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 혜가가 향거사에게

“자신이 부처임을 안다면 어찌 무여열반이 필요하리오”

550년, 홀로 수행한 거사
혜가에게 자기공부 점검

혜가 “참되고 그윽한 이치”
향거사 깨달았음을 인가

마니주를 자갈로 알더라도
활연히 깨달으면 참된 보배

무명과 지혜는 언제나 평등
만법이 그러한 줄 알 것 강조


"본래 마니주(摩尼珠)를 잘못 알아 기왓장이나 자갈이라고 했으나 활연히 깨달으면 바로 참된 보배입니다. 무명과 지혜가 평등해서 차이가 없으니, 만법(萬法)이 모두 그러한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여워서 이 글을 짓나니 자신이 부처와 차별이 없음을 관(觀)한다면 어찌 피안의 무여열반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齊)나라 향거사(向居士)는 세간의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벼슬에 올라 이름을 날리고 재산을 모아 떵떵거리며 산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될 수는 없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학문에 사람들이 존경의 눈빛을 보낼 때면 ‘그래, 사는 게 다 이런 거겠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뒷목이 서늘할 정도로 밀려드는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끊임없는 시비와 불쑥불쑥 치솟는 갖은 욕망도 그를 지치게 했다.

향거사는 불경을 읽으며 마니주가 외부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 중에도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존재는 그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달마는 동시대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설이 된 인물이었다.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아들이라는 달마. 인도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는 150살에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에 왔다고 했다. 양무제를 만나 나눴다는 얘기들도 들려왔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양성한 것이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소?”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 체(體)가 스스로 비고 적멸합니다.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향거사는 이 말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경을 읽고, 절을 짓고, 좋은 일을 한다고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청정한 지혜를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향거사는 달마의 흔적을 찾았다. 그에게 도육(道育), 혜가(慧可), 도부(道副), 총지(摠持) 등 여러 제자들이 있음도 알았다. 어렵게 도육이 달마의 가르침을 엮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책에서 달마는 중생들이 동일한 불성을 지녔음과 더불어 벽관(壁關)수행으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무분별의 경지에 도달해야한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경전에 의지 않고 스스로 관찰의 대상인 ‘이(理)’를 증득해야 한다고도 적혀있었다. 이어 사행(四行)에 대한얘기도 언급됐다. 원망과 증오, 고통과 번뇌는 모두 자신이 지은 업보이므로 참고 받아들이며 본래의 도에 힘쓴다는 보원행(報怨行), 인연에 순응하며 산다는 수연행(隨緣行), 만물이 공(空)함을 알아 밖에서 추구하거나 집착 말아야 한다는 무소구행(無所求行), 일체중생의 청정함을 믿고 끊임없이 자리이타의 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칭법행(稱法行) 등 4가지가 그것이었다.

향거사는 자신에게도 있다는 빛나는 보배를 찾고 싶었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평안과 자유의 마니주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달마의 가르침대로 익숙함과 편리함부터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향거사는 집을 떠나 숲과 들에서 지내며 내면의 깊은 세계로 침잠했다. 배고프면 열매와 나물을 먹고, 목이 마르면 시냇물을 마셨다. 그는 “이입(理入)이란 안심(安心)이며, 안심이란 벽관이다”라는 달마의 말을 묵묵히 실천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번뇌망상은 점점 스러지고, 참이나 거짓, 범부와 성인, 안과 밖의 구별까지 사라져갔다.

향거사는 내면의 보배구슬이 빛을 발할수록 ‘내가 정말 올바로 가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혜가(487~593)였다. 달마의 법을 계승했다는 그라면 자신의 공부 정도를 충분히 확인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혜가는 달마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유독 뛰어났다. 하남성 낙양 부근이 고향인 그는 처음 법명이 신광(神光)으로 수나라 승려였다. 젊었을 때 노장(老莊)의 전적과 불경을 익힌 후 낙양 용문의 향산(香山)에 가서 보정선사에게서 공부했다. 그는 각지를 편력하며 내외의 여러 학문을 접하고 지식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앎이 넓어졌지만 진리에 대한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신광은 32세 때 다시 향산에 돌아가 8년간 종일토록 명상으로 보냈다.

