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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총림 수덕사 주지 지운 스님

절 이름만 들어도 가슴 뭉클해지는 따듯한 도량 꿈꿔

▲ 지운 스님

금강암이 자리한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깔렸다. ‘저 산만 넘으면 우리 집’이 있을 게 분명했다. 초등학교 1학년 ‘영수’는 대웅전을 지나 산으로 향했다.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내가 살던 마을이 아닌데….’ 다시 절로 가려 발길을 돌렸지만 이미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호랑이한테 물려 갈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인 소년은 고향에서 자주 보았던 멍게나무 아래 웅크렸다.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으면 호랑이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할머니는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거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소년은 경남 함양에서 학교 다니며 별 걱정 없이 지냈다. 아버지가 사업 차 서울에 간 그날,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 할머니가 붕어빵 사주며 일렀다. ‘저 스님 따라가면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탈 수 있다.’ 마을을 벗어나 긴 여행을 떠난다는 한마디에 ‘혹’ 해서는 비구니 스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느 절에 이르렀다. 비구니 스님이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녁 짓느라 분주해 보였다. ‘3일 동안 여행했으니 여기서 하룻밤만 보내고 내일은 집으로 가겠지?’ 다음 날 아침, 그 비구니 스님은 없었다. 훗날 덕숭총림 방장에 오른 원담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넌,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한다’며 등을 토닥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왜 와있는지도 모른 채 저녁이 되면 노을을 바라보았던 ‘영수’였다.

이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집에는 영영 가도 못하고 호랑이한테 물려가 죽는구나!’ 무서웠다. 덕숭산이 떠나가듯 울었다. 사라진 아이를 찾으려 산 속을 뒤지던 수덕사 스님들이 그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스님들 손에 들린 ‘횃불’이 어린 소년의 의식을 명료하게 비췄던 것일까! ‘집엔 못 가는구나. 내가 살 곳은 여기다!’

기차 타고 세상구경 간다
한 마디에 수덕사로 직행
혜암·벽초·춘성·일엽 사랑
집생각 싹 잊고 행자생활

내포관광개발 논리에 반대
비움의 ‘참나 길’ 열라 호통
한탄·두려움은 모두 접고
회광반조, 이 순간에 최선

내포 반평사기운동 전개
사부대중 신행공간 확보
성보전시관 확대 이전해
더 많은 유물 전시 기대

그 때가 1963년. 어린 손자를 비구니 스님에게 맡긴 할머니의 뜻이 궁금했다. “할머니는 자식 중 한 명을 출가시키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손자를 출가시킨 겁니다.”

강단 있는 지금의 성품이 어쩌면 그날 밤 산에서 형성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마음 고쳐먹은 뒤로는 집 생각 싹 잊고 절 생활에 푹 젖어버렸다는 지운 스님이다. 할머니를 비롯한 부모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그리움마저 없었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응어리진 게 있었겠지요. 하지만 10대 시절에도 원망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노스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일 겁니다.”

▲ 지운 스님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덕숭산의 이 길을 처음 걸었다.

읍내 갔다 돌아오는 길, 환희대 인근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휘리릭~’ 일엽 스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일엽 스님이 시자에게 이른다. ‘영수대사 왔다. 이 사탕 주거라!’ 꼬마 영수 보고 꼬박꼬박 ‘영수대사’라 불러준 일엽 스님이다. ‘욕’ 잘하셨던 춘성 스님도 수덕사를 찾으면 환한 미소와 함께 ‘영수, 잘 있었냐’며 쌈지 돈을 건네주셨다. 덕숭총림 초대방장 혜암 스님도 만나기만 하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 하셨다. ‘영수, 수덕사 참 좋지?’ 노스님들이 다 ‘영수’라 불렀으니 ‘지운’이라는 법명을 받고도 10여년 동안은 사중에서 ‘영수 스님’이라 불렸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해 주신 분은 벽초 큰스님입니다. ‘넌 말사주지 하지 말라’던 큰스님 가르침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낮엔 일하고 저녁엔 수행’하는 ‘선농일치’ 사상을 전국 선원에 파급시킨 장본인이 벽초 스님이다. 말보다는 행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칭송받았던 선지식이다. 그런데 지금, 지운 스님은 교구본사 주지를 맡고 있지 않은가! 벽초 스님의 당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벽초 스님은 어린 지운 스님이 세간 학교에 다니는 걸 결단코 반대했다. 지운 스님은 책가방을 아예 일주문 밖에 숨겨놓았다. 사중 눈치 봐 틈 보이면 심부름 차 읍내간다며 절을 나와서는 숲에 감춰놓았던 책가방을 꺼내 교실로 향했다. 초등학교 ‘졸업’은 못했지만 ‘수료’라도 할 수 있었던 건 원담 스님이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벽초 스님은 산길을 오를 때나, 도량을 거닐 때나, 지운 스님 어깨에 손을 얹어놓고 걸었다. 지운 스님을 ‘벽초 스님 지팡이’라 부를 정도였다 한다. 견성암 5년 불사를 할 때도 벽초 스님은 지운 스님과 함께 했다. 한 겨울 창고에 볏짚 깔아놓고 눈 붙일 때도 벽초 스님 옆에는 지운 스님이 있었다. 벽초 스님이 지운 스님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던 건 ‘환속’할 가능성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말사주지 하지 말라’는 당부도 ‘환속’을 염려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큰 절 일은 사중의 뜻을 헤아려 하지만, 작은 사찰 일은 주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넌, 말사주지 맡으면 네 마음대로 할 터이니 절대 맡지 말라’는 겁니다.”

