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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운이 소명태자에게

“사홍의 서원으로 청하오니 감로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법화경 최고 권위자 법운
18살 소명에게 강론 요청
극구 사양하다 결국 승낙

22명 대덕·고관들 앞에서
‘이제설’ ‘법신론’ 강설
송곳 같은 참석자 질문에
명쾌한 자기 논리로 답변

31살에 병으로 돌연 사망
‘금강경’ 32장 나눈 당사자
‘문선’은 중국문학 원천 평가

“전하께서는 태어나면서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높은 식견에 묘한 말씀은 속세를 벗어납니다. 매번 경을 논하는 자리에 다녀올 때면 그 묘한 말씀에 심취되고는 합니다. 빈도(貧道)가 비록 어려서 갈 곳을 알았다 하나 장성해 도업(道業)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거듭 불경 강론을 청하는 것은) 그 같은 묘한 말씀을 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삼가 사홍(四弘)의 서원으로 청하오니 감로의 문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518년 초가을, 양나라 소명태자 소통(昭明太子 蕭統, 501~531)은 곤혹스러웠다. 광택사 법운(法雲, 467~529)이 불경 강론을 요청해 온 것이다. 소명은 서신을 보내 완곡히 자신의 뜻을 밝혔다. 스스로 즐겨 불법을 배우지만 아직 아무런 깨우침이 없다고 했다. 그 가르침이 너무나 깊고 오묘한데 통달하지 못한 채 어찌 함부로 얘기할 수 있을까. 대사께서는 더 이상 말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얼마 후 소명은 법운에게서 다시 편지를 받았다. 태자는 경을 논할 충분한 안목을 갖추었으니 부디 거절 않기를 사홍의 서원으로 청한다고 했다. 법운, 그는 개선사 지장(智藏, 458~522), 장엄사 승민(僧旻, 474~534)과 더불어 양나라 삼대법사로 꼽히는 고승이었다.

진(晉)나라 장군의 후손으로 7살에 출가해 13살 때부터 강론을 시작한 법운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다. 어린 시절 그는 ‘법화경’을 공부하다 막히자 산 속 바위굴을 찾아갔다. 돌을 세워 사람으로 삼고 홀로 선창하고 홀로 따라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고서야 풀기 어려운 미묘한 구절까지 통달할 수 있었다. 그의 경문 해석은 더욱 치밀해졌다. 전후 문맥이 물 흐르듯 한결같았다. 아무리 어려운 대목이라도 그의 말을 거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한번은 ‘법화경’을 강설하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법운의 강론은 뛰어났다. 양무제(464~549)가 애써 마다하는 그를 황실의 가승(家僧)으로 모셨다. 법운의 탁월한 경전 이해와 강론 능력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법운이 재차 소명에게 강론을 청해온 것이다. 일각에서 법운을 두고 쑥떡거리는 소리가 있음을 소명도 알았다. 18살 새파란 젊은이에게 불경 강론을 청하는 것이 황제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 아니냐는 비난이었다.

무제가 이번 강론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맏아들의 성장을 확인하려는 아버지의 자연스러운 심정일 수 있었다. 무제는 경전 해설서를 펴내면 태자에게 꼭 보냈다.  ‘주해대품서(註解大品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제는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10여년 간 직접 강론한 뒤 이 책을 펴냈다. 무제의 해설은 법운이나 승민, 지장의 이론과도 현격히 달랐다. 오히려 그들이 주창하는 ‘중도성불론(中道成佛論)’과 ‘오시교판(五時敎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무제는 처음 소승(小乘)이라는 아비달마교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고구려 승려인 승랑(僧朗, 450~530?)의 사상을 전해 들으며 무제는 급격히 대승(大乘)으로 기울어졌다. 때마침 북쪽에서 활동하던 승랑이 내려와 인근 섭산에서 법을 펼친다는 소식이 황실까지 전해졌다. 이를 들은 무제가 512년 중흥사 승회(僧懷), 영근사 혜령(慧令) 등 10명의 승려를 승랑에게 보내 배워오도록 했다. 무제가 517년 완성한 ‘주해대품서’에서 반야사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도 승랑의 영향이 자못 컸다.

