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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 승가대학원장 일초 스님

돌 걷어내고 잡초 뽑았다면 그 땅에 씨를 심어라

▲ 일초 스님

조계종 최초 비구니 강원은 현 동학사 승가대학이다. 대강백이었던 경봉 스님을 초빙하며 강원 문을 연 것이 1956년이니 58년이라는 역사가 스몄다. 현재 강단에 서 있는 비구니 강주 중 동학사 강원을 나오지 않은 스님이 없을 정도다. 그 자긍심 실로 클 터. 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동학사와 강원의 역사를 오늘 날까지 이끈 인물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일초 스님이다. 일초 스님은 1980년대 중반 주지를 맡으며 대작불사를 일으켰다. 지금의 동학사 사격은 그 때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초 스님의 향훈(香薰)은 동학사에 내려오는 ‘1969년 전설’에 깊게 배어 있다.

동학사 강원은 강주가 없어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 당시 유식학의 대가 호경 스님은 경기도 흥국사에서 강주 원력을 세운 비구스님을 제접하고 있었다. 학인들은 동학사 강원 주석을 청했지만 호경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동학사 학인도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동학사 비구니 24명은 50차례나 흥국사를 찾아가 청을 올린 끝에 호경 스님의 승낙을 얻었다. 그 때가 1969년이다. 당시 20여명의 비구니스님을 이끈 장본인이 일초 스님이다.

‘응무소주’만으로는 안돼
‘그 마음’의 활용이 관건

처음 접한 ‘화엄경’에 전율
일체유심조에 출가 결심해

‘유식학’ 대가 호경 스님
50번 찾아가 강주로 모셔

홀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
인연따라 나고 사라질 뿐

동학사 강주를 맡은 호경 스님은 입적 전까지 이 도량에서 인재양성에 매진했다. 동학사 승가대학이 여느 승가대학과 달리 유식학에 강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1977년 호경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은 후 강단에 선 일초 스님도 후학양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일찍이 절에는 가지 않던 그였다. 소풍이나 수학여행길에 어쩔 수 없이 절에 이르러서도 사천왕문 부근서 경내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의 나이 21살, 어느 산사에서 책 한 권을 만났다. 이미 웬만한 서양철학 개론서는 다 섭력했을 만큼 내공이 깊었던 그는 손에 들어 온 책 한 권을 무작정 읽어내려 갔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가슴에 큰 파문이 일었고, 그 파문은 온 몸을 전율케 했다.

‘모든 게 마음으로 이뤄진다고? 내가 원하는 행복도 내 마음으로 이룰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내 마음,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짓기도 하고 헐기도 한다니!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태어나 처음 만난 경전은 ‘화엄경’이었다. 그 자리에서 출가를 결심한 그는 곧장 집으로 와 아버지께 고했다.

“저, 스님 되겠습니다.”
“스님은 쉬운 줄 아느냐?”
“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 봐라!”

부친은 딸의 출가를 찬성한 게 아니다. 승려의 길을 곧 포기하고 되돌아 올 것이라 예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 ‘화합과 공경’의 뜻을 담은 ‘화경헌’은 ‘예의와 겸손’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일초 스님이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메시지 중 하나다.

일초 스님이 머물고 계시는 곳 화경헌(和敬軒)이다. 그대로 풀면 ‘화합과 공경의 집’이다. 강주스님들이 머무는 곳을 굳이 ‘화경헌’이라 이름한 이유가 있을 법하다. 그보다 먼저 금방 속퇴할 것이라는 부친의 예단이 결국 ‘틀렸다’ 하자 일초 스님은 함박웃음을 보이며 손 사례를 친다. 사실은 입산 3일만에 두 손 들었단다.

“행자생활은 참으로 고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할까요? 자존심이 상하니 산사에 있기도 싫었어요. 하지만 하산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실 것 아니에요. ‘거 봐라 내 뭐라 했냐!’ 그 말만은 듣지 말아야한다 생각하고 버티다보니 예까지 와 있네요!”

모진 행자 여정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 그건 다름아닌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키겠다는 일념이었다. ‘화경헌’이란 이름한 연유를 여쭈어 보았다.

“공동체 의식이 퇴색되는 순간 강원은 붕괴됩니다. 서로 공경하며 화합하려는 마음을 잃지 말아 달라는 당부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행(行)이기도 합니다.”

강원과 선원만이 공동체는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가 공동체 아니던가. 그 공동체를 제대로 일궈 정토로 가꾸려면 어떤 의식이 선행되어야 할까?

“고기는 그물의 한 코에 걸려 잡힙니다. 하지만, 다른 한 코 없이 그물이 성립되지 않지요. 다른 코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기에 고기가 잡힌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기 걸린 그 한 코만 중한 줄 압니다.”

세상은 인드라망처럼 연결돼 있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웬만한 불자나 지식인이라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등 세상의 상호연계성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는 못하다. 갈등과 폭력, 억압이 난무하는 지구촌 사회가 이를 반증하고 있지 않는가.