수덕사는 지운 스님 주지 취임 직후부터 확실히 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예산은 물론 홍성, 서산, 태안, 당진 지역의 정관계 인사가 수덕사로 향하고 있다. 지운 스님은 ‘설정 방장 스님이 주석하며 수덕가풍의 향훈을 전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닐 듯싶다. 지난해 템플스테이 참여인원만 해도 그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는 후문이다. “템플스테이란 ‘사찰의 하루’입니다. 산사에 머문다는 건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공간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사찰 사이의 대화에 따라 ‘어제’와는 다른 완전한 ‘오늘 하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산사가 들려주는 법음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어둠을 깨우는 도량석,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의 상큼함, 청아한 풍경소리 모두 중중장엄의 법문이요, 깨침의 울림입니다.” 프로그램에 의해 타율적으로 운영되는 템플스테이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조율하는 수덕산만의 독특한 템플스테이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수덕사는 ‘좋은 인연 더 없는 행복’을 주제로 효 한마당과 함께 노인요양원도 개원했다. 지역 주민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면서 추구하는 건 행복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는 눈여겨보지 않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선인선과(善因善果) 또는 선인낙과(善因樂果)라 하지요. 순수하고 좋은 인연이라야 즐거운 결과가 따릅니다. 순수하지 못한 인연을 지어 놓고 즐거운 결과를 기다리는 건 욕심에서 비롯된 이기심일 뿐입니다. 효 한마당은 참 신명납니다.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들의 마음, 즉 ‘정’으로 피어 난 행복을 서로 만끽해 보는 순간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행복 또한 부모와 어른의 사랑이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겁니다. ‘선인’이지요. 인근에 불교노인시설이 없던 터에 많은 불자님들의 호응으로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습니다. 이 또한 사부대중의 ‘선인’으로 이뤄진 겁니다. 개원 2년이 된 지금 자리는 잡았지만 시설 보강과 함께 확장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수덕사가 좀 더 노력하려 합니다.”

충남도청 이전에 따른 내포신도시가 들어서면 수덕사 역할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장밋빛 청사진이 아닌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임을 감지한 지운 스님은 그에 대한 계획도 차곡차곡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내포신도시 내 300여평의 종교용지 계약은 끝냈습니다. 어린이유치원을 비롯한 불자들의 교육과 신행공간을 담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그에 따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방장이신 설정 스님을 위시로 전 사부대중이 ‘내포 반평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내포관광사업이 지금의 내포문화숲길로 바뀐 데에는 수덕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당시 총무 소임을 맡고 있던 지운 스님은 관통도로 불필요성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산책길’을 더 내라 역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주 올레길이 세상에 나오기 전의 일이다.

“꽃이 피면 꽃길이요, 잎이 물들면 단풍길이고, 눈 내리면 설국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산과 숲, 숲과 마을을 잇는 길을 더 넓고 길게 내라 했습니다.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무념무상 속에서 편안히 걸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백제 미소길’은 ‘나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지운 스님은 ‘숫타니파타’에 담긴 부처님 말씀을 새겨 보라 권했다. ‘어제를 한탄하지 마라,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내일을 두려워 마라, 아직 오지 않은 일이다.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할 때 너의 앞날은 자연히 밝아진다.’

“보통 사람들은 지난 일에 대한 ‘반성’보다는 ‘좌절’을, 미래에 대한 ‘준비’ 보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눈 밝은 사람들은 한탄이 아닌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두려움부터 걷어내야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대화시간이 하루 30분도 안 되는 부부가 38%라 이른다는 세간 소식에 지운 스님도 다소 놀라워했다. 정계는 물론 가족계도 이러하니 소통부재 시대에 살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결코 멸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 즉 왓지국의 ‘칠불쇠법(七不衰法)’ 중 첫 번째가 ‘자주 모여 진리를 논의하는가’ 입니다. 논의란 대화를 토대로 한 소통의 다름 아닙니다. 소통하면 결코 쇠퇴하지 않습니다. 불통은 모든 관계를 황폐화시키는 지름길입니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자승자박의 끈만 단단하게 할 뿐입니다.”

▲ 가야사지를 출발해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에 이르는 길을 걷는 장면은 장관이다.

지운 스님은 수덕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좀 더 편안한 서비스를 해 주고 싶다고 토로한다. 일례로 지금의 성보박물관을 확장 이전시켜 좀 더 많은 유물을 제공하고 싶다 한다. 수장고에 묻혀만 있는 유물이 못내 아쉽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욕심낼 일은 아닙니다. 제가 디딤돌만 놓을 수 있다 해도 과분하지요. 그 보다는 ‘따듯한 수덕사’를 가꿔보려 합니다. ‘수덕사’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뭉클하며 마음이 따듯해지도록 말입니다!”

수덕가풍을 한 마디로 전해달라 하자 지운 스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가족’이라 했다. 비구와 비구니, 승가와 재가, 불교와 사회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일언이다.

‘인연이 닿으면 한 가족이다!’ 동진출가 해 덕숭산 품에서 50년을 살아온 지운 스님의 메시지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29호 / 2014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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