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승조가 유유민에게
2. 승조가 유유민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4.01.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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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사람이 그렇다하여 어찌 성인까지 그렇다하오리까?”

권력 등지고 여산 정착한
당대 최고 지식인 유유민

젊은 천재 승조 저술 읽고
새로운 주장에 매료됐지만
‘무지=반야’ 개념에는 의문

승조 격의불교 이해 비판
공이 무와 다른 점 역설

“경에서 진실한 반야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께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 더 이상 집착 마시고 지극한 이치를 찾으셔야 합니다. 만법이 한결같이 순수한 진여의 세계임을 평등하게 관찰하십시오. 지극히 텅 빈 무상(無相)의 법신(法身)이 곳곳에 있으며 단절된 무(無)가 아님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옳음이 없는 데서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나 일치함이 없는 데서 일치한다고 집착하는 것은 그저 병통이 될 뿐입니다.”

396년, 한나라 초원왕의 후예였던 유정지(劉程之, 354~410)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제자백가에 능통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젖고는 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셨던 유정지에게 애초 관직 따위는 마음에 없었다. 두 고을 현령을 맡은 것은 승상 환원(桓元)과 태위 유유(劉裕) 등 당시 최고 실력자들의 거듭된 추천 때문도 아니었다. 아들의 입신양명을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시선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탓이다.

허나 관직에 머무를수록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겨졌다. 권력을 둘러싼 끊임없는 암투와 전쟁, 그로 인해 뭇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위정자들이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할 백성들이 그 위정자들로 인해 처참히 죽어가고 구름처럼 떠돌았다. 그에게 관직은 외려 현실에 대한 외면이자 권력자들에 대한 순응이었다. 그럴수록 유정지는 책에 묻혔고 고명한 이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책장을 덮거나 도인이라는 이를 만나 돌아설 때면 불현듯 허탈함이 밀려왔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유정지가 혜원(慧遠, 334~416)을 만난 것은 그해였다. 여산 동림사를 찾은 그는 혜원의 깊은 눈을 들여다보며 불쑥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혜원은 기꺼이 유정지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의 여산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정지 대신 유유민(劉遺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원했던 것도 이 무렵부터다. 더 이상 한 줌 권력이나 허명에 얽매이지 않고 평범한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자신과 친분이 있던 주속지, 뇌차종, 종병 등도 오래지 않아 동림사에 의탁했다.

동림사는 적막했지만 그 안은 늘 굽이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들이 속속 여산으로 들어왔다. 서역의 승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시키고 때로는 동림사 승려가 직접 불경을 구하러 서역으로 떠나갔다. 그런 여산에서 화제의 인물은 단연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었다. 중앙아시아 구자국(龜玆國, Kucha) 출신이었던 그의 명성은 서역을 벗어나 중원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전진의 왕 부견이 구자국을 침략한 것도 구마라집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

구마라집은 20여년 가까이 온갖 굴욕과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생의 반전은 환갑이 가까운 58세 때 이뤄졌다.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이 후량을 정벌하고 그를 장안으로 모셔가면서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사(國師)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구마라집은 반야경을 시작으로 법화경, 유마경, 십지경, 금강반야경 등 불경을 번역했다. 인도의 대사상가였던 나가르주나의 중론, 대지도론과 정토신앙의 요체인 관무량수경, 아미타경도 그의 손을 거쳐 중원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그의 강설을 듣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학승이 4000~5000여명에 이르렀다. 가히 초인적이라 할만큼 번역과 후학양성에 온 몸을 내던졌다. 그는 새로운 사상의 분화구 그 자체였다.

혜원도 그가 단순한 역경승이 아니라 대사상가였음을 단박에 알았다. 도생을 비롯한 혜예, 혜엄, 혜관 등 동림사 승려들을 장안으로 보내 구마라집에게 직접 배우도록 했다. 구마라집과 18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혜원의 핵심을 가르는 질문들에 구마라집은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나라 사람이 아직 경전도 없는데 문득 모르는 사이에 이치와 합치됐으니 어찌 절묘하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찬탄했다.

