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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인도네팔 불교성지순례기 ②

  • 동행취재
  • 입력 2014.03.18 17:33
  • 수정 2020.06.19 15:01
  • 댓글 1

2600년 역사 거슬러 위없는 깨달음 완성한 최고 성인과 마주하다

 

▲ 부다가야 마하보디대탑. 윤회의 수레바퀴에 갇힌 중생들에게 이곳은 영원한 깨달음의 성지다.

엘로라와 아잔타석굴에 이어 순례단이 향한 곳은 산치대탑이었다.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쉬야주 수도 보팔에서 46km 떨어진 곳. 대탑 입구에 큼직한 총을 든 군인을 지나 200여 미터 쯤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거대한 탑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높이 16m, 넓이 37m 크기의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아쇼카대왕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에 의해 세워졌다.

마우리아왕조 왕자였던 그는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할수록 수많은 생명들도 앗아야했다. 왕위에 오른 뒤 9년째 되던 해 학살로 카린가국을 정복한 그는 심한 죄책감과 번민의 늪에 빠졌다. 그런 아쇼카대왕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이 불교였다. 불교는 그에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도록 했으며 뭇 생명에 대한 자비심을 일깨워주었다.

 

 

 

 

▲ 아쇼카대왕이 처음 세우고 후대에 증축된 산치대탑.

 

아쇼카왕 세운 산치대탑은
가장 정교한 불교미술 꽃

부처님 첫 설법지 녹야원서
순례단 ‘다툼 없는 세상’ 발원

부처님 존경한 후대인들
점차 신화적 인물로 각색

인도불교는 역사성 배제
언제라도 깊은 선정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 강조

아쇼카대왕의 불교 귀의는 불교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불교의 흥성을 꾀했으며 직접 부처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을 순례해 탑과 석주를 세웠다. 빈민을 위한 의료원과 동물을 위한 병원도 만들었다. 1000여명의 비구들을 모아 대대적인 불전을 결집했으며, 인도 전역에 수많은 사절을 보내 불교를 알렸다.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타를 스리랑카에 보내고, 멀리 이집트, 마케도니아에까지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인도 북부 지역에 국한됐던 불교가 세계 종교로 떠오른 것이다.

아쇼카대왕이 세운 석주는 불교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됐고, 그가 세운 탑은 훗날 탑신앙의 원천이 됐다. 동아시아에서는 그를 전륜성왕으로 숭상하며 숱한 제왕들이 롤모델로 삼기에 이르렀다.

오전 시간이라 대탑 주변은 한산했다. 직접 마주한 대탑은 명불허전이었다. 가장 정교한 인도불교 예술이라는 평가만치나 조각 하나하나는 생동감이 넘쳐났다.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고, 싯다르타가 말을 몰아 출가하고,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 정진하고, 설법을 위해 하늘에 오르고, 원숭이가 꿀을 공양하고, 대지의 여신이 환희에 겨운 춤을 추고, 부처님이 조용히 열반에 드는 장면이 대탑 곳곳에 향연처럼 펼쳐져 있었다. 부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보리수, 법륜, 발자국이 대신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198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손길에 까매지는 유적을 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 순례단은 아쇼카대왕의 고귀한 신심을 뒤로 하고 다음 일정지로 발길을 돌렸다.

무성영화에서 볼 수 있음직한 역에서 기차에 올라 프라데쉬 수도 럭나우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타지마할을 관람하고 산카시아로 출발했다. 타지마할의 웅장함과 완벽한 대칭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렇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22년간 수만 명 아내들의 눈물과 비탄을 자아냈다는 사실은 여전히 씁쓸하다.

델리 동남쪽 파그나에서 11km 떨어진 촌락에 위치한 산카시아는 마야부인에 대한 부처님의 애틋함이 깃든 곳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에 올라 법을 설했다. 그동안 부처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신통제일 목련존자에게 부탁해 어서 돌아오시도록 요청했다.
 