소명에 대한 무제의 애정은 각별했다. 무제는 정법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아육왕의 신화를 태자가 이루리라 믿었다. 소명에게도 무제는 특별했다. 그에게 무제는 황제나 아버지 이전에 큰 스승이었다. 자신도 부황(父皇)처럼 두루 학문을 익히고자 했다. 백성을 지혜와 자비로 다스리는 황제가 되고 싶었다.

무제가 소명을 얻은 것은 501년 9월 양양(襄陽)에서였다. 그는 새로 맞이한 여인이 아들을 낳았지만 돌볼 겨를이 없었다. 폭군 소보권과 맞서 싸우던 무제. 그가 아들을 찾은 건 제위에 오른 뒤였다. 본처에 아들이 없던 무제는 2살의 어린 소명을 수도 건강(健康)으로 데려와 태자에 임명했다. 당대 최고의 문사이자 건국의 주역이었던 심약(沈約), 임방(任昉), 서면(徐勉)에게 태자를 지도하도록 명했다.

어린 소명은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비범했다. 3살에 이미 ‘효경’과 ‘논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기억력이 비상해 5살에는 오경(五經)을 두루 읽어 암송할 수 있었다. 매번 놀라는 것은 가르치는 쪽이었다. 스승들은 태어나면서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경지가 소명의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13살 남짓 된 소명의 ‘대언시(大言詩)’와 ‘세언시(細言詩)’는 세상에 그의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곤(鯤)도 바퀴자국에 고인 물 속 피라미처럼 보고, 창해(滄海)도 한 잔의 술처럼 여기네. 천지를 지나며 아슬아슬 걸음을 옮기고 우주를 뛰어넘어 높이 날아보네.’(대언시) ‘허공의 먼지에 기대어 눕고, 하루살이의 날개에 매달려 날아다니네. 지척을 가는데도 3년이 걸리고, 가는 터럭을 지나는데도 아홉 번 쉬네.’(세언시)

소명은 성품이 자비롭고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 그가 12살 때였다. 성안의 죄수들을 보고 자신이 다시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무제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들 모두 중형에 해당하는 죄인이었다. 소명은 일일이 잘잘못을 헤아려 장형(杖刑) 50대라는 너그러운 처벌을 내렸다. 건강현(健康縣)의 한 관리도 태자가 너그럽게 판결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태자의 눈에 띄고 싶었던 그 관리는 범죄자들을 가벼이 처벌했다. 소명은 그 관리에게 즉각 명을 내렸다.

‘그들이 지중한 죄를 지었다면 그 가족들도 참수해야 마땅하거늘 어찌 그 죗값을 묻지 않고 가벼운 벌로만 풀어줄 수 있겠는가? 마땅히 대장간에서 10년 노역형을 치러야 할 것이다.’

소명은 엄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알았다. 그가 15살 됐을 때 무제는 직접 성인식을 치러주었다. 무제가 태자를 위해 동궁(東宮)에 마련해 준 서책도 3만여 권에 이르렀다. 소명은 틈만 나면 책에 묻혀 지냈다. 재능과 학식을 갖춘 문사들을 초청해 문장을 짓고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어린 소명의 박식함과 논리 정연함에 탄복했다.

‘불법의 요체는 보옥에 견줄만하고, 그 향기는 난초 국화와 같다’던 소명. 그는 날이 갈수록 불법의 그윽한 세계에 젖어들었다. 성인식을 치른 뒤 소명은 법운에게 부탁해 교학에 밝은 10명의 승려를 궁궐로 초청했다. 그들에게 매일 불경을 강의토록 하고 담론을 벌였다. 소명의 곁에는 늘 법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 소명의 불교 이해는 하루가 다르게 깊어졌다.

