 다스리는 코살라국의 슈라바스티에 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바라문은 5백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 아힘사라는 청년은 체격도 건장하고 얼굴도 훤칠했다. 어떤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잘 생긴 청년이었다. 바라문의 부인도 아힘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날 바라문이 외출을 했다. 그 틈을 이용해 바라문의 부인이 다가와 제자를 유혹했다. 기가 막힌 아힘사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스승의 부인은 수치심에 몸을 떨며 아힘사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스스로 찢었다. 머리카락도 마구 헝클어뜨렸다. 누가 봐도 겁탈당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저항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바라문이 집에 돌아왔다. 바라문의 아내는 남편을 보자마자 아힘사가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모함했다. 바라문은 분노했다. 어떻게 하면 제자를 파멸시킬 수 있을까 몇 날 몇 일을 궁리했다. 며칠 후, 드디어 바라문이 아힘사를 불렀다. 바라문은 아주 은밀하게 제자에게 속삭였다.

“너의 수행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관문만 통과하면 너의 수행은 완성될 것이다.”

아힘사는 스승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스승님. 그 한 가지 관문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일부터 아침 일찍 성 밖으로 나가 백 사람을 죽이되, 한 사람한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들면 된다.”

아힘사는 너무나 의외의 가르침을 받고 놀랐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던 아힘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스승의 가르침대로 실행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성 밖으로 나가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목걸이라는 뜻으로 ‘앙굴리말라’는 ‘손가락 목걸이를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의 악명은 점점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정신없이 도망쳤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왕에게 달려가 호소했다. 그 사이 앙굴리말라는 아흔 아홉 개의 목걸이를 목에 걸게 됐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만 더 죽이면 백 개의 목걸이가 만들어질 순간이었다. 앙굴리말라는 눈을 번득이며 살인할 대상을 찾았다. 저 멀리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옳다구나 싶었다. 저 여인만 죽인다면 나의 수행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런데 가까이 온 여인의 얼굴을 본 앙굴리말라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한동안 갈등하던 앙굴리말라는 마침내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때 기원정사에 계시던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그 상황을 전부 보고 계셨다. 자칫하다가는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패악무도한 사건이 발생할 상황이었다. 부처님은 살인을 막기 위해 앙굴리말라를 찾아갔다. 어머니를 죽이려했던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이 나타나자 대신 부처님을 죽이려했다. 부처님을 보자 칼을 들고 달려갔다.

“꼼짝 말고 거기 섰거라!”

앙굴리말라가 소리쳤다.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아까부터 여기에 가만히 서 있다. 앙굴리말라여, 네가 멈추어라.”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칼을 휘두르며 달려가도 부처님은 결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다시 소리쳤다.

“어째서 당신은 서 있지 않으면서 서 있다고 하고, 어째서 나는 서 있는데도 서 있지 않다고 하는가.”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해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고, 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자제심이 없기 때문에 서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앙굴리말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 됐구나. 앙굴리말라는 마치 오랜 꿈속에서 깨어난 듯 자신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그는 마침내 칼을 내던지고 땅에 엎드려 부처님께 용서를 구했다. 

▲ 김정희, ‘불이선란’, 1853-1855년 추정, 종이에 먹, 55×31.1cm. 개인

난초를 살린 참신한 시도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세한도(歲寒圖)’와 더불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대표작이다. 추사가 과천에 살면서 인생 말년에 그의 시동 달준이를 위해 그려준 작품이다.  ‘불이선란’은 그림을 그림답게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자유롭고 걸림 없는 상태에서 제작됐다. 그가 평소에 ‘난초 그리는 법은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깝고, 그림 그리는 기술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듯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마음을 비우고 무심한 경지에서 붓을 댄 자의 허허로움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림에 적힌 제발(題跋)을 먼저 살펴보자.

