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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단개혁의 배경 - ⑥ 교단 민주화의 대두

사회 민주화 이끈 출재가, 종단개혁 견인차 역할

▲ 1994년 종단개혁은 사회 민주화를 견인했던 민주세력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본격화됐다. 1992년 창립된 통불협 의장 지선 스님과 민불련 초대의장 여익구 씨가 공동 시국선언에 앞서 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최대 화두는 민주화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권력은 이 땅의 민주주의 싹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정치권력의 독점은 물론 사회곳곳에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독재 권력에 기댄 재벌의 성장은 사회 구조적 모순을 가져왔다. 때문에 군부독재권력을 몰아내는 것은 시대적 요구였다. 이런 민주화의 흐름은 1987년 ‘6·10민주항쟁’을 이끌어 냈고, 결국 군부독재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반 민중들의 열망으로 이끌어낸 민주화의 힘은 사회에 참여민주주의의 싹을 틔웠다.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부활시켰고, 시민운동, 민중운동, 자주화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회 민주화는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불교계는 1954년 정화 이후 계속된 종단수뇌부들의 정교유착형 비리와 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종단 권력은 몇몇 기득권자들이 독점했고, 비민주적 종단 운영으로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6·10민주항쟁’을 경험한 출재가 개혁 세력들의 성장은 불교계에 참여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품게 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의현 스님의 3선 강행은 종단개혁 열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정권에 기대 막강한 종단권력을 누렸던 의현 스님은 결국 민주화라는 ‘시대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94년 종단개혁을 “1950년대 정화불사 이후 축적된 불교계의 내부불만과 개혁의지가 사회의 민주화 흐름을 타고 일거에 분출된 혁명적 사건”이라고 평가(박수호, ‘사회운동으로서의 조계종 종단개혁운동’)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군부독재 억압·착취 맞서
70·80년대 화두는 ‘민주화’
70년대 등장한 민중불교론
불교계 사회참여운동 토대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
진보적 민주세력 등장배경
9·7해인사 승려대회 계기로
반독재 민주화운동 확산돼

6·10항쟁 계기로 종단개혁
선거제도 등 민주제도 마련
민주화됐지만 승단 세속화
‘미완의 개혁’ 비판에 직면

불교계의 참여민주주의는 1970년대 ‘민중불교운동’에서 태동했다. 1970년대 박정희는 경제성장논리를 앞세워 인권을 외면하고 독재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민중불교는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출발했다. ‘현대 한국의 실천불교-운동과 이념’(박승길, 교단정화운동과 조계종의 오늘)에 따르면 민중불교운동은 ‘어용불교’ ‘호국불교’에 대한 대항개념이었다. 민중불교운동은 민중의 고통과 사회문제에 무관심 했던 한국불교계에 대한 비판과 자성에서 출발한 운동이었다.

‘민중불교’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6년 무렵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가 여름 수련대회에서 ‘민중불교운동 전진대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부터다. 당시 ‘민중’이라는 단어는 청년학생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회자되던 용어였다. 특히 1973년 민청학련 사건 때 ‘민족·민주·민중선언’이 발표되면서 ‘민중’이라는 개념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불교’는 불교계의 사회참여에 대한 강한 의지 반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민중불교운동은 불교계 내부에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보수적이었던 기존 불교계에서 민중불교는 불교계에 침투한 사회민주화운동세력들이 세력 확장을 위해 내세운 구호정도에 불과했다.