그에게 숭산 소림사에 9년째 면벽을 하고 있다는 서역의 고승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 전 깊은 명상 중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과(果)를 얻고자 한다면 어찌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가? 큰 도는 먼 곳에 있지 않으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520년 초겨울, 신광은 곧바로 바랑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소문처럼 달마는 정말 소림사에 있었다. 신광은 달마에게 가서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달마의 법을 이어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될 수 있었다. ‘속고승전’에는 그가 훗날 도적을 만나 팔을 잃었으나 법으로 마음을 다스려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잘린 곳을 불로 지져 피가 멎자 포백으로 팔을 싸맨 뒤 여전히 걸식하며 도를 전했다고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후대 ‘전등록’을 비롯한 여러 선 문헌에서는 달마와 혜가의 만남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 일본화가 셋슈 토요(雪舟等楊, 1420~1506)가 1496년 그린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법을 구하려 자신의 팔을 잘랐다는 이 고사는 진실여부를 떠나 깨달음에 대한 간절함과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상징해왔다.

신광의 정성스런 섬김에도 달마는 늘 단정히 앉아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신광은 생각했다. ‘옛사람이 도를 구할 때에는 뼈를 깨뜨려서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서 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털을 펴서 진흙땅을 덮고, 벼랑에서 떨어져 굶주린 호랑이를 먹였다. 옛사람도 이러했거늘 지금 나는 어떤가?’

그해 12월9일 밤새도록 큰 눈이 왔다. 신광은 꼼짝도 않았다. 눈은 무릎까지 쌓였다. 이런 그에게 달마가 물었다.
“그대는 눈 속에 서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신광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감로의 문을 여소서. 온갖 중생들을 널리 제도해 주소서.”
달마가 다시 말했다.
“불법의 오묘한 도는 오랜 겁을 부지런히 정진하되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한다. 하물며 어찌 작은 공덕과 작은 지혜, 경솔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으로 해탈을 바라는가? 헛수고일 뿐이다.”

그러자 신광이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싹둑 잘라 달마 앞에 내려놓았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들께서 처음 도를 구할 때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마침내 달마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법명을 혜가라고 바꾸었다. 유명한 혜가단비(慧可斷臂) 고사다.

다시 달마와 혜가의 문답이 이어진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제 마음이 아직 편치 못하오니, 스승께서 편안케 해주소서.”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

순간 혜가의 오랜 번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달마는 한 마디 말로 망념의 근원을 바로 돌이켜보게 함으로써 마음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한 것이다. 달마의 안심(安心)은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있지 않았다. 가장 본래적인 있는 그대로의 마음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이었다.

9년이 지나 달마가 인도로 가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그동안 얻은 바를 물었다. 다른 제자들이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얻다” 등등 말했다. 다만 혜가만이 일체의 말을 끊고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달마는 기뻐하며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고 칭찬했다. 달마는 혜가에게 법을 부촉하며 자신의 가사(袈裟)와 4권의 ‘능가경’을 건넸다. 장구한 동아시아 선종사의 첫 전등(傳燈)은 이렇게 시작됐다.

향거사는 달마가 돌아간 뒤 60살을 넘긴 혜가가 법을 펼치고 있음을 알았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 혜가의 설법에 시비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음도 들었다. 도항(道恒)선사도 그 중의 하나라고 했다. 1000명의 문도를 이끄는 그는 혜가의 설법을 전해 듣고 ‘악마의 언설’로 받아들였다. 경전의 권위를 부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한 제자들을 보내 혜가의 법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그러나 가는 이는 있지만 돌아오는 이는 없었다. 혜가의 법문을 듣고 그에게 속속 귀의한 것이다. 도항이 직접 혜가를 찾아갔다.

“나는 그대의 안목을 열어주려 했는데 무슨 이유로 심부름 보낸 사람들을 그리 만들었나?”
혜가가 대답했다.
“눈이란 본래 스스로 바른 것이지만, 스님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어졌을 뿐이요.”