①“난초를 안 그린 지 20년 만에(不作蘭畵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렸네(偶然寫出性中天)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閉門覓覓尋尋處)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이네(此是維摩不二禪)
 만약 어떤 사람이 억지로 요구하며 구실을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유마거사의 무언으로 사양하리라.(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만향(曼香)”

②“초서와 예서,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구경이 또 삼가 쓰다(漚竟又齋)”

③“애초 달준이를 위해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번만 가능하고 두 번은 불가하다.(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선객노인(仙客老人)”

④“소산 오규일이 보고 강제로 빼앗으니 우습다(吳小山見而豪奪, 可笑)”

▲ (2)현재의 그림 모습 (3)제발이 적힌 순서 (4)제발을 임의적으로 변경한 모습 (5)오른쪽 하단에 제발을 임의적으로 첨가한 모습

 ‘불이선란’은 추상적으로 생긴 난을 중심에 그리고, 나머지 빈 공간에 여러 차례 제발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현재 그림에는 수많은 도장이 다닥다닥 찍혀 있는데 김정희가 직접 찍은 도장과 소장자가 찍은 도장으로 나눌 수 있다. ‘秋史’(추사) ‘古硯齋’(고연재), ‘樂文天下士’(낙문천하사), ‘金正喜印’(김정희인) 등의 도장은 김정희가 직접 찍은 것이다. 나머지 도장은 모두 이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이 후대에 찍은 것이다. 꽃심 옆에 찍힌 ‘墨莊’(묵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필자는 후대 소장인의 도장으로 판단했다. 설령 김정희의 도장이었다 해도 김정희라면 그 자리에 도장을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은색으로 진하게 그린 꽃심 옆에 붉은색 도장을 찍게 되면 꽃보다 도장이 더 눈에 띄게 된다. 그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도장이다. 김정희 같은 심미안이 그렇게 눈썰미 없는 행동을 했을 리 만무하다.

(2)번 그림은 현재 모습의 ‘불이선란’이다. 여기서 후대 소장인의 도장을 모두 지우고 김정희가 처음 붓을 들었을 때의 원형을 복원한 작품이 (1)번 그림이다. 어떠한가. 두 그림을 비교해본 소감이. 훌륭한 그림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몇몇 소장자의 무분별한 도장 때문에 어떻게 망가지는 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불이선란’은 서예를 그린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과 서예가 둘이 아니라는 서화일치(書畵一致) 사상이다. 또한 그림(畵)의 이치가 선(禪)과 통한다는 화선일치(畵禪一致)의 경지에서 붓을 들었다. 김정희는 난을 20년 동안 그리지 않다가 우연히 붓을 들어 ‘불이선란’을 그렸는데 ‘본성의 참모습(性中天)을 얻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무언(無言)의 경지다. 굳이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무언으로 사양하면 된다. 마치 비야리성(毘耶離城:바이샬리)의 유마(維摩)거사가 침묵으로 불이(不二)법문을 들려준 것처럼.

김정희가 제발의 배치에 얼마나 신중했는가는 (3)번 제발의 순서를 봐도 알 수 있다. (3)번의 숫자와 화살표는 제발을 쓴 순서와 방향이다. 원래 동양화에서는 제시나 제발을 쓸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맨 위에 배치한 ①번 제발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정반대다. 왜 그랬을까. 난을 그린 후 빈 공간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을 먼저 그리고 제발을 나중에 썼다. 처음에는 맨 윗부분만 썼는데 할 얘기가 많아져 세 번을 더 썼다. 글은 써야겠는데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김정희는 최대한 난의 작품성을 살리면서 글을 써 넣는 방법을 고민했다. 네 개의 제발이 모두 방향이 제각각인 이유다.

김정희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공간을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제발을 임의적으로 변경한 (4)번 그림만 봐도 김정희의 탁월한 공간 운용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는 ①번 제발의 끝부분을 한단 낮춰서 양쪽의 기울기를 맞췄다. 만약 글자의 윗단을 맞췄다면 (4)번처럼 왼쪽이 무겁고 오른쪽이 불안해 옹색한 구도가 됐을 것이다. 만약 이런 계산과 분석 없이 무비판적으로 글자를 배치했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또한 상하단의 세 군데 모퉁이는 모두 글자로 채우면서 오른쪽 하단은 깨끗하게 비웠다. 난을 보는 감상자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불어 네 모퉁이가 꽉 막혔을 때의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서다. 작가들은 이렇게 꽉 막힌 구도를 가장 경계한다. (5)번에 필자가 임의적으로 제발을 첨가한 그림을 보면 금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백이 없는 그림은 아무리 현란한 기교를 뽐낸다 해도 훌륭한 그림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도 너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빈 구석이 있는 듯한 사람이 편안하다. 그림의 여백처럼. 남에게 나의 결점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한 숱한 말들은 스스로의 잣대로 검증하고 재해석해야 한다. 요설(饒舌)에 넘어가면 안된다. 또한 여백에 남겨야 할 자리에 쓸데 없이 도장을 찍어서도 안된다.