이에 부처님이 3개월 만에 돌아오셨다는 곳이 바로 산카시아로 인간세상과 하늘세상을 잇는 장소다. 아쇼카대왕과 현장법사, 혜초 스님 등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았다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그 언덕 한 가운데 자리한 작은 힌두교 유적은 세월의 무상함을 더욱 절감케 한다.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과 83명의 순례단은 부처님이 하강했다는 그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찬탄과 기도를 올렸다. 더 이상 굶주림이 없고, 눈물이 없고, 다툼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발원하며 정성껏 두 손을 모았다.

순례단은 사르나트(녹야원)를 찾았다. 바라나시에서 12km 떨어진 이곳은 부처님이 첫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 역사적인 장소다.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님은 약 230km의 거리를 맨 발로 걸어 여기에 이르셨다. 옛날 도반이었던 쿨리카, 카샤파, 바드리카, 아사지, 콘단냐 등 다섯 수행자의 무명을 밝혀주기 위해서였다. 처음 아는 체도 말자는 그들은 부처님의 풍모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법을 묻고 부처님은 자상하게 법을 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아라한이 탄생했다. 앙냐 콘단냐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부처님은 처음 대각을 이룬 후 전법에 나설 것인지 크게 갈등했다. 그 심오한 이치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싶었던 까닭이다. 범천의 간곡한 청에 따라 전법에 나섰다는 것도 부처님의 고민이 그만큼 깊었음을 입증한다. 이런 부처님이 다른 사람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쁨이었다. “참으로 콘단냐가 깨달았다. 참으로 콘단냐가 깨달았다”고 부처님이 환호했다는 기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사실 부처님의 주변 인물들 중에는 본명이라기보다 부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이름 붙은 경우들이 적지 않다. 초기불교 전공자에 따르면 아기를 낳은 후 7일 만에 떠난 신기루 같은 부처님의 어머니에게는 ‘환상’을 뜻하는 마야(Māyā), 어린 싯다르타를 정성으로 키워준 이모에게는 ‘위대한 생명의 수호자’를 의미하는 마하파자파티(Mahāprajāpatī)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처님의 유일한 아내였던 야쇼다라(Yaśodharā)도 ‘불멸의 명예를 지닌 여인’이란 뜻을 지니며,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첫 깨달음을 얻는 앙냐 콘단냐도 ‘최초로 깨달은 콘단냐’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불렸다. 다만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Rāhula)는 ‘악마’ ‘장애’라는 뜻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훗날 승가의 일원이 된 그가 교단 내에 말썽을 많이 일으키고 부처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들이 적지 않았음을 추측케 한다.

본명 대신 부처님의 관계 속에서 이름을 붙인 것은 후대인이 부처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부처님에 대한 고대 인도인들의 존경심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산치대탑에서 나타나듯 부처님이 있어야 할 신성한 자리에 보리수, 법륜, 발자국 등을 대신했던 것이나, 언어학과 문법학이 극도로 발달한 인도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문자화하지 하지 않고 애써 수많은 반복을 통해 자신의 몸에 각인시키려 했던 점도 그 때문이다. 부처님 입멸 후 500여년 뒤 불상이 조성된 이후에는 32상80종호 등 불상 조성 방식 규정이 속속 마련된 것도 부처님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의 발로였다.

 

 

 

 

▲ 마하보디대탑 내에 모셔진 불상.