법운은 고승인 동시에 충신이었다. 그는 무제가 태자를 내세워 강력한 승단의 권위를 누르려한다는 세간의 얘기들이 사실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렇더라도 무제는 황제였다. 소명도 장차 제위에 오를 터였다. 불교에 대한 이들 부자의 지극한 관심이 나라와 불교에 큰 도움이 된다고 확신했다. 일부의 따가운 눈초리가 그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소명은 결국 법운의 잇따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법운에게 보내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제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 또 강론을 청하시더군요. 제가 하지 않음이 더 이로움은 말씀드린 바입니다. 감로의 문이 열린다는 스님의 말씀에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만약 요점만 말하는데 그친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물고기 눈알로 스님의 야광주(夜光珠)를 빗대려는 것 같아 민망할 뿐입니다.”

▲ 그림=김승연 화백

소명의 불경 강론은 중추절인 518년 8월15일 동궁 혜의전에서 열렸다. 소명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20살 안팎의 사촌들과 그토록 아끼는 친동생 소강(蕭綱)이 있었다. 황실의 친인척들이 젊은 반면 승려들은 명망 높은 고승이 많았다. 승정(僧正)인 혜초를 위시해 ‘성실론’의 대가 승민, 양무제가 섭산의 승랑에게 파견했던 중흥사 승회와 영근사 혜령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소명이 가장 존경하는 개선사 지장만이 보이질 않았다.

소명은 역시 지장답다고 여겼다. 법운이 충직했다면 지장은 반골기질이 강했다. 무제에게도 거침없었다. 황제가 조회를 하는 정전(正殿) 내 법좌에 오직 황제만 오를 수 있다고 결정했을 때였다. 지장은 설법이 황제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고 보았다. 지장은 그곳 법좌에 걸터앉아 외쳤다. “(이렇게 앉았으니) 나를 죽이려면 죽이고 가두려면 가두시오. 새로운 생명 받고 태어나면 될 일이오, 옥중이라도 도를 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이에 무제는 명을 거두고 종전의 법을 유지하도록 했다.

무제 자신이 백의승정(白衣僧正, 속인승정)을 맡아 계율로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고 했을 때 정면으로 반박한 이도 지장이었다. 그는 황제를 찾아가 설전을 벌였다. 오로지 죄로써 승려를 다스린다면 이익보다 폐해가 크다고 했다. 승단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제는 수긍했고 지장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소명은 강단 있는 지장이 좋았다. 그를 방문할 때면 소명은 지극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주변에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그런 지장의 빈자리가 유독 커보였다.

불경 강론을 청한 법운이 소명을 법좌로 안내했다. 소명은 8명의 젊은 수재들과 14명의 대덕 앞에서 담담히 강론을 펼쳐나갔다. 첫 주제는 진(眞)과 속(俗)의 ‘이제(二諦)’였다.

“이제(二諦)의 이치는 실로 깊고 오묘합니다. 허심(虛心)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 원대함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진제(眞諦)의 진실은 진(眞), 속제(俗諦)의 진실은 속(俗)입니다. 진제는 유와 무를 벗어나 있고, 속제는 바로 유이며 무입니다. 유이며 무인 것, 이것은 거짓된 이름입니다. 유와 무를 벗어난 것, 이것이 중도입니다. 진이란 바로 중도로서 생멸이 없음을 실체로 합니다. 속이란 거짓된 이름으로서 생멸의 법칙을 실체로 합니다.”

소명은 일체를 대상인 경(境)과 주관적 앎인 지(智)로 구분했다. 이제의 한역어인 진제와 속제, 제일의제와 세재의 한문적 의미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성인에게 비친 이법(理法)을 진제, 범부의 그릇된 견해로 인해 왜곡된 대상은 속제라고 했다. 소명은 진제와 속제를 초월한 경지가 실진(實眞)이라고도 했다. 강론이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먼저 질문한 것은 승정 혜초였다.
“진과 속이 하나라면 진제도 역시 일어나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진제와 무관한 것입니까?”

