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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정선, '섬농'

기자명 조정육

“천지에 봄기운 가득한데 어찌 오지 않은 겨울을 걱정하겠는가”

“과거를 쫓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하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것을 추구하고 실천하라.”
-중아함경

사공도 ‘이십사시품’ 주제로
시의 풍격을 그림으로 묘사
정선의 해석력 감탄스러워

사공도의 ‘삼휴정’ 의미처럼
현재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며
잠시만이라도 마음 내려놓으면
고요함과 평온함 찾을 수 있어

젊은 여성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다섯 명 모두 스물을 갓 넘긴 나이였다. 창가에 앉아 밥을 먹는 그녀들 뒤로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신이 강림한 걸까. 입에 밥을 떠 넣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완벽한 아름다움의 절단면을 보는 듯했다. 여신들이 내뿜는 풋풋한 젊음에 홀려 나는 남자가 아닌데도 가끔씩 평정심을 잃었다. 어른 앞에서 어려워하는 사람은 여신들인데 나이가 두 배나 많은 내가 횡설수설했다.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는가. 여신들의 향연에 나이 든 사람을 끼워준 것만으로도 감격해 말이 두서없어졌다. 대화하는 중간 중간 나는 여신들에 대한 찬탄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 곱네요. 어쩌면 그렇게 예쁘세요. 수시로 주책없이 고백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여신들이 자신의 손에 어떤 보물을 쥐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해야 할 여신들 얼굴에 하나같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이 그녀들의 마음을 이다지도 쓸쓸하고 어둡게 했을까.

▲ 정선, <섬농>《사공도시품첩》, 1749년, 비단에 연한 색, 27.8×25.2cm, 국립중앙박물관.

찰랑찰랑 물 흐르고(采采流水) 
봄은 멀리까지 가득한데(蓬蓬遠春)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에서(窈窕深谷)
때때로 미인을 보네(時見美人)
푸른 복숭아꽃 나무마다 활짝 피고(碧桃滿樹)
물가에는 바람 불고 햇볕이 따사로워(風日水濱)
버드나무 그늘 굽어진 길 위로(柳陰路曲)
꾀꼬리는 이웃하여 끊임없이 날아드네(流鶯比隣)
기분 따라 더욱 가면(乘之愈往)
더 참된 경지를 알게 되리(識之愈眞)
만약 다하지 않음 가져다 쓰면(如將不盡)
옛 것과 더불어 새로워지리(與古爲新)

봄볕이 따스한 정오. 그윽한 골짜기에서 찰랑찰랑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푸른 복숭아꽃이 나무마다 피었다. 꾀꼬리도 봄을 찾으러 나온 듯 나무 사이를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버드나무 줄기가 흔들린다. 그 모습이 사뭇 춤사위를 하는 여인네의 몸짓 같다. 천지에 봄이 가득하다. 봄을 찾아 나선 걸까.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버드나무 곁에 서 있다. 여인은 나무에 종이를 올려놓고 붓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녀 곁에는 휴대용 손벼루도 놓여 있다. 복사꽃 핀 봄날의 감상을 시로 쓰고 있으리라. 그녀 스스로도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시를 통해 표현하는 여인의 모습은 이지적이면서도 우아하다. 저속하거나 가벼운 화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다. 나와 점심을 함께 한 다섯 명의 여신들도 그랬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섬농(纖穠)>은 봄이 펼쳐놓은 자연의 생명력과 화사함을 노래한 작품이다. 섬농(纖穠)의 섬(纖)은 가늘고 고운 비단을 뜻하고, 농(穠)은 꽃나무가 무성한 모양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지 않는 용어인데 섬세하면서도 농염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다. 중국에서 넘어온 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섬농>은 시의 뜻을 살려 그림으로 표현한 시의도(詩意圖)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이 화첩은 ‘만당(晩唐)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았던 사공도(司空圖:837-908)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주제로, 정선이 그림을 그리고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원문을 필사한 서화첩이다. 「이십사시품」은 12구로 된 24수의 4언시다. 추상적인 시의 풍격(風格)을 자연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한 시다. 한마디로 시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24개의 풍격을 보면 얼마나 추상적인 지 짐작할 수 있다. 1)웅혼(雄渾:웅장하여 막힘이 없음), 2)충담(沖澹:조용하고 담백함), 3)섬농(纖穠:곱고 화려함), 4)침착(沈着:작품 내용이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함), 5)고고(高古:고상하고 고풍스러움), 6)전아(典雅:법도에 맞아 고아함), 7)세련(洗鍊:능숙하고 단련됨), 8)경건(勁健:묘사력이 굳세고 힘참), 9)기려(綺麗:표현력이 다양하고 아름다움), 10)자연(自然:조화로운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체의 것), 11)함축(含蓄:깊은 뜻이 집약되어 간직됨), 12)호방(豪放: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음), 13)정신(精神:물질과 육체에 대하여 마음의 목적의식), 14)진밀(縝密:섬세하고 치밀한 구성), 15)소야(疎野:작품 내용이 활달하여 예법에 얽매이지 않음), 16)청기(淸奇:청결하고 기이함) 17)위곡(委曲:작품 내용의 자세하고 소상함), 18)실경(實境:생각과 마음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것), 19)비개(悲慨:작품 속에 담긴 슬픔과 개탄함), 20)형용(形容:세밀하고 정확한 묘사), 21)초예(超詣:작품이 매우 뛰어나고 뛰어남), 22)표일(飄逸:작품의 품격이 청신하고 뜻이 높음), 23)광달(曠達:작품 내용의 도량이 너그럽고 큼),  24)유동(流動:글이 아무런 지장 없이 흘러 움직이는 현상) 등이다.

