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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심으로 들어가는 방법

기자명 혜국 스님

“망상과 싸우게 되는 까닭은 고요함을 취하고자 하기 때문”

▲ 중국 계태사에 처음으로 계단을 세운 법균 스님의 사리탑.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고 하니 그 한 가지라는 게 뭔가 있는 걸로 압니다. 특별히 깨달은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거죠.

망상이 일어나든 말든
말려들지 말라는 의미
망상은 그림자에 불과
그냥 한발 한발 대지
위를 걷듯이 정진해야

대지 위 걸으면서도
흙이 검다, 붉다하며
끝없이 분별한다면
결코 나아갈 수 없어

그만큼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중도(中道)라고 누누이 말을 하는데도 몰록 무심(無心)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취하고 버리는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지동귀지(止動歸止)하면 지갱미동(止更彌動)하나니”라고 짚어주고 있습니다.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 이런 말씀은 정말 애써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아! 그렇구나”하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모으게 됩니다. 잠을 안 자려고 악을 쓰면 쓸수록 잠은 더 쏟아지고 고요하려고 망상을 내리 누르면 누를수록 망상은 더 혼란스러웠던 경계에 많이 울어 봤으니까요. 물론 신심명에서는 이런 지엽적인 얘기가 아니라 근본적인 존재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산란한 마음을 없애고 고요함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그 바람이 망상 하나를 더 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든 말든 말려들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망상은 그림자이니까요. 한발 한발 내딛고 대지(大地) 위를 걷듯 하라는 의미입니다.

분명히 대지 위를 걸어가지만 걷기만 할 뿐 아닙니까? 만약 그냥 걸어가지 않고 이 흙이 검다, 붉다, 모래가 많다, 적다 이렇게 따지면서 걸어가는 이는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게 당연하죠. 화두 참선도 이와 같습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놓아둔 채 그냥 화두에만 집중해야 됩니다. 그렇지 못하고 망상과 싸우게 되는 까닭은 고요함을 취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에 돌아가려고 하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전도몽상(轉到夢想)이라고 했거든요,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면서 가족이나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몸 하나도 그렇지 않습니까? 늙지 않기를 아무리 원해도 결국은 늙고, 아프지 말라고 해도 결국은 아프고, 죽지 말라고 애원해도 결국 죽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몸이라고 하는 내 자신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찌 남이 내 마음대로 되겠느냐,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그 생각을 바꾸라고 하신 겁니다. 내가 환경에 적응해야지 환경이 나를 맞춰 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분명 불가능한 일인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 썩었다며 바꿔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썩은 일이 없다, 썩은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이다, 이 마음만 바로 쓰면 세상은 항상 그대로 여여(如如)하다, 그래서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란 양변을 초월하여 가운데도 없어진 ‘원융무애’(圓融無礙)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져 다한다는 말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래서 “자성청정불(自性淸淨佛)이니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이르신 겁니다. 하늘이 맑다고 하면, 더럽혀졌던 하늘이 맑아진 게 아니고 본래 존재원리가 맑음 자체거든요. 그러니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해도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마음을 잘 닦아 나가겠다고 발원하면 그 기도는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치로 보나 사물로 보나 존재원리가 이렇게도 분명하건만 삶이 그렇지 못하니 그게 답답한 일입니다. 그 원인이 업(業)에 끌려 다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인이 주인노릇 못하고 도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그림자에 속는데 습관이 되어 버린 겁니다. 꿈속에서 불을 만나면 뜨겁다고 소리를 지르고 물을 만나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꿈속 일이 사실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기실 꿈속에서 꾸는 꿈만 꿈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사는 길, 이 모든 것이 꿈입니다. 다만 꿈인 줄 모를 뿐이지요. 하루 종일 누가 말하는지, 내가 나를 모르는 꿈보다 더한 꿈이 어디 있겠습니까? 억울한 남의 말 한마디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가슴에 상처로 부여잡고 있는 어리석은 꿈도 그렇고,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사로잡혀 아파하고 있는 꿈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상처는 내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상처가 되지 그냥 놓아 버리면 상처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란 내 마음에 붙들고 있는 기억일 뿐이요, 미래란 내가 상상하는 상상의 세계일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심명에서는 “유체양변(唯滯兩邊)이라 영지일종(寧知一種)인가”라고 하셨으니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겠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고요함마저 버리고 움직이는 대로 자연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 생각 또한 양변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다 버리고 자성청정을 바로 보라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일종불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니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경문(自警文)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인공아 내말좀 들어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문(空門)에서 대도(大道)를 깨달았거늘 너는 어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않는단 말이냐.”