1980년대 들어 민중불교운동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법난’이 기폭제가 됐다. ‘10·27법난’은 재산축척 등 비리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무장한 계엄군이 총무원을 비롯한 전국 주요사찰을 급습, 당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스님들을 계엄사로 강제 연행한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호국불교’를 내세우며 스스로 지지하고 의지했던 국가권력으로부터 법난을 당한 셈이다. ‘10·27법난’은 불교계가 국가권력을 재인식하고 관계를 재설정하는 계기가 됐다. 불교자주화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민주화 운동기의 불교와 국가권력’(김광식, 대각사상 17집)에 따르면 1980년대 전반기 불교의 실천운동과 개혁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대불련과 진보성향의 젊은 승려층이었다. 대불련은 10·27법난 직후인 1980년 11월22일 성명을 내고 정치권력의 불교 내 문제 개입을 강하게 비판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젊은 학인들도 1981년 중앙승가대에서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1982년 전국학인연맹을 발족하면서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의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10·27법난에 대한 젊은 스님들의 성찰은 종단개혁의 요구로 이어졌다. 이들 스님과 재가불자들은 1983년 7월 ‘청년불교도연합(청불련)’을 결성하고 △출·재가의 결속 △불교개혁 △민족종교의 계승 △불국정토의 건설 등을 목표로 종단개혁을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1983년 8월 신흥사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승려살인사건은 개혁에 대한 불을 지폈다. 청불련은 조계사에서 ‘전국비상승려대회’를 열고 당시 총무원장 진경 스님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종법회를 열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원로회의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비상종단’을 출범시켰다. 청불련은 비상종단에 대거 참여하면서 종단 운영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비상종단은 출발부터 한계를 드러냈다. 충분한 개혁프로그램을 갖지 못한 개혁주체들의 역량 미비로 개혁은 쉽지 않았다. 결국 비상종단은 8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이 무렵 불교계의 사회 참여운동은 ‘민중불교 운동연합(민불련)’과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정토승가회)’가 주도했다. 1985년 5월 출재가 200여명이 동참해 출범한 민불련은 ‘민중의 고통해방과 자주·민주적 불교 건설’을 기치로 내걸었다. 민불련은 민중불교운동에 중점을 두면서도 재야운동단체들이 결성한 ‘민주·통일 민중운동 연합(민통련)’에 가입하는 등 사회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1986년 들어 재야운동권을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본격화됐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도 확산됐다. 불교계 소장파 스님 152명은 5월9일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사회 민주화와 개헌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국선언에 나섰던 스님들은 같은 해 6월 ‘정토승가회’를 창립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스님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결집시켰다.

민불련과 정토승가회의 역할 확대는 불교계 내부에서 불교 자주화와 사회 민주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1986년 ‘9·7해인사 승려대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관련 악법철폐의 요구에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대정부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불교신문(1986년 9월17일자)’에 따르면 이날 승려대회에는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을 비롯해 전국에서 2000여명의 스님들이 참석했다. 집행위원장 월주 스님은 “이번 승려대회는 단순히 불교관계법 개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민족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자리”라고 말해 승려대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계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을 비롯해 지방과 해외에서까지 승려대회를 지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개운사와 봉은사에서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대회가 열렸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계가 1987년 ‘6·10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도 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불교계가 한 축을 담당했다. ‘한국민중불교의 전개과정’(승가대 홍보부, 승가 5집)에 따르면 1987년 정부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정토승가회·민불련·대불련 등 불교단체들은 반대성명을 내고 농성에 돌입했다. 뒤를 이어 5월27일 불교계 인사 160명이 포함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돼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등 민주화 열기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6월10일 예정된 민정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토승가회와 민불련,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학인, 대불련 학생 등은 개운사 법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결의법회’를 갖고 6월 민주대항쟁의 서막을 알렸다. 이날 오후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불교공동대표 지선 스님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호헌철폐 민주쟁취’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불교계를 비롯한 민주세력들은 마침내 군부정권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과 1992년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사회 민주화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자 불교계 민주세력들은 종단 내부 상황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불교 수뇌부의 정권예속화와 몇몇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에 따른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단 개혁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1992년 정토승가회와 대승승가회가 통합해 발족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와 1990년 창립한 선우도량, 재가단체 등이 개혁의 전면에 나섰다. 이들은 1994년 의현 총무원장이 3선을 강행하자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를 결성하고 구종법회, 단식 등을 진행했다. 또 4월10일 승려대회를 개최해 의현 총무원장을 압박했다. 궁지에 몰린 의현 총무원장은 공권력에 기대 마지막까지 종권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사부대중의 열망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결국 의현 총무원장은 4월13일 사퇴를 선언하고 초라하게 사라졌다.

1994년 종단개혁으로 조계종은 민주적 제도를 도입했다. 총무원장이 임명하던 교구본사주지를 산중총회를 통해 선출하도록 했고, 중앙종회의원을 교구 재적승이 직접 뽑는 방식을 채택했다. 종단의 입법·사법·행정부의 권한을 명확히 한 것도 종단개혁의 성과로 꼽힌다.

그러나 종단개혁으로 도입된 ‘민주적 제도’는 오히려 승가의 ‘세속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선거제도의 도입은 승가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렸고, 다수결 원칙을 앞세운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를 우선시하는 전통산중공의 제도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다. 1994년 종단개혁을 미완의 개혁으로 평가하는 방증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6호 / 2014년 3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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