이 중에서 정선이 그린 《사공도시품첩》에는 7)세련과 16)청기가 누락됐다. 원래는 24편 모두 시와 그림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정선의 그림 22폭과 이광사의 글씨 19폭만이 남아 있다. 화첩의 마지막 작품인 <유동>의 상단에는 ‘74세 되던 1749년 11월 하순에 겸재가 그린 작품’이라 적어 놓았다. 또 글씨의 마지막에는 ‘이광사가 1751 윤5월에 번천의 견일정에서 쓴 글’이라 적어 놓아 정선이 그림을 그린 지 3년 째 되는 해에 이광사가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사공도시품첩》은 조선초기부터 꾸준하게 그려진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를 읽은 후 정선의 그림을 보면 그가 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소화하여 형상화시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선은 따뜻한 봄날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에서 때때로 미인을 보네’라는 구절에 주목했다. 그런데 과연 시인이 골짜기에서 본 미인은 진짜 사람이었을까. 싱싱하게 피어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미인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선은 여인을 거의 그리지 않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서 <섬농>처럼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정선이 기존까지 고수했던 원칙을 깨고 화사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그린 것은 여인이 들어가야 <섬농>의 뜻을 충분히 살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꽃다운 여인처럼 봄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상징이 어디 있겠는가. 시를 시로 묘사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그림을 통해 시의 풍격을 묘사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추상을 구상으로, 개념을 이미지로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을 일시에 뛰어넘어 시의 풍격을 시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정선의 해석력이 감탄스럽다.

이렇게 싱싱한 봄날 <섬농>의 여인은 아름답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것처럼 현재의 축복을 넉넉하게 누린다. 그런데 내가 만난 여신들은 왜 그리도 얼굴이 어두웠을까. 그림 속 여인보다 더 눈부시게 화사한 여신들이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다. 그녀들이 오늘 들려주신 부처님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지나고 나면 정말 쓸모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탄식을 절로 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지난 과거 때문에 자신을 책망할 필요 없다.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겁먹을 필요도 없다. 그런 가당치 않은 시름에 빠져 꽃잎처럼 고운 시절을 저당 잡히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대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그러나 어떻게 현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사공도는 젊어서 관직 생활을 했으나 37세에 미련 없이 사표를 쓰고 낙향했다. 그는 심심풀이 삼아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삼휴정(三休亭)’, ‘휴휴정(休休亭)’이라 이름 지었다. ‘세 번 쉬는 정자’, ‘쉬고 또 쉬는 정자’라는 뜻이다. 평생 과로에 짓눌려 쉬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던 것일까. 정자를 짓는 의도가 본래 쉬기 위함이거늘 굳이 쉬는 행위를 세 번씩이나 강조한 이유가 궁금하다. 피곤한 다리를 올려놓기 위한 용도로만 지은 정자는 아닌 듯싶다. 나처럼 의아해 할 사람을 의식한 듯 그는 〈휴휴정기(休休亭記)〉라는 글을 지어 그 연유를 밝혀놓았다. 친절한 시인이다. “첫째는 재주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게 마땅하고, 둘째는 분수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게 마땅하고, 셋째는 귀 먹고 노망했으니 쉬는 게 마땅하다.” 읽고 보니 정자에 대한 이름 풀이가 아니라 정자를 지은 목적을 설명한 글이다. 과욕을 내려놓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는 뜻이다. 정자에 앉아 있어도 행여 벼슬살이를 떠난 결심이 희미해질 때면 현판에 적어 놓은 글자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재주 없고 분수를 모르며 귀 먹고 노망했어도 악착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박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이름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살겠다는 뜻이 가상하고 서슬지다. 이때부터 ‘삼휴(三休)’는 ‘관직에서 물러남’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쉬는 것이 꼭 은퇴 후에만 필요한 행위는 아니다. 관직을 버리고 부귀영화를 멀리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여신이 봄날의 향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잠깐 쉬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보기를 권한다.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게 아니다. 잠깐이면 된다. 하루에 단 십 분만이라도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 그 안에서 고요함과 평온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찬란한 이 봄에 여신 모두가 행복하기를.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6호 / 2014년 3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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