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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불교사상 잘못 이해했다”

  • 교학
  • 입력 2014.02.11 17:54
  • 수정 2017.02.23 09:00
  • 댓글 7

▲ 쇼펜하우어는 근대 서양인의 불교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현실에서 도피하는 철학으로 이해했던 것은 명백한 오류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서양철학자 중 불교를 가장 긍정적으로 본 대표적인 철학자다. 그의 철학은 니체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의 불교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염세주의 철학자라는 쇼펜하우어의 별칭처럼 서양인들이 불교를 현실에서 도피하는 철학으로 이해했던 것도 그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한국하이데거학회가 발간하는 ‘존재론 연구’ 제32집에서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인간이해의 비교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사상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대해 고찰한 뒤 쇼펜하우어가 갖는 철학적 모순이 어떻게 원효에게서 해결되는지를 고찰했다.

아직도 많은 연구자들의 논문은 쇼펜하우어의 불교 이해가 유사하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독교적인 인격신 존재 부정 △윤회설 인정 △일상적인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 △고통 극복을 위해선 감각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야 함  등이 그것이다.

박 교수는 불교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비슷한 곳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엄밀히 접근할 경우 양자의 사상에는 비슷함을 넘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조목조목 밝혔다.

박찬욱 서울대 교수 비판
불교와 비슷한 점 있지만
업·욕망·윤리관 등 큰 차이
쇼펜하우어 철학적 모순점
원효사상서 자연스레 해결

그에 따르면 불교는 쇼펜하우어가 상정하는 영원불변한 것과 무수한 개별자들로 이뤄져 있는 현상계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교는 무상한 현실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무상한 현실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본다. 욕망을 바라보는 관점도 크게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만 불교에서는 그릇된 방향의 욕망만을 악한 것으로 본다.

고행에 대한 입장 차이도 크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욕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의지 자체를 부정하고 근절하는 고행을 주창한다. 그러나 불교는 욕망과 의지를 근절하려고 고행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고행과 나태 사이의 중도를 추구한다. 쇼펜하우어는 생성소멸하는 현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불교는 세계의 무상함에 대해 한탄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으며 다만 그것을 여실히 볼 것을 요구할 뿐이라는 점도 다르다.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차도 분명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타고난 성격과 동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이 업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의지, 행위의 근본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명백히 다르다.

박 교수는 쇼펜하우어 사상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쇼펜하우어 주장대로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현상계 전체의 근원이고 그것이 내적인 갈등과 모순으로 차 있다면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게 된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 의지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의지가 부정된 생이란 결국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 등도 심각한 모순으로 꼽았다.

박 교수는 이어 쇼펜하우어의 모순이 원효에서 해소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에 따르면 원효는 쇼펜하우어처럼 고통의 극복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철학적 체계와는 모순되지 않는다. 원효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세계와 인간이 자신의 참된 실상을 회복하는 것이기에 세계와 인간의 본질과 상충되지 않는 것이다. 또 원효는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과 열정을 쇼펜하우어처럼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에의 충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상태를 실현하려는 열정으로 봄으로써 쇼펜하우어의 인간관, 행복관, 윤리관이 봉착하는 모순에서 벗어나게 된다. 특히 원효가 말하는 깨달음은 내면의 긍정적인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존재에 대한 자비와 충만한 지혜로 전환한다. 깨달음이란 생멸의 세계인 삶을 떠나서 고립된 내면의 정적이나 공허함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불교를 현실로부터 내면으로 침잠하는 철학이라고 본 쇼펜하우어의 불교이해는 궁극적으로 잘못됐다는 게 박 교수의 결론이다.

그런 점에서 쇼펜하우어가 불교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를 통해 불교를 본 서양인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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