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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절언절려(絶言絶慮)

기자명 혜국 스님

“말 끊어지고 생각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 계단사의 계단. 중국의 기라성 같은 스님들은 이곳에서 계를 받고 중국 불교를 이끌었다.

“견유몰유(遣有沒有)요, 종공배공(從空背空)이라”하는 대목으로 들어갑니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하는 말씀입니다.

있음의 세계 즉, 세상 삶이 어렵다고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나겠다는 그 마음이 더큰 문제가 되고 공적함을 추구하면 구하는 그 마음이 이미 공을 그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이 육신이 있는 한 결코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내 몸이 곧 세상이라면 어디로 벗어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세상을 벗어나려는 목적이 내 몸 하나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그건 벗어나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 몸에 대한 집착입니다. 공(空)함의 대자유 마저 이 몸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업(業)의 작용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고 있는 거지요. 다만 자기 자신이 속는 줄을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있음을 버리려고 할수록 오히려 있음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는 겁니다. 더구나 공(空)이란 이 몸을 떠나서는 알도리가 없습니다. 이 몸이 세상이라면 세상법 떠나서 공을 알려면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법 떠나서 공을 찾는다면 이미 양변에 떨어진 거죠. 그래서 상(相) 속에서 상을 떠나야 되고 공(空) 속에서 공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사 귀찮다고 안보고 살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보기 싫은 꼴 안 보려고 눈감고 살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보기 싫다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고 싶은 대상입니까? 보고 싶은 꼴 안보고 시각장애로서 살지 않으려면 오만 꼴 다보고 살아야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보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느 선까지를 봐야할지, 어느 것을 안 봐야할지 하루 종일 그것을 분별하느라 아무 일도 못할 겁니다. 있음의 세계란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림자인데 어떻게 환영의 그림자를 실체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있음을 버리려면 오히려 있음에 빠진다”고 하신 겁니다. 반대로 공(空) 함을 따르면 모양도 빛깔도 없는 공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공(空)을 좋아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공을 등지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공(空)이란 공을 추구하는 그 생각이 끊어진 상태, 시비분별 끊어진 곳, 내가 없어진 자리입니다. 내가 없어진다면 죽거나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이 몸이 바로 이 자리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고 양변을 벗어나 완전한 행복,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에 드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나 아닌 존재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니 따라야 할 공(空)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대자유인 겁니다. 그래서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소중한 가르침입니까?

다음은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하게 된다. 이런 뜻이죠. 말로서는 감정의 전달밖에 안됩니다. 고요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는 결코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의 세계는커녕 말로는 음식맛 하나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된장맛 하나, 김치맛 하나도 말로 설명하려면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된장을 먹어본 사람이야 말이 필요 없겠지만 평생 된장 구경을 못해본 외국인에게 된장맛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은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된장을 직접 먹어보게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방울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길은 바다에 떨어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게 생각의 표현이거든요, 생각이라는 게 어디서 만들어지는 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생각을 일으키는지 생각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생각 몹시 억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렸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몹시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가 손을 대거나 접촉한 일이 없이 한 생각 일으킴에 따라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미소가 나오기도 하는걸 보면 생각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한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 걸 모른다면 꼭두각시나 허깨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생각이 존재한다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몸 어디에도 ‘고정된 생각 저장고’는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생각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할 때 거기에서의 모든 상(相)은 모양 있는 모양만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는 생각도 꼭 같은 상(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모양이 변하듯이 생각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생각이야말로 변하는 과정이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끝없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합니다. 바다에서 물거품이 수없이 일어나고 멸해도 바닷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연기공성(緣起空性)이니까요.