소명이 곧바로 답했다.
“진의 이치는 적연한 것이어서 일어나 움직이는 상(相)이란 게 없습니다. 범부들이 미혹돼 스스로의 잘못된 식견이 일어나 움직인 것입니다.”

친동생 소강이 물었다.
“진이 속과 다르지 않고 속이 진과 다르지 않다면, 어째서 속인들은 생법(生法)을 실체로 보고 성인은 불생(不生)을 실체로 봅니까?”

소명이 다시 대답했다.
“속에서 진을 알고 진에서 속을 본다면 그 차별이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 의거해 논하면 생과 불생의 차별이 생긴다.”

이어 혜염, 왕규, 승천, 소정립, 소공, 승회, 소영, 소매, 법운, 혜령, 소엽, 법선, 소기, 혜령, 혜흥, 승민(僧旻), 법총, 승민(僧愍), 경탈 등 22명과의 치열한 문답이 오고갔다. 소명은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상대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가 하면 불경 내용을 들어 자신의 해석이 정당함을 피력했다.

소명은 이어 법신(法身)에 대해 강론을 펼쳤다.
“법신이란 텅 비고 고요해 유무의 경계와 인과법칙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지식으로나 인식으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밝히려면 침묵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굳이 법신이라 이름붙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지(無知)이며 청정하지만 없지 않으므로 묘유(妙有)라 합니다. 허나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없음과 있음을 모두 벗어난 것이 바로 법신입니다.”

법신 강론이 끝나자 혜염, 승민, 법총, 혜령, 정안과의 송곳 같은 문답이 다시 오고갔다. 법운도 물었다.

“실로 만 가지 행으로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 했습니다. 어찌 그조차 무상(無相)이며 전혀 얻는 게 없다고 하십니까?” 소명이 대답했다. “묻는 이여, 명심하소서. 실로 온갖 행이 있다고 하나 그 행조차 공한 것이니 어찌 얻을만한 불과가 따로 있겠습니까?”

소명의 강론과 22명과의 길고 긴 문답이 끝났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혜의전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이들 중에는 내심 젊은 태자의 콧대를 꺾어놔야겠다고 생각한 이도 없지 않았다. 소명의 말문을 막히게 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은근한 욕심도 있었다. 18살 미소년 소명. 그의 명민함은 알았지만 이토록 뛰어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법을 강론하는 그는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 같았다. 어떤 난해한 질문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핵심을 간파하는 물음을 되던짐으로써 질문자를 당황케 했다. 소명의 불교 이해를 얕잡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법운도 흐뭇했지만 그보다 더 기뻐한 이는 무제였다. 그는 소명을 위해 강론 때 사용할 ‘물소 뿔 여의(水犀如意)’를 보내왔다. 강론이 끝난 후에도 무제는 직접 혜의전을 찾아 소명을 격려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소명은 그런 ‘아버지 황제’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불경의 말씀은 깊고도 오묘하며 모든 경전의 총합입니다. 북두칠성이 사계를 움직이고 태양이 만국을 비추는 것 같습니다. 제 무지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강론했으니 청중들에게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소명은 황제를 도와 민간과 군사를 살피기 시작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면 소명은 좋아하는 음식을 멀리하고 허기만 채웠다. 빈곤한 집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몰래 쌀을 전해주었다. 미리 의복을 많이 준비하도록 해 겨울이면 가난한 이들이 입을 수 있게 했다. 사람이 죽어 매장할 수 없으면 관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백성이 세금과 노역에 힘들어할 때면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한 번은 무제가 백성을 징발해 수도 관개사업을 벌이려 할 때였다. 소명은 백성들의 양잠업과 농업에 큰 지장이 있고 생계를 잃을 수 있으니 영을 거둬줄 것을 간곡히 요청해 중단케 했다. 백성을 향한 소명의 애틋함이 깊어갈수록 소명을 향한 백성들의 사랑도 커져갔다.