그림 그리는 법이나 수행하는 법이나 마찬가지다. 앙굴리말라가 죄가 있다면 이런 비판 정신의 결여일 것이다. 그가 저지른 연쇄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신뢰하는 스승의 말이라도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시켰는데 따라했다는 것은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가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니다. 이것이 그가 부처님을 만나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부처님께 용서를 구한 앙굴리말라는 삭발을 하고 출가를 했다. 그는 곧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편 백성들의 탄원을 받은 파세나디왕은 앙굴리말라를 잡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파세나디왕은 부처님 곁에 선 비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에게서 악독한 살인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세나디왕은 부처님의 위대한 감화력에 거듭 놀라며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루십니다. 앞으로도 중생들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푸시어 미혹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파세나디왕은 부처님을 믿고 돌아갔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잔인한 살인마가 출가를 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가 더 이상 완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탁발을 나갈 때마다 앙굴리말라를 괴롭혔다. 아이들은 앙굴리말라에게 돌맹이를 던졌다. 어른들은 폭행을 하고 칼로 찔렀다. 앙굴리말라는 그들의 행동을 일체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달게 받았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새롭게 태어난 앙굴리말라는 오랜 인욕 끝에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다.

부처님께 맞선 데바닷타

앙굴리말라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알고 나서 전격적인 변신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다. 데바닷타가 대표적이다. 그는 부처님의 사촌이다. 부처님의 고향방문 때 여러 명의 석가족 젊은이들과 함께 출가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기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이 더 많았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경우다. 그런 수행자가 어찌 데다밧타뿐이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현제진행형인 것을. 그는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자타삿투왕자의 환심을 얻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공양을 받았다. 부처님은 그런 데바닷타를 끊임없이 야단치고 나무라셨다. 이에 앙심을 품은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가장 강력한 나라인 마가다국의 왕자 아자타삿투도 자신의 편이니 해 볼만한 싸움이 아닌가. 그는 아자타삿투를 충돌질해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내쫓고 왕위를 탈취하게 했다. 그의 계략대로 아자타삿투는 빔비사라왕을 감옥에 가둬 굶어죽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제 자신만 부처의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상당히 많다고 확신한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이제 연로하시니 편안하게 보내시고 교단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너같이 탐욕에 가득한 사람에게는 교단을 맡길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데바닷타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의식해 그럴 듯한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청정한 체 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처님 흉내를 내려 해도 결코 부처님이 될 수는 없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서 우러난 걸림 없는 가르침이었다면 데바닷타의 가르침은 가식이 섞여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김정희가 어린 달준이를 위한 마음을 가득 담아 ‘불이선란’을 그린 만큼 ‘똑같은 작품은 한 번만 가능하고 두 번은 불가한’ 경지나 다름없다. 흉내 내서 그린 그림에는 영혼이 없다. 기교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 결과는 아자타사투왕자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닮게 그리려고 할수록 본성의 참모습에서 멀어질 뿐이다. 아자타사투왕자는 처음에는 부처님의 흉내를 낸 데바닷타의 꾀임에 빠져 아버지까지 죽인 패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가짜는 가짜다. 언젠가는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자타사투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데바닷다의 가르침이 참본성을 거슬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실한 불교의 후원자가 됐다. 

결국 데바닷타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승단을 떠났다. 승단의 분열이었다. 그러나 그를 따라 갔던 추종자들도 오래지 않아 진실을 깨닫고 데바닷타를 떠나 부처님께 돌아갔다. 홀로 남은 데바닷타는 분노에 사로잡혀 9개월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굳이 해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진실은 언젠가 빛을 보기 마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와 같았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24호 / 2013년 12월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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