이렇게 걱정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공문, 즉 허공성에는 아무리 똥물을 끼얹어도 더럽혀지질 않고 허공에다가 먹물을 끼얹어도 허공은 물들지 않습니다. 빈 그릇 즉 허공성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비워버리면 어떤 죄업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그 마음하나 비우지 못하는 것을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한다고 염려하시는 겁니다. 내가 남의 손을 잡아주거나 남이 내손을 잡아주려고 할 때 내손이 비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비어있지 않으면 양쪽 다 잃을 수밖에요. 마음하나 비우는 일, 그 일은 몰록 무심(無心)을 체득하는 일입니다.

무심이란 시비분별을 떠나 실상을 바로 보는 일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쉬우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비울게 없거든요. 너니 나니 모든 시비분별을 떠나서 중도, 즉 실상을 바로 보는 일이지 비울게 따로 있어서 비우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없음으로 해서 도(道)가 되는 것이지 나라는 벽, 즉 계란 안에서는 아무리해도 계란입니다. 계란이 깨어져야 병아리라는 생명이 됩니다. 계란이 깨어지려면 어미닭 체온과 계란이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어미닭이라는 부처가 계란이라는 중생을 품어서 어미닭과 계란이라는 양변이 허물어지는 찰라, 바로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됩니다. 어미닭이 알을 얼마나 치열하게 품었으면 조사어록에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하라는 인용이 그렇게 많이 나오겠습니까?

우리도 업이라는 환영의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어보고 나서야 화두의 고마움을 진실로 알게 됩니다. 흔히들 화두를 가지고 옛날 화두가지고 안 된다는 분도 계시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화두에 진실로 일념참구해보면 모양 없는 공성이란 옛날과 지금이 없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공성이나 지금의 연기공성이 전혀 다르지 않거든요.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물 컵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하나 가득 들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더 이상 넣을 수가 없고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없습니다. 이때 몰록 물을 쏟아 버리면 물 컵은 빈 컵, 빈 그릇, 허공성이 됩니다. 이렇게 빈 상태의 허공성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빈 상태였습니다. 허공성은 누가 새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새로 고쳐진 상태도 아닌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도 본래 빈 상태, 무심상태, 허공성입니다. 다만 온갖 번뇌 망상이 가득 차 허공성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뿐입니다. 번뇌 망상 집착만 놓아버리면 본래 모습이 열반적정이요, 지극한 도(道)입니다. 새로 만들거나 고치는 일이라면 실패할 수도 있고 잘못될 확률도 있지만 본래 완성되어 있는 본래 자리라 누구나 평등한 자리입니다. 너다, 나다 분리되기 이전 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확연히 깨달으신 뒤 하신 말씀이 “일체 유정무정이 모두 불성 그 자체로구나. 부처 아닌 자가 본래 없구나”라고 하신 겁니다. 제가 출가 입산한지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지금도 새벽 두시가 넘어가면 새벽예불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세세생생(世世生生) 출가 수행자의 길을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하루하루 삶이 부처님 은혜 갚는 삶이 되도록 정말 애써보겠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고마움의 절이 저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 은혜가 마음 깊이 맺힐 때가 온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유체양변(唯滯兩邊)이라 영지일종(寧知一種)인가 하시고선 뒤이어 일종부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니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원인이 부처님께서는 오직 인(因)을 중요시 합니다. 인을 중요시 한다는 말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 한다는 말이죠. 반대로 중생들은 과(果)를 중요시 합니다. 과를 중요시한다는 얘기는 오직 열매만을 찾는다는 얘기죠. 씨앗을 중요시하는 부처님께서는 씨앗만 심어놓으면 언제든 열매를 맺게 마련인데 씨앗은 심지 않고 열매만 찾는 중생에게는 어느 하세월 가더라도 열매는 나타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이라는 씨앗 심는 일만 하시다 보니 심어놓은 씨앗에는 싹이 나고 항상 열매가 맺기 마련입니다. 중생들은 씨앗은 심지 않고 열매만 찾으려 하니 씨앗 심지 않은 열매가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수행정진도 그렇습니다. 깨닫겠다는 열매만 찾다 보니 자칫 깨닫겠다는 욕심이 앞서게 되고 그게 오래가면 병이 되기도 합니다.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어 오직 삶 자체를 수행과 연결시켜 씨앗을 심어 나가면 훨씬 더 나은 결과가 올텐데’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두에 대한 믿음이 투철하면 화두를 참구할 뿐 다른 것을 구하는 마음이 줄어들게 되고 씨앗 심는 참구가 더 간절하게 됩니다. 그 간절한 의심과 욕심이 개입된 의심의 차이는 천지현격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는다고 하신 겁니다.

[1235호 / 2014년 3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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