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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인도네팔 불교성지순례기 ①

  • 동행취재
  • 입력 2014.03.11 11:15
  • 수정 2014.04.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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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신심으로 바위산 뚫어 조성한 인도미술 백미

▲ 조계사 순례단은 엘로라석굴과 아잔타석굴에서 그 옛날 불교인들이 그랬듯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예불을 드렸다. 사진은 엘로라 10번 석굴.

대한불교총본산 서울 조계사는 2월19일부터 3월3일까지 인도네팔지역 불교성지를 순례했다.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을 비롯한 84명은 인도불교미술의 백미로 꼽히는 엘로라·아잔타 석굴과 불교 8대 성지를 일일이 찾아 부처님을 찬탄하고 기도했다. 순례단은 10대 청소년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뤄졌다. 휴가를 내고 참가한 직장인이나 결혼 40주년을 맞은 부부, 대학 강단에 서는 학자, 그림을 업으로 삼는 화가도 있었다. 남편과 아내, 할머니와 손녀, 엄마와 아이들, 며느리와 시누이, 사찰 도반, 어릴 적 친구의 손을 잡고 동참한 이들도 있었다. 순례단은 때로 부처님의 발자취에서 환희에 겨워했으며, 때로 파괴된 불교사원을 지켜보며 깊은 한숨을 토해내기도 했다. 본지는 3회에 걸쳐 조계사 순례단의 여정을 소개한다.  편집자

아잔타·엘로라 석굴사원
기원전 2세기부터 조성
열반상 등 세기의 걸작

84명의 조계사 순례단
부처님 닮겠다고 발원

2600여년 전 이 땅에 오신 부처님. 그 분은 계급과 성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뭇 생명의 평등을 주창한 혁명가였다. 신들이 군림하는 시대에 인간이 주인 되는 세상을 활짝 열어보였으며, 종교와 관습의 굴레에 신음하던 중생들에게 기꺼이 빛이 돼주었다. 그의 가르침은 인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히말라야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을 넘어 동아시아에도 깊이 뿌리내렸다. 20세기 본격화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불교는 평화와 지혜의 아이콘으로 동양을 넘어 서양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인도 대륙은 부처님이라는 가장 거룩한 성인이 태어나서 진리의 등불을 밝힌 성스러운 땅이다. 2월20일 새벽, 천축의 하늘 아래 선 조계사 순례단이 처음 방문한 곳은 엘로라 석굴이었다. 부처님을 지극히 사모하고 따르려했던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 마치 진흙이라도 되는 듯 커다란 바위산을 뚫어 조성한 엘로라는 신앙심의 결정체였다.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서 29km 떨어진 이곳은 불교가 전성기의 막바지를 향해가던 7~8세기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불교인들이 엘로라에 석굴을 조성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웃 종교인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바위산을 깎아내려갔다.

현재 34개 동굴들 가운데 1~12번까지 12개가 불교 석굴이다. 13~29번까지는 8~10세기에 조성된 힌두교 석굴이며, 나머지 30~34번까지는 9~11세기에 만들어진 자이나교 석굴이다. 각 석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바위를 파내 성전을 만들어갔다. 처음 소박한 석굴의 형태는 갈수록 세련되고 화려해졌다. 힌두교의 석굴에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후대 불교석굴에는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이 진득이 묻어나고 있다. 대립하고 경쟁하던 이 땅의 종교들이 엘로라에서 슬며시 화해하고 있는 것이다.

엘로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불교석굴은 단연 10번이다. 이곳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차이티야 불교석굴로 인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다. 고대 그리스의 석주를 떠올리게 하는 석굴 입구의 기둥과 반원형 천장, 목재를 이용해 지은 집처럼 대들보와 서까래 형태로 조각된 석굴 내부는 독특한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경주 석굴암은 김대성이라는 신라의 장자와 특출난 기술자들만의 작품이 아닌 그리스에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인도와 중국 땅을 거쳐 오며 축적된 인류문화의 집성체였던 것이다.