여산에 정착한 유유민은 서림(西林) 계곡 북쪽에 선방을 짓고 경을 읽으며 수행에 매진했다. 아비달마논서, 반야경, 법화경, 아미타경, 반주삼매경 등 불경의 깊고 오묘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중 유유민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아미타신앙이었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또한 괴이한 것과 신적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연약한 아녀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정토신앙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죄업을 참회하고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정토를 구현하겠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실천의 신앙이었다. 자신의 죄업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전쟁과 폭력이 없는 정토를 꿈꾼다는 것, 그것이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유유민은 일체의 육식을 금했다. 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 등 다섯 가지 자극적인 채소도 멀리했다. 그 어떤 승려보다 계율에 철저했다. 천하의 혜원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는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아미타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유유민은 삼매에 들 때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 부처님이 공중에서 나타나기도 했으며, 자신이 가사를 입고 극락의 보배 연못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402년 9월11일 혜원이 정토에 왕생하자는 결사(結社)를 제안했다. 유유민을 지켜본 혜원은 신앙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동참자는 신심 깊은 출재가자 123명이었다. 이때 혜원의 요청에 발원문을 쓴 것은 유유민이었다. 그는 몸의 편안함이나 마음의 쾌락을 구하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정진하자고 발원했다. 먼저 극락에 오른 사람은 뒷사람을 잊지 말고 서로 돕자고도 했다. 동아시아 첫 결사인 백련결사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 402년 9월11일 여산 혜원과 유유민 등 123명의 출․재가자에 의해 시작된 동림사 백련결사는 1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여산 동림사 전경.

유유민은 도반들과 약속대로 부지런히 정진했다. 때때로 새로운 경전이 입수되면 목판에 글을 새기듯 꼼꼼히 읽어나갔다. 의문이 나면 여러 도반들과도 곧잘 토론을 벌였다. 절친한 벗 도생(道生, 355~434)이 그를 찾아온 것은 407년 늦여름이었다. 7년간 여산에서 수행했던 그가 구마라집 문하에서 공부를 마치고 천하를 주유하다 여산에 들른 것이다. 도생은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과 불성론(佛性論)의 첫 불을 지핀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세속 나이가 엇비슷했던 그는 유유민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승조(僧肇, 384~414)라는 20대 중반의 젊은 승려가 쓴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이었다. 도생은 스승 구마라집이 이 글을 읽고 “내가 불법에 대한 이해는 양보할 수 없겠지만 글 솜씨만큼은 승조에게 양보해야겠구나”라고 감탄했다는 말도 함께 전해주었다.

위진남북조는 노장사상에 기반을 둔 현학(玄學)의 시대였다. 한(漢)의 멸망과 더불어 유학사상의 한계를 느낀 지식인들은 노장에 마음을 의탁했다. 당시 사상계는 심무종(心無宗), 본무종(本無宗) 등 7종(宗)으로 나뉘어 유(有)와 무(無)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끝없이 논쟁했다. “무가 만물의 근원이다” “무는 아무 것도 생성할 수 없으며 유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공(空), 반야(般若) 등 불교의 개념들도 현학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라는 이질적 문화에서 생성된 불교가 중국이라는 낯선 문화에 정착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부작용 역시 적지 않았다.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불교가 변형을 거치면서 크게 퇴색해버린 것이다.

승조는 짤막한 논문 형식의 글에서 공이나 반야는 있음도 없음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임을 분명히 했다. 또 현학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해가며 불교가 현학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논증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300~400년. 이런 획기적인 주장을 펼친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유유민은 감탄했다. 승려 가운데 현학에 이토록 밝으면서도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드러낼 인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스승 혜원도 “일찍이 이런 책은 없었다”며 탄성을 자아냈다.

도생에게 전해들은 승조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어릴 때부터 책을 베끼는 일을 도왔다. 명민했던 그는 곧 고전과 역사에 능통했다. 유독 노장사상을 좋아했지만 완전한 만족은 얻지 못하다가 ‘유마경’을 읽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귀의처를 알았다”며 곧바로 출가했다. 승조는 오래지 않아 경율론 삼장에도 능통했다. 뚜렷한 스승 없이 이룬 놀라운 결과였다. 스무 살에 이미 장안에 명성이 자자했다. 논쟁을 위해 사방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그는 애써 피하지 않았다. 유학자, 현학자 등 내로라하는 어떤 지식인이라도 승조의 논리 앞에 무릎을 꺾었다. 그런 승조에게도 구마라집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승조는 곧바로 국경을 넘었다. 어떻게든 배워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렇게 승조는 사선을 넘어 구마라집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구마라집은 그의 재능과 열정에 늘 탄복했고, 승조는 그에게서 나가르주나가 이룩한 위대한 중관의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다. ‘반야무지론’은 이런 그가 장안으로 돌아와 지은 글이었다.

유유민은 수개월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보면 볼수록 그의 주장이 놀라웠다. 그렇다고 의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산의 승려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는 자신이 도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다. 묻고 배움에 어찌 나이와 가문이 따로 있으랴. 오십을 훌쩍 넘긴 그는 20대의 젊은 승조에게 제자의 예를 갖춰 편지를 써내려갔다.

