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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산 혜원이 환현에게

“사문은 세속인이 아니니 왕이라도 예경하지 않는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편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보편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불교가 시작된 이후 스님들은 편지에 의탁해 마음을 전했다. 인도 나가르주나(용수보살)가 남인도 지역의 왕이었던 고타미푸트라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스님들의 편지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 속에는 진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가 하면 진리에 대한 논쟁과 추상같은 경책도 있다. 지난 2004년 ‘옛 스님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연재됐으나 지면상 짧게 소개됐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보다 충실한 내용으로 편지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독재자 환현 억불정책 맞서
승가 독립 이유 당당히 주장

"승려는 늘 자유로워야할 존재
복종 강요 땐 중생구제 요원"
 

황제 자리에 오른 환현
칙령 반포로 승가 독립 인정
혜원 인품과 당당함 영향

마지막 입적하는 순간까지
계율 지켰던 신앙의 수호자

“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속의 어둠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트여주어, 바야흐로 나와 남을 잊는 도로써 천하와 더불어 같이 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성불(成佛)의 큰일을 성취하지 못했더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때 깨달음이 이미 큰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에서 입는 옷이 아니고, 발우는 종묘에서 사용하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속세 바깥의 사람이니 왕에게 공경을 표하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402년 여름, 황제의 권력을 능가하는 젊은 독재자 환현(桓玄, 369~404)은 당대 최고의 고승인 혜원(慧遠, 334~416)에게 직접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황제라는 꿈은 무력만으로 실현되지 않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간의 존경을 받는 인물, 숨은 인재를 곁에 둠으로써 이제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야 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세상에 천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혜원은 그 모든 조건에 맞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북방민족이 주도한 영가(永嘉, 307~312)의 난 이후 수많은 군벌 왕조가 생겨나고 스러져갔던 망국과 살육의 시대. 양자강 유역의 절대강자로 떠오른 환현은 일찌감치 천하통일을 꿈꾸었다. 실권을 장악해나가는 틈틈이 학문에 열정을 쏟았고, 뛰어난 문사들과 교류했다. 좋다는 그림이나 글씨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었다. ‘역경(易經)’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를 집필했으며, 불교와 노장사상도 익혔다. 특히 불교는 묘한 매력이 있었지만 ‘오랑캐의 종교’라는 반감이 적지 않았다.

동진 안제(安帝) 2년(398), 이런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연주자사 왕공과 형주자사 은중감이 병사를 일으킨 것이다. 환현은 친분이 깊었던 그들과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왕공이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얼마 후 조정에서 자신을 강주자사로 삼겠다는 조서를 보내왔다. 은중감을 처리해달라는 조정의 은밀한 유혹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조정의 지지 아래 은중감을 없앤다면 더이상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이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칼끝은 은중감에게 돌려졌다.

환현이 혜원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399년 은중감 토벌을 위해 여산을 지날 때 그는 혜원에게 호계(虎溪)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혜원은 병을 핑계로 산문을 나설 수 없다고 전해왔다. 짐작대로였다. 여산에 정착한지 20년째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던 혜원은 황제를 비롯한 어떤 권력자의 요청에도 나서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여산에 오르려는 환현에게 측근들은 얼마 전 은중감도 여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췄다는 말을 전했다. 더불어 그를 절대 공경하지 말 것도 당부했다. 환현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발끈했다. 군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혜원에게 공경이라니. 여차하면 무력을 써서라도 무릎 꿇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그러나 혜원을 보는 순간 환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공경을 표했다. 의지와 무관한 행동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내심 자괴감을 느끼며 거칠게 따져 물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함부로 헐거나 다칠 수 없는데, 어째서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습니까?” 유교의 영향이 강한 중원에서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는 곧 인륜이었다. 승려라는 이들은 효라는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것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그러나 혜원은 담담히 대답했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효경(孝經)’ 첫 머리에 나오는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의 인용이었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함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대들이 말하던 최고의 효가 아니었냐는 날카로운 반박이었다. 청산유수에다 박학다식을 자랑하던 그였건만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환현은 지금 은중감을 토벌하러 간다고 얘기했다. 혜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최고 권력자 앞에서 저리 당당할 수 있을까. 의아함을 넘어 경외감이 들었다. 이번에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은중감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다. 자칫 덫에 걸려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혜원의 대답은 그를 감탄케 했다. “내 바람은 시주께서도 평안하고, 그도 아무 탈이 없는 것입니다.” 전란의 시기를 맞아 황제에서 하층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봤던 환현. 인간의 속내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는 여산에서 내려오며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그런 인물은 태어나 처음 본다.”

환현은 오래지 않아 은중감은 물론 수하들까지 모두 없애는데 성공했다. 그 공으로 환현은 형주 등 8개 주를 다스리며 최고의 권력자로 우뚝 섰다. 실권을 장악한 그가 처음 떠올린 인물은 혜원이었다. 측근들이 들려주는 혜원에 대한 얘기들은 그로 하여금 더욱 존경심을 갖도록 했다.