소명의 큰 즐거움은 책에 있었다. 새벽녘까지 고금의 문학작품과 만날 때도 많았다. 그는 시를 짓고 글을 쓰기도 했다. 도연명은 소명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틈틈이 고승들을 찾아 법을 청해 들었다. 소명은 유난히 법운의 설법을 좋아했다. 그의 감로법문을 듣고 소명은 시를 짓기도 했다.

‘…깨닫기 위해서는 무명(無名)의 경계로 돌아가야 할 터/ 이 분처럼 불법을 깨달은 사람만이/ 진공(眞空)의 도를 표현할 수 있으리니./… 그런데 나는 왜 이리도 급히 말을 모는가?’

525년, 대승정(大僧正) 직무를 맡은 법운은 불교와 관련된 큰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법운은 아프고 힘들어도 강론을 그치지 않았다. 소명이 소리 없이 백성을 돕는다는 소식은 큰 기쁨이었다. 그는 훗날 소명이 위대한 성군이 되리라 확신했다. 529년 3월, 향년 63세의 법운은 자신이 기거하던 승방에서 속세의 인연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법운의 바람과 달리 소명의 운명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법운이 떠나고 2년 뒤인 531년 4월, 병으로 앓던 소명이 세상을 떠났다. ‘양서(梁書)’에는 그날 수도의 남녀들이 모두 궁문으로 달려와 혈육을 잃은 듯 울부짖었으며, 변경의 백성까지 통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사(南史)’에는 그의 죽음에 얽힌 얘기가 전한다.

531년 음력 3월, 태자가 궁궐 뒤편 연못에서 배를 타고 연꽃을 따고 있었다. 궁녀가 장난으로 배를 흔드는 바람에 태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간신히 구조됐지만 그 때부터 소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소명은 무제가 걱정할 것을 염려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도록 단속시켰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시종들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뛰듯이 동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소명은 무제가 동궁에 닿기 직전에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어느덧 사실처럼 간주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란 쉽지 않다. 늦봄에 연꽃이 피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학자는 소명이 하윤(何胤)에게 보낸 편지에 주목했다. 소명은 이렇게 썼다. “지금 다시 열병이 저의 정신을 혼미케 하고 풍두현(風頭眩)까지 겹쳐 몸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풍두병은 머리와 눈이 어지러운 병이다. 평소 허약했던 태자가 지병으로 돌아갔다고 봐야 훨씬 타당하다는 것이다.

궁녀와 연꽃을 따다 화를 당했다는 얘기는 소명의 연꽃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소명태자집’에도 연꽃과 관련된 그의 시와 글들이 전한다.

‘강남의 연꽃 따는 곳, 만발한 꽃에 눈은 절로 즐겁네…’(詠同心蓮詩) ‘(저 연꽃은) 각 부분이 고운 빛깔들로 어우러졌고, 그 명칭도 여러 가지. 꽃봉오리 맺는 한여름엔 진한 향기 가득하고, 가을을 빛내주는 그 늦은 꽃이러니….’(芙蓉賦)

어쨌든 31살 소명은 법운의 기대와 무제의 슬픔을 뒤로 한 채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일생은 막을 내렸더라도 그가 남긴 문자향은 지금까지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소명이 역대 대표적인 시문(詩文)을 선별해 집대성한 ‘문선(文選)’ 30권은 동아시아 문학의 원천이 됐다. 오랜 세월 문인과 교양인들의 필수 품목이었으며, 조선의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1478년)도 ‘문선’의 영향이었다. 조계종 소의경전으로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는 ‘금강경’. 그 경전을 32장으로 분류하고 각 장의 제목을 단 것도 바로 소명태자였다.

중국의 어느 역사서에서도 소명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혜롭고 백성을 사랑한 어진 태자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역사에서 가정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찍 죽은 태자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을 무제의 비통함도 없었으리라. 또 양나라가 그토록 쉽게 멸망으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법운이 소명에게 보낸 편지는 ‘속고승전’에 전한다. 소명과 법운 등 22명의 논객들이 벌인 토론 내용은 ‘소명태자집’에 실려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4호 / 2014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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