“지난날 스님의 아름다운 명성을 듣고 그리워하며 멀리서 바라본지 오래입니다. 아직 엄동설한은 아니지만 몸은 어떠신지요. 제자는 초야에서 깊은 병이 들어 아픈 몸으로 지내다가 혜명 스님이 북쪽으로 공부하러 간다기에 그 편에 나의 정을 전합니다.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 목욕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의문이 남았습니다. 원컨대 대략이라도 조용한 여가에 이를 풀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유민은 편지에서 이곳의 소소한 일상을 얘기했다. 칠순의 스승 혜원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음도 전했다. 그는 이어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반야가 어떻게 무지(無知)와 같을 수 있으며, 일치해도 일치함이 없고 옳아도 옳음이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냐고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유유민이 승조의 답장을 받은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예전에 뵈옵지 못해 우두커니 상상하기가 참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편지의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 동안 마주대한 듯했습니다. 빈도(貧道)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또 지극한 취지에는 말이 필요 없어 일단 말하게 되면 근본종지와는 뒤틀리게 될 것입니다. 광언(狂言)일지언정 애오라지 보내오신 취지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승조의 편지는 공손한 인사말로 시작됐다. 이어 자신이 던졌던 물음에 하나하나 거침없이 답해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성인의 마음까지 그렇게 헤아리면 안 된다는 것, 주관적인 견해에 집착 말고 지극한 이치를 찾으라고 당부했다. ‘반야무지론’의 무지(無知)는 지(知)가 없는 무식한 상태가 아니라 지식의 본성인 언어적 사유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적 지혜를 뜻한다고 했다. 무분별적 지혜를 체득할 때 부처님과 같은 일체지자(一切智者)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체지자의 경지가 열반이기 때문에 열반이 곧 ‘무명’이라는 것이다. 무지나 무명은 각각 공성의 세계에서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차원이 일상적 차원과 다르다는 것, 언어적 사변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 진제(眞諦)의 세계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편지를 읽은 유유민은 그가 장차 중국불교의 흐름을 바꿀 것으로 확신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반야사상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언어로 형상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승조, 그는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이었다. 유유민은 그런 인물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흐뭇했다.

승조의 편지를 받은 지 얼마 뒤 유유민은 자신의 목숨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는 ‘법화경’을 수백 번 염송하고 이 경전의 공덕으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했다. 예정된 때가 되자 유유민은 서쪽을 바라보며 반듯이 앉아 손을 모으고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승조도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부진공론(不眞空論)’ ‘물불천론(物不遷論)’ ‘열반무명론(涅槃無明論)’과 ‘유마경’ 주석서를 잇따라 펴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인도 최고의 논사 나가르주나가 그러했듯 유와 무의 극단을 비판했다. 격의불교의 공에 대한 이해와 한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지적했다. 승조는 중국의 언어와 사상으로 인간 사유의 습관을 해명하고 공의 진의를 밝히고자 했다.

승조는 31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유유민이 예견했던 대로 도가적 변용으로 초래된 불교의 왜곡과 오해를 끝낸 격의불교의 종결자로 추앙됐다. 그의 사상으로 인해 삼론종이 싹텄으며 훗날 기라성 같은 선사들이 그의 말을 인용해 깨달음의 언어를 나누었다. 불교라는 ‘오랑캐의 종교’가 현학과 유학을 누르고 수당시대에 활짝 꽃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승조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멀리 신라의 혜공이 “내 전생은 승조였다”고 하는가 하면 원효는 승조의 사상에 근거해 ‘대승육정참회’를 저술하기도 했다.

짧지만 활화산 같은 삶을 살았던 희대의 천재 승조. 그가 세상을 뜨고 600년 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은 그의 죽음에 얽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제가 반야에 통달한 그를 등용하고자 수차례 불렀으나 승조는 한사코 벼슬길을 거부했다는 것. 황제의 명을 어긴 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 승조는 일주일의 시간을 얻어 ‘보장론(寶藏論)’을 완성한 후 하얀 칼날 앞에 스러져갔다는 얘기다. ‘보장론’의 권위를 승조에게서 찾으려 했거나 혹은 승조의 이른 죽음을 아쉬워했던 후인들의 마음이 담긴 설화일 수 있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사대(四大)란 애초 주인이 없는 것이요, 오온은 본디 공한데/ 하얀 칼날로 목을 치는 것쯤이야 한낱 봄바람을 베는 것에 불과하리라(四大元無主 五蘊本來空 將頭臨白刃 恰似斬春風).’

냉철한 시대인식과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칼날 위에 세웠던 승조, 이상을 꿈꾸고 그 이상에 신명을 바쳤던 유유민. 그들이 나눴던 편지는 승조의 논문을 묶은 ‘조론(肇論)’과 ‘고승전’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0호 / 2014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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