“금강경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요, 사상 중 ‘나’라는 상에 집착하는 아상부터 깨야 합니다. 이 앞에 놓인 찻잔도 지금 생멸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몇 초 후, 이 찻잔이 그 형태를 잃을 것이라 안다면 이 찻잔에 연연하지 않을 겁니다. 나 역시 오온인연으로 이뤄진 존재일 뿐입니다. 찰나생, 찰나멸 관점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변하고 있고, 60초 후나 60년 후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집착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람과 물질 그리고 자연을 대하면 세상은 그만큼 청정해 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금강경’ 사구게 중 하나인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며 살면 충분한 것일까? 일초 스님은 유의할 게 하나 있다고 했다.

“무성한 잡초와 돌이 서로 얽히고설킨 밭이 있습니다. 잡초를 뽑고 돌을 걷어 내 깨끗한 밭을 만듭니다. 그 상태가 응무소주(應無所住)입니다. 이생기심(而生其心)은 무엇일까요? 그 밭에 씨를 심는 겁니다.”

너무도 확연하게 다가오는 비유에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만 갖고는 안 된다. 집착 하지 않는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떤 마음을 내 활용해야 하는 것일까? 스님은 ‘화엄경’ 십지품 한 대목을 들어 보였다.

“부처님께서는 ‘선근을 심고, 모든 행을 잘 닦아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광대한 지혜를 내면 자비가 나타날 것’이라 하셨습니다. 대자비심으로 보살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동행처럼 보시나 기부도 보살행 실천의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더 확산되어야 할 터.

“누가 누구에게 보시하라, 기부하라 할 것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나 하고 있는가 자문하면 될 일입니다. 마음이나 물질, 법을 나누기에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 할 수 있는 겁니다. 나누는 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하지 않으니 그 행위가 아름답다 말 해 ‘독촉’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동행이 이뤄지면 ‘아름다운’은 자연스럽게 빠질 겁니다.”

그렇게 집착 않는 마음으로 무주상보시하며 사는 자신은 무엇을 얻는가?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좀 억울하다.

“마음을 얻지요. 마음을 얻으면 세상을 얻습니다. 이 보다 더 큰 게 있나요? 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 합니다. 정말 이 꽃이 아름다워서일까요? 내가 평화롭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겁니다. 불편한 심기에서 이 꽃을 보면 예뻐 보이기는커녕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겁니다.”

▲ 조계종 전 종정 월하 스님의 편액이 걸린 ‘강설당(講說堂)’. 강설당은 계룡산 연봉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았다. 한국전쟁 직후 동학사 강원스님들은 한 겨울에도 솜이불을 짊어지고 산 아래까지 내려가 나무꾼들의 산림 훼손을 감시했다.

스님은 당나라 유학 중 고총(古塚)에서 마신 ‘물 한 모금’으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스님의 ‘해골물’ 일화를 들어 보였다.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이나 더러움이 없습니다. 분별심에 따른 것일 뿐이지요. 마음을 다스린다는 건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경계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성인이요, 경계를 따라가면 범인이라 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간을 부리느냐, 부림을 당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 몸도 인연 다하면 사라집니다. 몸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죽음도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죽음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그 무엇에 걸리겠습니까? 말 그대로 대자유인입니다.”

화엄경 핵심, ‘모든 건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전하고 있다. 스님의 화엄 4연기(四緣起) 중 법계연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좀 전에 아름답게 보인 꽃을 보세요. 이 꽃의 꽃잎 한 장으로는 꽃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몇 장의 꽃잎이 모아져 있을 때 비로소 한 송이 꽃이 되지요.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호 인연이 닿아 일어났다가, 그 인연 다하면 또 사라질 뿐입니다. 이 인연법으로 세상을 보면 소중하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내 생각, 내 생명이 소중하듯 다른 이의 생각, 생명도 소중한 법입니다.”

일초 스님은 “불국장엄이라 할 때 장엄이란 만들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며 “업은 원래 있던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니 소멸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실천행에 나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초 스님은 선구 하나를 전했다. 문경 대승사를 비롯한 유서 깊은 산사 주련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선구다.

작은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 선심을 얻을 것이요(일진불염증선심·一塵不染證禪心), 만법이 공하면 불성을 밝힐 것이다(만법개공명불성·萬法皆空明佛性).

일초 스님은 지금도 학인스님들에게 뜬금없이 던진다.

“경전 보면 안 좋으냐? 난 지금도 좋다!”

또 하나 있다.

“난, 영원한 행자다! 지금은 맏 행자지!”

큰 산과 깊은 강은 말없이 서 있고 흘러도 위엄을 잃지 않는다. 동학사 승가대학 역시 말없이 보여 줄 뿐이다. 그곳에 살고 있는 비구니스님들의 삶 속에 그 기품과 격조가 스미어 있으니 ‘말’이 필요하겠는가! 동학사 승가대학의 가풍은 더 휘날릴 게 분명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일초 스님
1962년 해인사 삼선암에서 득도해 동학사 강원에서 중강을 역임하고, 1977년 호경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1986년 동학사 강주에 올라 조계종 제14대 중앙종회의원, 조계종 고시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학사 승가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1231호 / 2014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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