▲ 혜원은 여산에 정착한 뒤 35년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런 혜원이 유학자인 도연명과 도사인 육수정을 배웅하다 이야기에 몰두해 호계를 넘고 말았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호계삼소(虎溪三笑) 고사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수많은 화가들의 소재로 사랑받았다. 그림은 송나라 때 화승인 석각의 ‘호계삼소도’.

가난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혜원. 어린 시절 그는 옛 학문의 중심지인 태학에서 유교 등 온갖 경전을 공부했으며 곧 선비들 사이에서 탁월한 식견으로 유명해졌다. 21살 때 노자와 장자에 심취한 그가 은둔을 위해 하북성 서쪽을 지나다 만난 스승 도안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항산에서 ‘반야경’ 설법을 들은 그는 “유교와 도교 등 아홉 학파가 모두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탄식하며 곧바로 동생 혜지와 삭발하고 불문에 들었다. 불경의 깊은 세계에 심취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을 읽고 수행에 매진했다. 불과 3년만에 혜원에게 강의를 맡겼던 도안은 “중국불교 앞날은 저 사람 혜원에게 있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365년 도안이 항산을 떠나 양양으로 옮겨갈 때 그는 이미 교학과 수행의 일가를 이룬 30대 초반의 기품 있는 승려였다. 378년 진왕 부견이 양양을 침공해 그토록 존경했다던 도안을 억지로 장안에 모셔갈 때 도안은 500명이 넘는 제자들에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혜원에게는 아무런 말도 않고 지나치자 혜원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도안은 ‘그대와 같은 사람을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제자 수십 명과 형주를 거쳐 심양의 여산 용천정사에 이른 혜원은 이곳이 자신이 머무를 곳임을 알았다. 주변 사람들이 이곳은 터가 좋아도 물이 귀하다고 하자 혜원은 지팡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만일 이곳이 머무를 만한 곳이라면 마땅히 땅에서 샘이 솟아날 것이다.” 순간 옥 같이 맑은 물이 솟구쳐 계곡을 이루었다. 혜원이 여산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형주자사 환이는 승방과 불전을 지어주었다. 바로 동림사(東林寺)의 시작이었다. 혜원을 주축으로 한 여산의 승려들은 지나치리만큼 금욕적이었고 계율에 철저했다. 율장, 정토경, 반야경, 아비달마논서, 시경, 서경, 역경, 노자, 장자, 논어, 맹자 등 학문의 영역도 방대했다. 정해진 시간에 제자들이 모여 큰소리로 경전을 암송했다. 서역의 고승을 초청해 불경을 번역했고 선정수행도 병행했다.

여산이 지혜와 평안이 있는 이상적인 은신처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혜원의 재가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 유유민, 종병, 뇌차종, 주속지, 도연명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시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혜원의 안목과 지혜에 탄복하고, 그의 순수함, 고결함, 청빈함에 매료됐다. 승가와 재가의 차별도 없었다. 여산 동림사는 불교 확산의 진원지였으며 전란의 무풍지대였고 지식인들의 은신처였다. 그 중심에 바로 혜원이 있었다.

환현은 혜원을 끌어들인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강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조정 내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며 혜원을 모시려 애썼다. 편지와 사람을 보내 조정에 나오도록 적극 설득했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금강석 같은 혜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거절할수록 환현의 내부에서 혜원의 존재는 점점 커져갔다.

그렇더라도 환현은 다른 승려들까지 권력의 밖에 둘 수는 없었다. 당시 불교는 불도징과 도안의 시대를 거치며 중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사찰이 1000여 곳, 승려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불교가 흥성할수록 기존 세력들의 반발도 더불어 커져갔다. ‘불교교단 활동은 정부 권위와 국가 번영에 해롭다’ ‘사원 생활은 어떤 구체적 결실도 가져오지 못하며 쓸모없고 비생산적이다’ ‘불교는 이민족의 신앙으로서 문명화되지 못한 오랑캐들에게나 필요하다’ ‘사원생활은 사회적 행위에 관한 자연스럽고 신성한 원칙을 침해하는 부도덕한 종교다’ 등이 주된 이유였다. 승려들의 일탈을 지적하는 상소들도 속속 올라왔다. “오늘날 승려들은 술을 탐닉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물건들을) 싼 값에 사서 비싸게 파는 속임수를 씁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가장 큰 위선자들입니다.” “노역을 피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사원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지역에 수천 명이 모여들어 (절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지와 촌락을 이루기도 합니다.”

환현은 수하 관료들을 시켜 승려들의 선별작업에 들어갔다. 경전에 깊은 지식이 있어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항상 암자에서 생활하는 사람, 산에 살면서 뜻을 기르고 세속의 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모두 환속토록 조치했다. 다만 혜원이 머무르는 여산은 도덕을 갖춘 사문들이니 조사의 대상으로 삼지 말 것을 명령했다.