도항이 깊은 원한을 품었다. 틈만 나면 혜가를 비방하고 괴롭혔다. 관청에 뇌물을 주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그를 해치려고도 했다.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향거사는 행여 혜가가 그들에게 해를 입을까 걱정스러웠다.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혜가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도 잘 알았다. 향거사는 그런 혜가가 있어 다행스러웠고, 동시에 그런 혜가의 고난이 안타까웠다. 향거사는 달마의 법을 이은 마음의 스승 혜가에게 붓을 들어 글을 써내려갔다.

“그림자는 형상을 말미암아 생기며 메아리는 소리를 따라옵니다. 그림자를 갖고 노느라 형상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림자가 형상의 그림자인 줄 모르기 때문이며, 소리를 질러 메아리를 멎게 하려는 것은 소리가 메아리의 뿌리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번뇌를 제거해 열반을 구하는 사람은 형상을 제거한 채 그림자를 찾는 사람과 같으며, 중생을 떠나서 부처를 구하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메아리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혹과 깨달음은 한 길이며, 어리석음과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향거사는 계속 이어갔다.

“이름이 없는 것을 이름 짓고, 그 이름으로 인하여 시비가 생깁니다. 이치가 없는 것을 이치 지어서 그 이치를 논하면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허깨비의 변화는 진실이 아닌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단 말입니까? 허망한 것은 실상이 없는데 무엇이 공(空)이고, 무엇이 유(有)란 말입니까? 얻어도 얻은 바가 없고 잃어도 잃은 바가 없음을 알고자 하나 나아가 뵐 겨를이 없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부디 화답해 주시옵소서.”

얼마 뒤 향거사는 혜가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보내온 글의 뜻을 자세히 살피니 모두가 실다워서 참되고 그윽한 이치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혜가는 편지에서 기왓장이나 자갈이라 생각했지만 깨달으면 그것이 곧 마니주이며, 만법이 여여함을 알게 된다고 했다. 자신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향거사가 천하의 혜가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이다. 그는 혜가가 있는 곳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렸다. 달마의 법이 혜가를 거쳐 자신에게까지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후 향거사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도부, 총지, 도육 등 달마의 제자들이 그렇듯 두타행과 자리이타의 길을 평생 걸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혜가는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법을 펼쳐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감로법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았다. 그 중에는 40대의 거사도 있었다. 그는 “제 몸은 문둥병에 걸렸으니 화상께서 죄를 참회케 해달라”고 청했다. 혜가는 그가 법기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혜가는 “죄를 가져오면 참회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는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혜가는 “나는 그대의 죄를 다 참회시켜 주었으니 앞으로 불법승에 의지해 살도록 하라”고 했다. 거사는 크게 깨우쳤다. 선종 3조 승찬(僧璨, ?~606)의 탄생이었다.

승찬에게 법을 부촉하고 가사를 전한 혜가는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다. 술집을 찾고 고깃간을 지나가기도 했다. 시장에서 만나는 이들과 잡담을 나눴으며 품팔이도 했다. 때때로 그들에게 선의 이치를 설명했다. 혜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갔다. 변화(辯和)라는 승려의 문도들 가운데도 점차 혜가의 법을 듣는 이들이 늘었다.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면 온갖 번뇌망상이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에 불과하다는 선의 세계는 젊은 수행자들의 가슴을 뛰도록 했다.

변화의 문도 수는 점점 줄어갔다. 그는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변화는 도항과 마찬가지로 혜가가 혹세무민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고을 수령을 찾아가 큰 죄가 있는 것처럼 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곧이들은 수령이 혜가를 잡아들여 없애려 했다. 피하라는 제자들의 간청에 혜가는 “이제 전생의 빚을 갚아야 할 때다”라며 순순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93년 3월16일, 그의 나이 107세였다. 법 앞에 늘 서릿발 같았던 혜가. 그는 갔지만 장차 동아시아 불교사의 판도를 뒤바꿀 선종의 불씨는 이미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혜가와 향거사가 주고받은 편지는 ‘속고승전’과 ‘전등록’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8호 / 2014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