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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법륜사 회주 해월 선래 스님

“부처님 법 배웠으면 실천으로 옮겨야 참 공부”

▲ 선래 스님은 1958년 출가. 1960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70년 문경 김용사 주지, 1977년 고운사 주지를 역임한 후 1981년 법륜사 주지를 맡았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과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금정학원 이사장을 지낸 후 현재 법륜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법륜사에 하얀 눈이 잠시 날렸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울려 있어서일까? 도심사찰이라기 보다는 산사 느낌이다. 해월 선래 스님이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도 ‘탁’ 하니 펼쳐진 경치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선래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채를 ‘학소대’라 이름한 연유가 능히 짐작 간다.

출가 전 선래 스님이 고등고시를 패스해 ‘세상을 호령해 보겠다’며 운달산 김용사로 들어간 건 1957년. 시간 날 때마다 사찰업무를 봐 주던 청년은 종무일로 서울 총무원에 갔다 동산 스님을 처음 만났다. 한 눈에 보아도 거목임을 직감했다. 동산 스님 역시 사제 간의 인연을 꿰뚫었던 것일까? 동산 스님은 청년에게 ‘천연(天然)’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천연거사는 ‘군에 갔다 와 출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느 날 묘적암에서 본 광경이 집에 돌아와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일타, 법전, 석주 세 스님이 가부좌 틀고 정진하던 그 모습! 과거응시 차 장안으로 가던 중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부처되는 것만 하겠는가?’라는 한 스님의 말에 마조 스님을 찾아가 화두를 들었던 단하천연 선사처럼 천연거사도 자문했다.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부처되는 것만 하겠는가!’ 생각이 예까지 이르니 ‘군 제대 후 출가’라는 말도 사족이었다. 집안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 길로 범어사로 향했다.

해질 무렵 범어사 입구 팔송정에 도착해 겉옷을 모두 벗어 길가 나무에 걸어놓았다. 옷이 귀할 때니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라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는 ‘속세 옷은 이제 필요 없다’는, ‘저 일주문으로 들어선 후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발로였으리라. 그 때가 1958년 음력 3월이다.

사미계를 받았다. 동산 스님은 ‘선래(善來)’라는 법명을 내렸다. ‘본생경’에서 용왕의 항복을 받아 낸 후 용왕에게 삼귀의와 오계를 준 그 ‘선래’다. 하지만 선방으로 직행할 수는 없었다. 당시 교무를 맡고 있던 진상 스님에게 자신의 바람을 고했으나 ‘초발심자경문도 배우지 않은 사미가 감히 선방에 가겠다는 것’이냐며 핀잔만 들었다. 그대로 물러설 선래 스님이 아니다.

공양주 소임 당시 200인분의 밥을 짓다 보니 어떤 때는 설고, 어떤 때는 질었다. 그때마다 대중스님들이 “오늘은 왜 이리 설었냐”며 한 소리했다. 하루는 설익은 밥, 진밥, 고두밥 세 가지로 지어 내놓고 대중스님들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골라 드세요!”

대중스님들은 파안대소했다. 사미가 보여주는 기백은 이미 사중에서도 정평이 나 있던 터였다.

선래 스님은 선방으로 가 소리쳤다.

“저에게 초발심자경문 일러주실 분 안 계십니까?”

묘적암 인연 덕이었을까? 석주 스님이 나섰다. “내가 해 줄 테니 저녁예불 끝나고 법당에서 만나자.”
결국 밤을 꼬박 새워 다 마쳤다. 선원에서도 ‘기가 찰 노릇’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날 저녁 당당히 선방에 들어섰다. 설봉, 기산, 응담, 일타, 도우, 지유, 지원, 석주 스님 등 20여명과 함께 한 첫 정진. 화두는 은사 동산 스님이 내린 ‘마삼근(麻三斤)’이었다.

7일간의 용맹정진 중 아침공양을 위해 청풍당으로 가던 중 보제루 기둥을 안고 잠든 적도 있었다는 선래 스님. 강원으로 간 도반 스님들도 한 마디씩 일렀는데 홍선 스님과의 대화가 일품이다. 홍선 스님이 웃으며 묻는다.

“선래 스님. 어제 저녁에 도통하셨나?”

선래 스님이 받아친다.

“다 되어 간다!”

이후 도리사, 불국사 등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 법륜유치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닌 ‘노는 곳’이어야 한다는 게 선래 스님의 유치원 지도방침이다.

선래 스님이 손수 낸 차향이 눈 내리는 학소대(鶴巢臺)를 감싸 안았다. 1981년 20여년의 행각 후 발길이 닿은 곳이 법륜사였다. 12평 남짓의 법당도 기울어져 가던 시절 스님의 첫 불사는 사찰건축이 아닌 유치원 개원이었다. 1983년 개원한 법륜유치원은 부산불교 최초 유치원이라는 소사(小史)를 썼다. 그러고 보니 연등축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부처님오신날 합동법회(1975년)도 선래 스님이 기획하고 이끌었다.

“어느 날 한 신도님이 오셔서 푸념해요. ‘스님, 우리 아이가 교회 유치원부 다니더니 맨날 아멘해요.’ 아하, 하면서도 아차 싶더군요. 천진불을 안 모셨구나. 어린이포교 놔두고 불교미래 운운하다니, 어불성설이었구나.”