다음날 오전, 엘로라에서 30분 거리인 아잔타 석굴사원으로 향했다. 와고라강가 협곡에 자리 잡은 아잔타 석굴사원은 모두 불교 석굴사원들로 기원전 200년 무렵부터 서기 650년까지 조성됐다. 때로 석굴 조성 열기가 수그러들었던 적도 있고 잠시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아잔타의 29개 석굴에는 각 시기의 특징과 변화상 등 인도의 석굴 조성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때 수많은 수행자와 장인들이 거주했던 이곳은 7세기 중반 엘로라에 석굴 조성이 집중되면서 더 이상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던 아잔타 석굴은 1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1819년 호랑이를 사냥하던 영국군 존 스미스에 의해 인도 석굴의 백미라는 아잔타 석굴은 우리에게 성큼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순례단은 계곡을 따라 줄지어 있는 사원들을 찾았다. 교과서나 미술책에서 봤던 연화수보살과 밀적금강보살을 직접 친견할 수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에 의지해 그림 하나하나를 그려나갔을 장인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 속에는 1500년 전 불교인들의 신심과 미적 감각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우리는 예배를 할 수 있는 26번 석굴에 들어섰다. 길게 가로 누운 편안한 모습의 부처님 열반상, 그 옆과 아래에는 비통함을 감출 수 없는 제자들의 표정이 새겨져 있다. 세상의 이치를 일러주고 진리의 길을 일러준 위대한 스승, 그 분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했던 제자들의 깊은 슬픔이 가슴 저미게 와 닿았다.

▲ 아잔타 석굴의 부처님 열반상(왼쪽)과 그 밑에 새겨진 비통한 표정의 제자 모습(오른쪽).

석굴 중앙에는 범부중생의 2~3배는 됨직한 스투파 부처님이 천년의 시선으로 굽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의 목탁소리가 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신심 깊은 왕실과 재력가들의 후원으로 아잔타 석굴이 조성되면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참회의 굵은 눈물을 흘렸으며, 지혜를 갈고 닦아 금강석처럼 단단히 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중생제도의 길을 가리라 서원했으리라.

인류 정신문화의 원류 인도. 이 땅에서 수많은 사상과 종교들이 명멸해 갔지만 유독 불교만이 파미르고원과 죽음의 사막을 가로질러 동아시아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 거기에 가도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길. 지친 몸을 기대 쉴 나무 한 그루 없고, 하늘을 나는 새 조차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 먼저 갔던 이들의 뼈와 해골을 이정표 삼아 길을 가야했던 곳. 그 길을 나섰던 이들은 오직 낙타에 짐을 한가득 실은 대상(隊商)들과 전법과 구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불교 승려들뿐이었다.

훗날 동아시아 수행자들도 기꺼이 그 길 위에 섰다. 65살의 나이에 인도로 떠났던 법현 스님과 방금 담아온 물이 흙바닥에 쏟아진 물을 바라보며 ‘내 죽어도 동쪽으로 발걸음을 딛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사막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혈혈단신의 현장법사가 있었다. 19살의 신라 청년 혜초 스님도 그 고난의 대장정에 올랐던 위대한 순례자였으며 지식의 전파자였다.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지금 이어지는 칠정례의 한 구절처럼 서쪽에서 시작된 불교가 우리 해동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진리의 등을 밝히기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선지식의 공이 무엇보다 컸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겠으며, 어떻게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향기로 모든 욕심과 번뇌, 괴로움을 버리고 나눔과 비움의 삶을 실천하고자 하오니, 부처님의 가피가 온 세상에 두루 퍼질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도문 스님을 필두로 순례단의 지극한 발원이 석굴 안을 천천히 메워갔다. 그 옛날 수많은 불교인들이 꿈에도 그렸을 부처님 땅, 천축의 하늘. 우리는 첨단기기의 도움을 얻어 시속 700km라는 빠른 속도로 불과 9시간 비행으로 이 땅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마음만은 부처님과 온 생명을 던져 그 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 애썼던 선지식을 가슴에 품고 살겠다는 게 순례단의 굳은 다짐이었다.

인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6호 / 2014년 3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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