 

어쨌든 콘단냐가 깨달음을 얻은 사르나트는 부처님이 모든 중생이 깨달을 수 있음을 처음 확인한 장소이자 5명의 비구가 삭발 출가함으로써 불, 법, 승 삼보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사르나트 동쪽에 현존하는 높이 42m, 직경 28m의 다메크탑은 5세기 굽타왕조 때 건립됐다고 전한다. 이곳에 와서 법을 설하고 기뻐했을 부처님. 그 분의 모습이 세월의 강을 건너 순례단에게 진한 감동으로 와 닿는다. 그 분이 여기에서 안거를 마친 뒤에 선언한 말씀도 귀에 들릴 듯 쟁쟁하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하늘의 올가미, 사람들의 올가미, 모두 벗어났다. 그대들도 하늘의 올가미, 사람들의 올가미, 모두 벗어났다. 수행자들이여, 길을 떠나거라.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가라.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말라. 처음도 유익하고 중간도 유익하고 끝도 유익하며, 내용도 좋고 형식도 잘 갖춰진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리라.”

우리는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 갠지스강을 둘러보았다. 모든 힌두교도들의 성지, 불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곳에는 수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많은 사람들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찬가를 부르고, 시신을 태워 그 재를 강물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부처님이 고행을 멈추고 목욕과 유미죽을 드셨다는 니련선하를 거쳐 영원한 깨달음의 성지 부다가야에 도착했다. 기원전 589년 12월8일, 여기에서 35살 젊은 싯다르타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었다. 성인 중의 성인이 되신 곳이자 모든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 되신 곳이다. 2600년 유구한 역사의 불교가 비로소 탄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산한 다른 불교성지와는 달리 이곳 비하르주 부다가야에는 입구부터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해 6월 발생한 폭탄 테러 때문인지 입구는 제법 삼엄했지만 내부는 성스러움이 그윽했다.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티베트, 네팔,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 등 동양의 순례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곳곳에 명상하거나 기도하는 서양인들도 종종 눈에 들어왔다. 세계 최고의 불교성지라는 명성 그대로였다.
84명의 순례단은 긴 줄을 따라 대탑 안 부처님께 정성스레 가사를 공양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도문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 벅찬 감동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한 사르나트(녹야원)의 다메크탑.

 

우리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 선정에 들었다는 일곱 장소도 하나하나 돌아본 후 멀리 보리수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칠정례와 발원문에 이어 도문 스님은 경전을 꺼내 부처님의 성도 부분을 차분히 읽어나갔다. 잠시 후 순례단은 부처님이 “어느 세상에서도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에서 죽어도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중국이 역사의 나라라면 인도는 비역사적인 나라다. 중국에서 수많은 역사서들이 있지만 인도에서 역사서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불교경전에서조차 장소는 언급되지만 시기는 ‘한때(一時)’라고 일컬을 뿐이다. 인도 불교사도 마찬가지여서 율장, 유물, 고고학적 성과, 거기에 동아시아 구법승의 인도여행기가 결정적 자료로 활용될 정도다. 수많은 학파들이 활동하고, 논리학, 수학, 문학 등 고도의 학문이 발달한 인도에서 역사는 왜 외면 받았던 걸까? ‘역사의 죄인’ ‘역사가 나를 심판하리라’라는 식의 동아시적 역사의식을 왜 인도에는 찾아보기 힘든 걸까?

순간 동아시아인들과 인도인들이 응시하는 곳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 집단화된 사회 속에서 효용성이 크다면 신화는 내면이나 명상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신화의 언어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인도철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말처럼 깨달음이란 궁극적 진리는 신화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도는 신화의 나라다. 부처님은 인간의 길을 걷고, 단지 길을 일러주는 분이라 했지만 후대인들은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의 인물로 바꿔갔다. 범천이나 수많은 기적, 이성적으로 이해가 힘든 부처님 전생담이 담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이 모두 그렇다. 그것이 부처님과 만나는 길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명상이나 기도로 내면의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은 더 이상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내면의 세계에서 나와 마주하는 실존인물인 것이다. 그렇게 훗날 대승불교의 개척자들도 부처님을 만나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불경에 나타나는 ‘한때(一時)’는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공간적 의미로 누구든 직면할 수 있는 세계임을 강조했던 것은 아닐까.

인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7호 / 2014년 3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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