된장맛, 먹어 본 사람이야
말로 설명할 필요없겠지만
평생 된장구경 못한 외국인
말로 된장맛 설명할수 없어
천마디 말보다 좋은 방법은
직접 된장을 맛보게 하는것

언어도단이요 심행처멸이라
한방울 물 마르지 않는 길은
바다에 떨어지는 것이 유일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라”, “그러한 말의 세계가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이 끊어지기를 바라거나 생각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동안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요원한 얘기입니다. 말이 끊어졌다는 얘기는 생각자체가 무념이 되었다는 얘기지 끊어질 생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는 “무념위종(無念爲宗)하고 무상위체(無相爲體)하고 무주위본(無住爲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념(無念)이란 유(有)니, 무(無)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일체 상대되는 두 모양이 일체 진로를 영원히 떠난 자리입니다. 바로 진여(眞如) 정념(正念)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거듭 밝히기를 없다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이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의 씀이니라, 진여의 자성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듣고 보고 느끼고 알지만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물질과 모양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 라고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말길이 끊어진 길, 생각이 끊어진 길을 무념위종이라고 하고 그길로 직접 행하는 길이 화두참구 즉, 화두참선입니다.

고봉 스님께서는 “오직 본참공안 화두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에 간절하게 참구하라. 궁구하고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화두를 타파하여 벗어나면 바야흐로 성불한지 이미 오래임을 알 것이다. 이 한 도리는 기왕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생사를 요달 하고 죽음의 벗어남에 이렇게 역력하게 시험하신 묘방 중에 묘방이다. 오직 귀한 것은 실답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 뿐이니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깨닫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 태고 스님은 “사람의 마음이란 지극히 미묘하여 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얻을 수가 없으며 침묵으로도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일만 오직 화두 참구에만 마음을 두어 어둡지 않기만 하면 반드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대장부의 평생 사업이다”라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은 “귀근득지(歸根得旨)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나니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마음을 따르면 바로 깨달음이요, 망상번뇌를 따르면 자연 근본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이런 말씀이겠죠.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돌아갈 자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 가고 오는 시간도 없거니와 공간도 또한 없습니다. 본래 없는 마음인데 없는 마음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공을 깨닫는 길입니다. 근본에서 보면 육상원융(六相圓融)이거든요.

여기에서 육상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총(總), 별(別), 동(同), 이(異), 성(成), 괴(壞) 이 여섯 가지를 육상이라고 합니다. 현수 스님의 ‘오교장’에 보면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법당 한 채를 지으려면, 즉 한옥집 한 채를 지으려면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기와 모든 재료가 모여서 이뤄지게 됩니다. 그 재료가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볼 때는 기둥이요, 대들보라고 하지만 각자 법당이라는 자리에 모여 인연이 되어 법당이라는 한 채의 집이 세워지게 되면 그냥 법당일 뿐입니다. 전체적인 총(總)으로 볼 때는 기둥도 아니요, 대들보도 아니요, 그냥 법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기둥 하나만 없어도 법당은 허물어 져서 법당이라는 총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기둥하나에 대들보도 들어있고 기와도 들어있고 서까래도 들어있고 법당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합니다. 즉 육상원융이라는 세계가 이뤄집니다. 대들보도 그렇고 지붕도 그렇고 모두가 별이면서 총이고 총이면서 별인 겁니다. 법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자연 너나 할 것 없이 존재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무진연기(無盡緣起)가 펼쳐지는 겁니다. 총과 별이 하나요, 동과 이가 하나요, 성과 괴가 하나입니다. 물론 하나도 이름뿐인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공(空)에는 육상(六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명도잠 스님이 법안문익 선사를 참방하자 스승이 묻기를 “자네는 무슨 공부를 하다 왔는가”하고 물으니 제자가 “예, 화엄경을 배우다가 왔습니다”하니, “그렇다면 육상이 화엄경 어느 품에 있는가?”라고 재차 묻자 “예, 십지품에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육상원융이라 세간과 출세간 모두가 육상이 갖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이 그 말을 듣고 하시는 말씀이 “응, 그런데 공에는 육상이 없지”하자 영명도잠 스님이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스승이 다시 자비를 베풉니다.

“자네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양구, 즉 침묵했을 텐데….”

이렇게 일러주는데도 제자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가 다시 묻기를 “스승님, 상(相)이 없는 공(空)에 육상(六相)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하니 말이 끝나자마자 스승은 “공(空)이지” 이렇게 끊어 줍니다. 여기에서 제자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생각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는다고 이렇게 하신 겁니다.
 

[1237호 / 2014년 3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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