금정학원 이사장을 맡으며 교육불사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던 선래 스님. 장르별 포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간파했던 것이다. 매년 170여명을 수용하고 있는 ‘법륜유치원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한다’는 말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비결이 뭘까? 법륜유치원에서는 영어교육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박물관이나 유물관을 간다. 아울러 법륜유치원은 ‘작가와의 만남’을 추진하며 아이는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작은 도서관도 운영하고 있다. 인근 지역의 문화시설로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에게 특정종교를 주입시키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불교와의 인연을 지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일 뿐입니다. 입학식 날 학부모들에도 ‘부처님 만난 인연 소중히 생각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법륜유치원 인연이 지속 돼 성인이 되어서도 ‘부처님 마음’ 잃지 않기를 바라는 스님의 작은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벌써 초기 유치원생이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입학 시키러 오고 있다.

선래 스님의 생일은 관음재일이다. 세속 나이로 회갑을 맞은 그 날도 법상에 올랐다. 그리고는 단호히 일렀다.

“오늘부터 주지 안 합니다. 절은 상좌에게 맡깁니다.”

▲ 무량수노인요양원은 부산지역 최고 시설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는 1998년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했다. 만덕터널이 지나는 금정산 아래 자리한 사회복지법인 해월 무량수노인요양원은 부산 전역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단순히 최고의 시설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르신들을 부처님처럼’ 모시려는 직원들의 ‘보살심’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불은(佛恩)과 시은(施恩)에 40여년을 살아왔다.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여생을 조금이라도 편히 보낼 수 있는 쉼터라도 만들어보자 마음먹었지요. 염불정진하다 가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요.”

▲ 법륜사 대웅전 계단은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를 본 따 설계했으며 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3분의1로 축소해 조성했다.

‘마삼근’ 화두를 든 선객의 수행 끝자락에서 솟아 난 자비심이다. 그 자비심은 어쩌면 20여년의 행각을 끝내고 이곳 법륜사 학소대에 주석하면서 시작됐을 게 분명하다. 한 가지 궁금했다. 팔송정에 옷 걸어놓은 후 50여년을 정진일로만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서 얻었는지!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른다.

“설봉 스님의 선문염송 강의가 있었던 1959년 범어사 동안거 때입니다.”

설봉학몽(雪峯鶴夢), 만공·용성 스님 회상에서 공부했던 선사로서 불교와 유가학문은 물론 신학문에도 밝았던 선지식을 말한다. 1959년 동안거 당시 설봉 스님은 전국 선원 대표들에게 편지를 보내 세 가지를 질문했다. 도솔(兜率) 종열(從悅) 화상이 설치해 놓은 세 가지 관문인 ‘도솔삼관(兜率三關)’과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암두밀계(巖頭密啓)’, 그리고 ‘교화와 수련을 위하여 행선포교 방법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였다. 동산, 향곡, 효봉, 월하, 월산, 일타, 청담 스님 등 20여명의 선객이 나름대로의 지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활구들이 펄떡펄떡 뛰는 선의 진면목이 펼쳐졌으리라. 그 설봉 스님이 그 해 범어사 선원 스님들을 대상으로 염송을 강의했던 것이다.

“현재 금정총림 방장이신 지유 스님이 강의 원고를 받아 등사원지에 철필로 쓰면 제가 잉크를 발라 등사했습니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다 보니 선사들이 전하고자 했던 의미도 하나둘씩 다가왔습니다. 단언컨대 그 때 얻은 힘으로 오늘 날까지 서 있습니다.”

선객에서 주지, 교육자, 포교사로서 살아온 사문여정! 회향의 길목에 ‘복지’라는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걷고 싶은 것이리라. 그게 사문의 길이라는 것을 몸소 터득했기 때문이다. 순간 선래 스님이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궁금했다.

“두 가지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것, 부처님 법을 배웠으면 실천에 옮겨야 참 공부라는 사실만큼은 각인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전한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 실천에 옮기라는 뜻이다. “번뇌에 끄달리다 보면 시비에 휩싸일 뿐입니다. 시비에 얽매이다 보면 옳고 그름은 없어지고 무조건 내가 옳다는 아만심만 일으킵니다. 다 시간낭비입니다. 내 아이, 내 이웃이 부처입니다.”

선래 스님은 ‘금강경오가해’에서 설한 야보 선사의 게송 한 대목에 귀를 기울이라 했다.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 말고(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 / 나날이 산 위를 다니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

그 깊은 뜻 새겨 달라 청하니 만면에 미소 지으며 한마디 더 일러주셨다.

“야보 선사가 또 한 번 묻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산시산수시수 불재심마처·山是山水是水 佛在甚處)’ 있음[有]에 집착에서도 안 되지만 없음[無]에 떨어져서도 안 됩니다. 세상만물 인연따라 모였다가 인연따라 흩어질 뿐이니 나라 할 것도 없습니다. 참 나는 그 때 보입니다.”
무아를 지나 공관을 터득하면 진정한 내가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알음알이일 뿐이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길 잃은 사람의 속내를 간파했는지 한 마디 이른다.

“종경 스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일렀지요. ‘일천 강에 물이 있으면 일천 강에 달이 비치고(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 / 만 리나 되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으면 만 리 그대로 하늘이다(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千).’”

“이미 사족이 되었으니 더 이를게 없다”며 스님은 다관을 닫는다.

평생 화두 든 수좌의 모습 그대로다. 법륜사 학소대로 발길을 돌려봄직 하다. 이사의 길을 걸어 온 수좌의 일성이 가슴을 칠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34호 / 2014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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