환현은 사원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승려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340년, 승려의 자율성을 놓고 어린 황제의 섭정이었던 유빙과 친불교 재상 하충 간에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렸다. 오랜 격론 끝에 교단 세력을 억제하려던 유빙의 계획이 철회됐었다. 환현은 당시 유빙의 생각이 군주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됐지만 그 주장이 충분하지 못했고, 하충은 종교적인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명분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환현은 이제 시대가 변했다고 판단했다. 승려들이 군주에게 절을 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세속 권력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것을 통해 반발 세력의 온상지가 될 수 있는 사찰을 통제할 수 있을뿐더러 불교에 반감을 갖는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환현은 8명의 재상인 팔좌(八座)에게 편지를 보내 승려들의 예경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승려들이 왕의 은혜를 입으면서 예절에 소홀하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재상들은 사나운 젊은 독재자 앞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환현은 자신의 오랜 수하이자 혜원의 제자였던 왕밀과도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펼쳤다. 그러나 끝내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환현은 마지막으로 혜원에게 편지를 썼다.

“승려가 왕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이미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것이고 이치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 바탕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근래 여덟 대신들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보내니 왕자를 공경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를 이야기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입니다. 생각하는 바를 자세히 진술해 의심스러운 바를 반드시 풀어주기 바랍니다.”
 

얼마 후 혜원으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왔다. 대단히 공손한 표현들 속에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호소하듯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혜원은 편지에서 승려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세속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승려들을 세상의 그물에 걸리게 함으로써 자신과 모든 중생을 구제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승가에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예(禮)가 있다고도 했다. 두 세계 사이의 접촉에서 비롯되는 오염이 바람직하지 않음으로 승려의 세계는 고립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환현은 처음으로 승가의 자율성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특히 “그 정책이 시행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쇠퇴하고, 그렇게 되면 빈도(貧道)가 매우 간절하게 원했던 정토 세상에 대한 희망을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을 쓰기 위해 붓을 잡으면서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덮습니다”라는 구절에서는 칠순을 앞둔 위대한 고승이 얼마나 고심해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갔는지가 오롯이 느껴졌다.

404년 1월21일, 황제를 내쫓고 스스로 초왕에 오른 환현은 곧바로 승가의 특권을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불법은 크고 위대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주를 받드는 마음을 헤아려 그들이 자신들 방식으로 공경을 표하는 것을 허락한다. 모든 승려들은 다시 왕자에게 공경의 예를 표하지 말도록 하라.”

환현이 승려 제재 정책을 왜 포기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 환현을 따르는 관료들이 갑작스런 정책 변경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는 더 이상 문제 삼지 말 것을 명했다고 한다. 혜원의 전기에 답신을 받고 망설이다가 결행하지 못했다는 기록처럼 환현의 결정에 혜원이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은 분명하다. 환현은 황제에 오른 몇 달 뒤 경구(京口)지역에서 거병한 유유의 세력에 패해 서쪽으로 달아나다 익주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404년 6월20일, 그의 나이 35세. 칼로써 흥했다 결국 칼에 스러진 것이다.

혜원은 그 뒤 황제의 부름에도 내려가지 않는 등 35년 간 꿋꿋이 여산을 지켰다. 승가의 독립성을 주창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고 승속의 제자들과 백련결사운동도 전개했다. 훗날 반란을 일으킨 노순이 여산을 찾았을 때 승려 하나가 혜원에게 “노순은 나라의 도적인데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라고 묻자 혜원은 “우리 불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무제가 노순을 토벌하려 인근에 왔을 때 어느 신하가 혜원과 노순의 교유가 두터웠음을 고했다. 그럼에도 무제는 “혜원은 세상 밖의 사람으로 우리편이니 상대편이니 구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오히려 사신을 보내 공경을 표하며 쌀과 돈을 전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밤을 지새우며 불법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였던 혜원. 그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이런 글을 남겼다. “굳센 뜻을 세우고 잠을 줄이며 도를 탐구하던 옛일을 생각하니 오직 부끄럽구나. 나 이제 입정(入定)해 밤을 새우며 불법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일 뿐이다.”

혜원은 416년 8월 열반에 들었다. 그가 떠나던 날 원로와 노승들이 약이라며 된장을 넣은 술을 권하자 “율장에 없다”며 거절했다. 다시 미음을 권하자 “정오가 지났다”며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출가자는 ‘오후에 먹지 않는다(午後不食)’는 계율 때문이었다. 다시 꿀물을 타서 권하니 “율장에서 허용하는지 확인하라”고 말했다. 제자가 서적을 뒤지는 동안 중국불교사의 가장 위대한 신앙의 수호자이자 엄격한 계율의 실천자는 그렇게 적멸에 들었다. 혜원과 환현의 편지는 ‘고승전’과 ‘출삼장기집’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28호 / 2014년 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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